"평가사님, 다시."
잠시 졸았다. 반으로 절단된 돼지들 앞에 서서 돼지 등급판정을 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판정한 내용을 받아 컴퓨터에 입력하는 이모가, 졸고 있는 나를 불렀다. 이미 네 시간째 돼지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몸도 지칠 만큼 지쳤었나 보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서서 졸았을까 상황을 원망하면서도 돼지들한테도 미안하고, 잠시 업무태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다가, 그래도 조금 졸 수 있지 않나 하고 다시 돼지를 들여다보았다. 척추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진 돼지의 안을 들여다보고 자로 등지방을 쟀다.
"하나, 17"
'하나'는 '암컷'이라는 뜻이다. '둘'은 수컷, '거세'는 거세로 성별은 3가지로 나뉜다. 등급판정 자료를 입력할 땐 순서대로'1, 2, 3'으로 적지만, 구두로는 평가사들끼리 암묵적인 규칙을 정해 말한다. 뒤에 덧붙인 숫자는 등지방을 의미하는 숫자로 17mm를 의미한다. 보통은 돼지 무게(도체중)과 등지방으로 등급이 나온다. 이것을 1차 등급이라고 하며, 그 외에 돼지에게 적당하게 살이 붙어있는지, 고기가 물렁한지 딱딱한지 적당히 탱탱한지, 고기와 지방 색깔은 괜찮은지 등을 이것저것 기준에 맞춰 돼지를 보고 만져보고 그에 맞는 등급을 준다.
요즘엔 등급 판정할 때 말로 판정하고 받아 적는 도축장은 거의 없다. 직접 판정하고 직접 컴퓨터에 입력하여 자료를 만든다. 한 시간에 200~ 350마리 정도 도축을 하기 때문에 조금 정신없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4년 전에 근무했던 도축장은 전국에서 top 3 안에 들 정도로 많은 돼지를 잡는 곳이었다. 하루에 3천 마리 정도. 오래된 도축장이기도 하고 도축물량이 너무 많아 우리를 배려해주는 작업방식이었다.
그 도축장은 판정 자료를 받아 적어주는 이모님이 텃세를 부리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눈이 판다가 될 만큼 화장을 짙게 해서 생김새부터 무지막지하게 센 이모님이었다. 매일매일 누군가와 큰소리로 싸우고 있었고 이모와 싸우고 퇴사하는 사람들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넓은 도축장에서 화가 잔뜩 난 이모 목소리만이 쩌렁쩌렁 울릴 뿐이었다. 그런 이모가 발령받아 처음 들어갔을 때 나를 처음 보고는 기싸움을 걸어왔다. 내가 평가산데, 내가 등급판정을 하는 사람인데, 돼지 등급판정을 잘못했다고 다시 보라며 버럭버럭 화를 내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당시 나는 소심했고, 어쩌면 신입답게 누가 잘못했다고 윽박지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미 '내가 잘못한게 맞다.' 라는 주의가 있을 때였다. 당연히 속에서는 열불이 났지만, 그냥 다시 봤다. 그리고 다시 평가했다. 이 과정을 져주는 사람이 잇는 방면, 월권이라 생각되어 지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잘 넘어간 사람은 그때부터 이모님의 사람이 되었다. 볼 때마다 홍삼사탕이든 여자용 장갑이든 춥다며 조끼패딩이든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같이 화를 낸 사람들은 그 뒤로도 이모님과 부싯돌이 만나듯 불이 튀겼다는 소문이 있을 뿐이다.
어느 날은 이모의 인상이 확연히 바뀌어있었다. 이모는 신나서 바뀐 게 없냐며 찾아보라고 방방 뛰었다. 뭔가 하고 자세히 이모 얼굴을 훑어보니 쌍꺼풀 수술을 하고 온 거였다. 안과에서 저렴하게 딸하고 같이 했는데 너무 만족스럽다는 거였다. 소녀같이 함박웃음 짓는 이모는 언제 그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던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나는 한쪽 눈에만 짙은 쌍꺼풀이 있는 짝눈이었는데, 나도 하라며 병원 이름과 가격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주었다. 이모는 내 두 손을 꼭 잡고 반짝이는 눈으로 행복의 아우라를 퍼뜨리고 있었다.
각박한 도축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모만의 방법이었을 거다. 남자들만 그득그득한 도축장에서 혼자 여자이기에 소녀다움은 고이 접어 덮어두고는 스스로 호랑이 장군이 되었다. 스무 살에 아기를 낳고 가정을 꾸린 이모가 그 시절에 돈을 벌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살벌하고 삭막한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발악으로 이모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었다.
도축장에서 일합니다' 글쓴이 - 오이(CY Oh)
동물을 좋아해서 축산을 전공했지만, 도축 관련 일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본업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 괴리감을 느껴 딴짓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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