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혹시 '초경의 날'이라는 기념일, 들어보셨나요? 매년 10월 20일인 초경의 날은 한국에만 있는 기념일이라고 합니다. 구독자님의 초경은 어땠나요? 에디터 N은 초등학교 6학년 추석 아침에 속옷에 묻은 피를 보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 초경을 하면 빨리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모친에게 피가 묻었다 말하자 변기 위 수납장에서 정혈대 하나를 꺼내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생이 된 후, 무리한 다이어트와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하혈을 하게 되었을 때 유일한 선택지가 정혈대 밖에 없던 에디터 N은 살 짓무름, 두통과 요통 등으로 더욱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몇 년 후, 정혈컵이라는 선택지를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놀랍기도 하고 한 편으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짧게는 매달, 길게는 몇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정혈. 오늘은 정혈 용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생리, 그날, 마법, 매직, 월경 그리고 정혈
용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용어를 먼저 살펴보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앞서 계속 언급한 정혈(精血)이라는 단어. 익숙한 분도, 처음 보는 분도 계시겠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리는 한 달에 한 번 반복되는 '생리 현상'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생리 현상이라는 단어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로 인해 나타나는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죠. 그리고 보통 생리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배설이나 배출을 의미하곤 합니다. 여성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일임에도 단독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 어떤 현상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정혈을 대수롭지 않거나 말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기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월경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분들도 있죠. 하지만 월경 역시 '한 달 주기로 일어난다'라는 뜻을 갖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여성이 매달 겪는 일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에서는 깨끗한 피라는 의미의 정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남성이 생리 현상을 통해 배출하는 것은 깨끗한 아들(세포)라는 의미로 정자 그리고 정액이라 부르는데, 여성의 피는 더러운 것 또는 쉬쉬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이유에서 미러링한 단어였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유명했던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제목처럼,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만들고 삶과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여성에게 '정혈'이라는 명명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에디터 N은 여중여고를 나왔지만 정혈을 월경이나 생리로 부르기보다는 '그날'이라고 부르거나, 정혈대를 '그거'라고 불렀습니다.같은 여자인 친구들 앞에서도 말할 수 없는 단어였던 생리. 언어로 여성의 몸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시키고 혐오하도록 만든 결과였죠. 2018년까지 정혈 용품 광고에서 '생리/월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언급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사회가 얼마나 여성의 정혈을 감추고 부끄럽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만들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습니다.
월경이 정혈로 대체되기에는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지만, 비유적이고 에둘러 말하는 표현보다는 직접적으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표현이 여성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시작점이 되는데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나랑 다툰 친구에게도 빌려줄 수 있는, 정혈대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정혈대가 가장 인기 있는 정혈 용품입니다. 근처 마트에만 가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휴지와 기저귀 사이 정혈 용품 진열대에는 정혈컵은 고사하고 탐폰마저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정혈대를 볼 수 있습니다. 한방 정혈대, 순면 정혈대, 유기농 면 정혈대, 날개형, 일반형, 오버나이트 등. 얼핏 다양해 보이는 선택지이지만, 사용해 보면 크게 편하지도 좋지도 않은 일회용 정혈대들이죠. 외출했다가 갑자기 정혈이 시작한 날엔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싸고 몇 개 들어있지 않은 정혈대를 사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정혈대는 언제부터 한국에서 사용했을까요? 일회용 정혈대는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 상품화되었습니다. 킴벌리사가 미국에서 코텍스를 선보인 지 50여 년이 지난 후였죠. 천(개짐*)을 고무줄이나 끈으로 고정해서 사용했던 옛 방식에서 유한킴벌리의 코텍스는 천을 일회용 패드로 대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1989년 날개형 일회용 정혈대가 나오면서 일회용 정혈대의 점유율이 크게 올랐죠.
2017년, 여성환경연대에서는 정혈대 전 성분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성의 일생에서 40여 년을 사용해야 하는 정혈대이지만, 정혈대 부작용과 여성 건강에 대한 피해를 밝힌 건강 역학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여성환경연대는 여성의 '월경권'을 보장하라고 외쳤죠.
여성환경연대에서는 정혈대 전수 조사와 유해 물질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직접 유해 물질 검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정부(식품 의약품 안전처)에서는 정혈대의 유해 성분 검사로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을 확인하는데, 여성환경연대에서는 검사 대상 항목을 해외 보고서에서 언급한 다이옥신, 퓨란, 잔류 농약 등까지 모든 유해 성분을 규명하고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요. 이로 인해 여성환경연대와 정혈대 제조 업체 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이듬해인 2018년 식약처는 일회용 정혈대 전성분표시제를 시행했습니다.
여성의 정혈권에 대해 공공 차원의 논의가 시작되면서 2019년 서울시에서는 모든 청소년에게 조건 없이 정혈 용품을 지급하는 조례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습니다. 2016년 '깔창생리대 사건'은 이러한 공공 차원의 정혈권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대표적인 예시였습니다. 이를 사회 취약계층이 겪는 '월경 빈곤'이라고 부릅니다.
월경 빈곤을 겪는 청소년들이 등교를 하지 못하고 신발 깔창 등을 사용하며 정혈 기간을 버틴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런 말이 있죠. 방금 다툰 사람도 정혈대가 급히 필요하다 하면 빌려줄 수 있다는 이야기. 처음 보는 사람도 같은 상황이라면 당연히 빌려준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여성이 결국 여성이기 때문에 서로 연대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정혈입니다. 깔창생리대 사건에 많은 여성들이 분노했고, 사회 취약 계층의 월경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시기에 사회 취약계층 아이들을 위해 정혈대를 기부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선의가 아닌 공공 차원의 변화였습니다. 유독 일회용 정혈대 비용이 많이드는 한국에서 여성들은 정혈 용품(주로 정혈대)을 구입하기 위해 평생 약 2천만 원가량을 소비한다고 하니, 사회 취약계층에게는 아주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국 여성들에게 정혈 용품의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은 것도 월경권 문제 중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정혈대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교육받고, 눈앞에도 하나의 선택지만 놓여있으니 월경 빈곤을 겪는 이들이나 일회용 정혈대를 사용하며 부작용을 겪는 이들도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선택지가 다양할수록 비싼 정혈대의 가격도 낮아질 것이고요.
* 개짐 : 여성의 월경혈을 받아내는 헝겊을 뜻하는 우리말로 조선 여성들은 주로 무명 개짐과 삼베 개짐을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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