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은 전진희의 플리를 들어주시길,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와 <낮달> 입니다..!
기준의 휴대폰을 둘러보니 실제로도 기준의 동생의 말처럼 별다를 것이 없었다. 사진첩에도 업무와 관련된 사진이나 캡처가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고, 문자메시지와 카톡 역시 업무 이야기뿐이었다. 다만 메모장에는 온통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기준의 동생이 기준과 관련된 대부분의 번호를 입력해 봤다고 했으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유서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꽂혀있으니 아마 그와 관련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숫자는 수레바퀴 아래서의 출간일인 1906이었다. 처음에는 수레바퀴 수를 생각해 보다가 아무래도 4자리로 조합하기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메모장에 자리한 가장 첫 번째 글을 클릭해 1906을 입력해 보았다. 비밀번호가 풀렸다. 혹시 몰라 두 번째, 세 번째 글 역시 동일한 비밀번호를 넣어보았다. 동일하게 풀렸다. 역시 유서를 이 책에 넣어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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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상단에 위치한 메모를 클릭해 보았다. 제목은 이러했다.
‘ 내가 만약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작성일은 기준이 세상을 떠난 지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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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이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난 살았던 것일까. 내내 목표로 삼았던 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진 기분이 든다. 공허하고 허무한 감정만이 나를 감싸고 있다. 과연 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전에는 그러하다 여겼다. 손에 닿을 듯한 목표만 이룬다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 일들이 일어날 때면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다. 텅 빈 것만 같다. 나의 마음들이 손에 집은 모래들처럼 우수수 빠져나간다.
은서는 어떨까? 행복할까-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은서일지라도 은서는 그것을 제외한 작은 것들에 쉽게 행복을 느끼는 이이니,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진 않을 테지. 은서의 그 소중한 마음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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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에 적힌 내용을 마주하며 은서는 또 한 번 눈물을 훔쳤다. 기준이 자신의 삶을 이렇게 여길 줄은 짐작해 내지 못했다. 은서가 보기에 기준의 삶은 성공적인 생이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차질 없이 계획대로 완벽히 이루어진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가장 가까운 친구의 진짜 마음은 은서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놀라우면서도 슬펐다.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였다면서도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대해서는 전혀 살피지 못했던 은서였다. 그것이 슬펐고 후회스러웠다. 만약,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기준의 선택을 되돌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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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는 1에서 100까지 존재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메모가 작성된 듯했다. 그러니 계산해 보면 약 2년 동안 써온 것이었다. 2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기준은 오랜 시간 힘들어했고, 고민했던 것이었다.
작성된 메모의 길이는 제각기 달랐다. 어떤 메모에는 그날 회사에서 있었던 속상한 일이 담겨있기도 했고, 또 어떤 메모에는 나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쓰여있기도 했고, 그것을 제외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담긴 글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의 역순으로 메모를 마주하고 있으니 어느새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맺힌 눈물이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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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몰랐다. 완벽해 보이는 기준이 이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을, 내내 기준을 부러워했던 은서였다. 자신과는 달리 무슨 일이든 독립적으로 해내는 기준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만큼 어떤 확신을 지닌 채로 움직이는 친구의 모습은 늘 부러운 부분이었다. 여전히 부모님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본다면, 멋진 모습이었다. 그것을 늘, 동경해왔다.
실은, 은서는 기준만큼은 아니었지만 일상생활에 있어 늘 우울감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이었다. 그 우울감의 원천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지 못했던 은서였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부모님이 기뻐할 만한, 그런 선택지만 쏙쏙 골라 선택해온 은서였다. 정작 자신 스스로가 직접 선택해낸 선택지는 없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은서에게 꽤나 큰 우울감을 안겨주었다.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무기력함은 늘 은서를 따라다니는 감정들이었고, 자신의 직업을 통해 어떠한 보람도 느끼지 못 했던 터라 그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만 갔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음에도 용기가 없어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또 시도하지 못했던 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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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 만약 나의 삶이 이렇게 흐를 것이라는 것을 그 당시 미리 알 수 있었다면, 20대의 나는 그때와 다른 선택을 용기 있게 할 수 있었을까? 다만, 이미 흘러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저 멀리 흘려보내는 편이 낫다. 어쩌면 그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기에 비로소 진짜 나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테니- 어떤 일이든 자신의 자리에서 계속 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지금은 조금 멀어진 나의 꿈이지만, 쉽게 잊지 않고 그 존재를 계속 마음에 품고 사랑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어쩌면 이러한 생각들이 자신 스스로에게 위로를 안겨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변명거리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후회하기보다는 그저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편이 덜 아프다는 사실을,
…
기준에게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다 이야기하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 또한 그랬다는 것을, 은서는 기준의 메모 속 내용들을 마주하며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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