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나톨리아 편지는 5주간 잠시 쉬어갑니다. 휴재 기간 동안 단편소설 《이송》을 연재합니다.

꩜
할머니가 파리채를 찾아 안채로 들어가셨을 때였다. 아메리칸 불독 한 마리가 테라스로 뛰쳐 들어와 내 닭 다리를 뼈째 삼키고 뒷길로 사라졌다. 고기를 단숨에 해치우고 돌아서기까지, 불과 수 초 동안 개는 짙은 인상을 남겼다. 근육이 단단히 올라붙은 흰 몸통에는 황톳빛 육대주가 새겨져 있었다. 얼굴로 말할 것 같으면, 삐에로처럼 입아귀가 솟았고 불그스름한 홍채가 박인 안와는 천연스럽게 늘어져서, 인심에 호소하기 딱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클라리넷을 불어 젖히며 골목골목 쌈짓돈을 쓸어갈 최우수 악사였으리라.
"벌써 다 먹은 게냐? 네 아빠를 닮아 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모양이구나."
느닷없이 웬 개가 난입했다고 하면 그 개에게 무슨 엄벌이 내려질까? 게다가 여름 내내 울타리를 손보라던 할머니의 닦달에도 할아버지는 백개먼[1]을 두는 데만 열중하셨다. 바른대로 고하는 순간 전쟁의 서막이 오를 것이 틀림없었다. 천성이 느긋하신 할아버지가 차일피일 미뤄오신 모든 일들—테라스 외벽에 방수 페인트 덧칠하기, 뒤란에 썩은 무화과나무 베기, 걸프전이 일어난 해에 다락에 넣어둔 레이스 커튼 꺼내기, 길고양이들이 망가뜨린 부엌 방충망 갈기, 낚시 동무 유수프 할아버지가 빌려가신 멍키 스패너 찾아오기 등, 할머니가 입 밖으로 낸 후 절대 잊지 않으신 그 지령들은 미사일이 되어 할아버지 정수리 위로 하나하나 떨어질 것이었다. 나는 대꾸 대신 파슬리 부스러기만 들러붙은 샐러드 볼을 뒤적거렸다. 아직 장에 나오는 토마토는 다디달았고 여름의 끝은 까마득했다.
그날 밤, 조부모님이 텔레비전 앞에서 졸고 계신 틈을 타 테라스로 나갔다. 왠지 그 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레기통에서 건진 닭 뼈를 들고 무너진 울타리 쪽을 서성이자, 머잖아 정말 그 개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나타났다. 해변을 배회하다 온 참인지 입에는 물먹은 막대기를 물고 있었다. 줄담배를 피워서 목소리가 걸걸한 이웃집 푼다 아주머니의 고함이 들렸다. "피코!" 개는 막대기를 화단에 뱉어 놓고 내 손에 들린 닭 뼈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리고 흡족한 듯 배를 보이고 벌러덩 누웠다. 아주머니가 다시 소리치셨다. "피코! 밥 먹어라! 피크렛!" 개는 등교에 늦은 학생처럼 아주머니의 집으로 내달렸다. 개가 남기고 간 막대기를 들어 올리자, 꼭대기에 달랑거리는 젖은 이파리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피코는 왼쪽 귀에 푸른 플라스틱 귀표를 꽂고 다니는 들개였다. 푸른 귀표를 꽂았다 함은 지자체에서 데려다 중성화와 백신 접종을 시켰다는 뜻이다. 영락없이 수컷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작정하고 데려다 키우는 사람은 없었어도, 단지 주민 다수가 피코를 자기 개처럼 보살피고 있었다. 피코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 많은 사람들을 보우했노라고 믿었을 수도 있겠다. 특히 정 많은 푼다 아주머니는 웬만한 성인보다도 많이 먹어 치우는 피코를 아침저녁으로 먹이고, 고기 뼈를 모아 던져주고, 가끔은 영양가 높은 특식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 은혜를 알듯 피코는 아주머니를 열성적으로 따랐다. 피코가 마트 안까지 따라 들어가려는 통에 아주머니가 내게 달걀 한 판을 사다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닭 다리 사건 이후로는 판도가 달라졌다. 내게서 무슨 가능성을 보았는지 우리 테라스에서 아주 보초를 서기 시작한 것이다. 동물에 무정한 할머니는 기함하셨다. 울타리 건을 놓고 벌어진 조부모님의 격투는 내 관측보다도 더 격렬했다. 두 분은 얼마간 탐탁지 않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며 이 상황을 이른 시일 내로 수습할 것을 내게 촉구하셨다. 그러나 피코는 당해낼 수 없는 마력을 지닌 개였다. 몇 시간이고 방충망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며 끙끙대고, 할머니가 개껌을 던지시며 회유해 봐도 꼼짝하지 않고, 내가 나가면 어깨에 양발을 올리고 맘보를 추는 그 애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두 분은 서서히 피코에게 마음을 여셨다. 할아버지는, "너무 친절하게 대하지는 말거라. 먹을 걸 자꾸 주다 보면 집 안으로도 들어오려고 할 거야." 하고 충고하시면서도, 피코가 좋아하는 우유를 따라주려고 일 킬로짜리 요구르트 용기를 부셔 벽난로 안에 쌓아두셨다.

동쪽 밤하늘에 페가수스가 선명히 떠오를 무렵, 아빠가 왔다. 이스탄불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려면 열 시간, 아무리 쉼 없이 달려도 여덟 시간은 걸렸을 텐데 아빠는 아침 식사 때에 딱 맞추어 도착했다. 할머니는 테라스 테이블에 쟁반을 탁 내려놓으시며 마치 내가 거기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애가 외로운 게야. 엄마는 이역만리로 떠났지, 아빠도 가까이에 없지. 너도 알다시피 이 바다 마을은 은퇴한 노인네들뿐이라 얘 또래 애들은 찾기 어려워. 마음 둘 곳이 없으니까 떠돌이 개랑만 어울리고, 딱한 것. 우리랑 잠깐 이렇게 지내는 건 괜찮다만, 개학하고는 이제 어쩔 셈이니? 슬기는? 여태 감감무소식이니?"
아빠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차가운 요구르트 수프만 묵묵히 떠먹었다. 한참이나 굶은 것인지, 발효된 소젖이 위에서 소장으로 내려가며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먼 하늘에 우레라도 친 양 할아버지는 비파나무 너머 허공을 응시하셨다. 아빠는 덥수룩한 수염에 묻은 수프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냈다. 족히 한 달은 면도를 안 한 것 같았다. 짧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아빠 턱 절반은 이제 흰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건 손등이 아니라 물비누로 꼼꼼히 문질러도 닦이지 않을 터였다. 아빠는 표류선에 오래 갇힌 어부처럼 균형 감각을 잃은 듯 보였다. 안 그래도 보기 흉하던 거북목은 더 가파르게 굽었고 방학 전에 봤을 때보다 뱃살도 늘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뾰루지도 더덕더덕 나 있었다. 고추 피클 하나 건져 먹지 않고 그릇을 싹싹 비우더니, 아빠는 바지춤에서 만화 월간지 「불면」 이달 호를 꺼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커버를 장식한 네 컷 만화에서 스물이는 자연재해 성금을 빼돌린 어느 복지 기관을 비꼬고 있었다. 아빠의 단골 주인공 스물이는 사람들 입속을 옮겨 다니는 사랑니로, 거짓을 말하는 자들에게 극심한 치통을 내려 진실을 토해내게 했다. 아빠의 그림은 늘 설득력 있었고 스물이는 내가 가장 애착 갖는 캐릭터였지만, 이번 만화에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스물이는 인질로 잡혀 억지로 무대에 오른 코미디언처럼 정곡을 찌르지도 웃기지도 못하고 프레임을 겉돌았다.
아빠는 내가 비평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조리대 근처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엄마, 완자 안 만드셨어?"
수프와 오트밀. 아빠와 나에게 아침 식사란 한평생 그뿐이었다. 우리 부녀는 세상 모든 대소사에 이견을 내도, 아침 식사에 한해서만은 한결같이 일치된 취향을 보여 엄마의 빈축을 샀다. 얇게 썬 대추야자에, 양귀비씨 페이스트를 곁들여 먹으면 얼마나 고소한지 당신은 모르지? 거기에 로즈힙 잼까지 올리면, 얼마나 달콤한지 엄마는 모르지? 우리가 불려둔 오트밀에 토핑을 얹으며 능청을 떨면 엄마는 도끼눈을 하고 냉동실을 열었다. 난 아침에 꼴랑 그거 먹고는 못 살아. 실로 엄마는 해가 뜨기도 전에 고기나 생선을 잘도 구워 먹었다. 김치찌개나 오징어볶음처럼 칼칼하고 냄새나는 음식도 망설임 없이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매운 걸 먹는 시간대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다. 아니, 김치 같은 건 매운 종목으로 쳐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엄마가 환풍기를 돌리면 아빠는 엄마를 골리느라 콜록거리는 시늉을 하며 손부채질했다. 그랬던 아빠가 이 이른 아침에 제물처럼 쌓인 쇠고기 완자 접시를 들고 나왔다.
"데우지도 않고 그렇게 먹을 거야?" 내가 물었다.
아빠는 보란 듯이 차가운 완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갈대 해수욕장에 갈 거니까 준비하도록."
갈대가 집중적으로 자라 그리 이름 붙은 그 바닷가에서, 아빠는 어릴 때 갈대를 베어다 이글루를 지으며 놀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했고, 거기서 모은 돈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팁을 후하게 주던 영국인 손님이 아빠 경비를 대준 거나 다름없었어. 수상할 정도로 날 예뻐해서 날이면 날마다 가게에 왔거든. 그 아줌마, 심한 리버풀 사투리를 썼었는데 말이야······“ 아빠는 재작년 그 바다에 가는 차 안에서도 같은 얘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해주었었다. 심지어 그 대목에서 영국인 아줌마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낸 것마저 똑같았는데, 요즘 들어 위스키를 너무 많이 마시는 걸까? 이후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될 터였다. 처음 파리에 도착한 아빠는 마레 지구를 헤매다 어느 간판에 이끌려 지하로 내려갔고, 야트막한 그곳은 누리끼리한 인물화들로 도배된 갤러리였고, 사위가 누런 가운데 검은 웅덩이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구석에 웅크린 채 메모를 끄적이던 엄마였다. 두 사람은 이우는 해가 금빛을 내는 강변을 걸으며 서로의 그림을 교환했고, 명화가들이 들락거렸다는 술집에 동행했고, 희뿌연 파스티스를 서둘러 마신 아빠는 엄마가 평생의 운명이라고 확신했고, 그 술이 뭔지 몰라서 막걸리처럼 들이켠 엄마는 그런 아빠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부터 아빠는 남은 일정을 없던 일로 하고 엄마를 쫓아다녔고, 두 사람은 팔천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사랑을 이어가다가, 헤어졌다가, 각자의 궤도를 돌다가, 갈대 해수욕장에서 재회했다. 아빠의 민트색 아이팟 나노에서 안나 카리나의 '태양 바로 아래'가 흘러나왔을 때 유선 이어폰을 한쪽씩 귀에 꽂은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파리 외곽에 살림을 차리고 내가 생긴 건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빠는 얘기가 내 탄생 비화 쪽으로 흐를 때면 꼭 이 말을 덧붙였다. 지한이 너는 우리 계획에 없던 거였지만, 계획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얼마나 되겠어? 셀 라 비C'est la vie. 인생이라는 단어가 불어에만 존재하듯 약간의 불어도 꼭 섞었다. 그러나 엄마가 한국으로 떠난 지금, 아빠는 더 진전하는 일 없이 말을 멈추었다. 그때 피코가 두툼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나타났다.
"네가 바로 우리 딸의 새 친구인 모양이구나. 이름이 뭐니?" 아빠가 피코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마구 비비며 물었다.
"아빠랑 이름이 똑같아. 단지 사람들은 줄여서 피코라고 불러."
"역시 우리 피크렛들은 한 인물 한다니까. 피코, 수영할 줄 아니? 너도 해수욕장에 따라갈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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