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송 (3)

2026.10.14 | 조회 73 |
0
|
from.
신재
첨부 이미지

 

꩜

 

리조트에서부터는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직진만 하면 됐다. 회색 자갈과 그보다 약간 푸를 뿐인 은녹색 들풀이 들쑥날쑥 밟혀 걸음마다 경사도가 달라졌다. 우리는 벌떼가 내려앉은 타임 덤불을 비켜 가고, 누군가 사랑하던 동물을 파묻고 꽃잎을 흩뿌려둔 무덤을 에돌아 갔다.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암반에는 흰 두건을 두른 할머니가 낚싯줄을 던지고 계셨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동 걸음을 멈추었다. 절벽에 부서지는 바다를 굽어보니 푸르르고 맑은 가운데, 드문드문 돌이끼 낀 데만 색이 짙었다. 그 부위가 물속에 잠긴 제도 같기도, 피코의 몸통 같기도 했다. 완만한 내리막을 내려가니 왼쪽으로는 이제 널따란 평원이 펼쳐졌다. 황갈색 얼룩이 진 하얀 소 두 마리가 따분한 듯 유향나무 밑에서 귀를 팔랑거렸다. 개들이 행여 심기를 거스를까 봐, 엘리프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얼룩소들을 지나쳤다. 재스민 나무에서 산뜻한 꿀 향이 풍겨 우리의 코와 폐를 스쳤다.

장엄한 산맥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을 때 첫 번째 돌륨이 나타났다. 엘리프는 보물섬에 닿은 해적처럼 돌륨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고대부터 집적되었을 토양으로 꾹꾹 메워진 돌륨 안에 엘리프가 들어가 발을 구르는 사이, 나는 버려진 그물 옆에 비치타월을 깔았다. 거미가 빽빽하게 줄을 쳐서 언뜻 거대한 누에고치로 보이는 그물은, 도무지 촉감을 예측할 수 없었다. 바스락거릴 것 같기도 보송보송할 것 같기도 했다. 다만 한입 베어 문다면 그 맛만은 알 듯했다. 피시마니예[1]​처럼 단내를 풍기며 혀뿌리에 끈끈한 갈증을 남기리라. 문득 한국 길거리에서도 피시마니예 비슷한 디저트를 팔던 게 떠올랐다.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인사동에 갔을 때, 목관악기를 부는 페루인 악단 옆에서 꿀타래를 만드는 장사꾼들을 엄마가 보여줬었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아빠와는 이대로 영영 헤어질 작정일까? 내가 하나도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손발이 퉁퉁 부르틀 때까지 바닷속을 뒤졌지만, 줄자처럼 뻣뻣한 해초만 우리의 네 다리에 잔뜩 들러붙었을 뿐이었다. 풀 죽은 엘리프는 기껏 건진 테라코타 조각으로 판석에 우리 넷의 이니셜을 새기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암포라[2]​ 조각일지도 몰라. 스스로를 위안하는 엘리프에게 그건 아닐 거라고, 동시대적 벽돌 잔해일 공산이 크다고 말하려던 차, 날치가 수면 위로 폴짝 튀어 올랐다. 순간 그 가슴지느러미에 햇볕이 반사되어 눈앞이 완전히 하얘졌다가 컴컴해졌다. 사진관에서 터지는 조명처럼 강렬한 섬광 탓에, 나는 이곳이 어디며 왜 왔는지를 순간적으로 잊었다.

해가 산맥 쪽으로 기울 무렵, 우리는 빈손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투나네 빵집 앞에 섰다.

"수색대원들, 소득은 좀 있었니?"

엘리프네 엄마가 차창을 내렸을 때, 우리는 배고파서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하루 더 남았으니 내일 또 가보면 되지, 안 그래? 너희들 나가 있는 동안 아줌마가 솜씨 좀 발휘했는데. 지한이도 우리 숙소로 가서 같이 먹으면 어떠니? 오늘 가이드 노릇 하느라 수고했잖아. 아줌마가 다 먹고 할머니 댁으로 데려다줄게."

첨부 이미지

엘리프네 가족은 제법 중세 분위기가 나서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구도심에 머물고 있었다. 낮은 아치형 나무 대문을 통과하니 운치 있는 돌집 한 채가 나왔다. 비밀스러운 정원 한가운데에는 레몬 나무가 심겨 있고 기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거기 둘러앉은 엘리프 아빠와 동생이 손을 흔들었다. 식탁에 깔린 하얀 천도 우리를 반기듯 살랑거렸는데, 우리 할머니가 쓰시는 방수 비닐 식탁보가 아니라 질 좋은 리넨으로 된 거였다. 식탁 위에는 올리브 가지와 과일이 조화로이 배치되어 있어 식사가 아니라 인테리어 잡지 촬영을 해도 될 듯싶었다. 값비싸 보이는 포크와 나이프는 청초한 들꽃과 나란히 놓였다. 둥글게 말린 연두색 냅킨은 풀줄기로 정성스레 묶여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유기적이고 생명력 넘쳤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아저씨가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둔 채 들여다보고 있는 드론 카메라였다. 노트 앱인지를 개발해서 어느 기업에 팔았고 지금은 사업 때문에 두바이를 오간다는 엘리프의 아빠는, 엘리프 말에 따르면 늘 새로운 기계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했다. 개들이 식탁으로 뛰어오는 걸 보고 아저씨는 만세 하듯 카메라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케말! 얼른 조로에게 저녁을 대령하도록. 아빠에게 달려들기 전에, 어서!"

벌에게 물린 것인지 콧등이 시뻘겋게 부은 엘리프 동생이 느릿느릿 무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로가 그 뒤를 따랐다. 피코는 소침한 표정으로 내 곁에 다가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돌집이 자신에게는 불허된 공간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투였다. 무쇠 문이 닫히기 직전, 푸른 원피스로 갈아입은 아줌마의 다리 한쪽이 튀어나왔다. 아줌마는 와인병이 든 스테인리스 통을 한 손에, 건사료가 든 둥근 그릇을 다른 한 손에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자, 이건 우리 친구 거. 착하지, 피코. 이리 온. 조로는 심장 질환에 유의해야 해서 타우린이 많이 함유된 특수 사료를 먹어야 하거든. 이 비상용 사료는 피치 못할 때 먹이려고 사놓은 건데, 피코에게는 아무 지장 없을 거란다."

피코가 사료를 단 몇 입에 해치우는 동안, 아줌마는 포도 모양 놋쇠 장식이 붙은 와인잔에 술을 따르며 메뉴를 읊어주었다. 고기를 안 먹는 아줌마의 식성에 따라 렌틸콩 패티를 넣은 버거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엄마 특선 메뉴거든. 솔직히 밖에서 파는 웬만한 고기 버거보다도 더 맛있어." 엘리프가 테라코타 조각을 한 손으로 조몰락대며 말했다. 렌틸콩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면 배가 복어처럼 부푸는 나는 염려가 되었지만, 의기양양한 엘리프와 아줌마의 얼굴을 보니 못 먹겠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이라니까. 케말, 너 정말 네 못생긴 옛날 배꼽이 기억 안 나는 거야?" 엘리프가 테이블에 남은 마지막 호두 케이크 조각을 자기 접시로 가져가며 말했다.

"내 참외 배꼽을 누나가 눌러서 집어넣었다는 게 말이 돼? 그게 무슨 로봇에 달린 버튼도 아니고. 아빠, 웃지만 말고 뭐라고 얘기 좀 해 줘요. 생물학적으로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케말이 빈 접시 위에 널브러져 있던 냅킨을 구겨 엘리프 쪽으로 던졌다.

"자자, 조용. 이번에는 지한 차례야." 자지러질 듯 폭소를 터뜨리던 아줌마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냅킨을 땅에서 주웠다. "지한이 살면서 겪은 가장 이상한 일은 뭐였니?"

"···양옆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요."

"파충류처럼? 양옆이 어떻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케말이 사팔눈을 했다가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말했다.

"우리 눈이 정면을 응시할 때도 주변부가 대충 보이잖아. 근데 세 살 때까지는 안 그랬어. 앞만 보였어. 물론, 그때까지 옆이 안 보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지. 뭐가 더 보일 수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그네를 타는데, 고개를 안 돌렸는데도 양옆에 있는 미끄럼틀이랑 시소가 보이는 거야. 렌즈를 갈아 끼운 것처럼. 난 너무 놀라서 그네에서 떨어졌어."

케말이 손가락에 샤프심이 박혔을 때 입에서 흑연 맛이 돌았다는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배가 사르르 아파 왔다. 집에 갈 때까지만이라도 잠잠하길 바라던 렌틸콩들이 장에서 봉기를 일으킬 조짐이 보였다. 두 주먹에 힘을 불끈 주니 통증이 잠시 가셨지만, 임시방편으로 무마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신호를 외면당한 콩들이 노했는지, 이번에는 더 무자비한 해일이 내 복부 전체를 덮쳤다. 진정으로 놓아줄 때가 된 것이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무쇠 문을 지나서는 껑충껑충 뛰었다. 부엌 옆에 아코디언 문으로 된 곳이 화장실이랬지, 아코디언 문으로 된 곳, 아코디언···. 여닫이문을 젖히는데 내 몸에서 이상한 덩어리가 쑥 빠져나갔다.

순면으로 덧대진 속옷 위에는 팔레트에 짜서 반나절쯤 굳힌 물감이 묻어 있었다. 인디언 레드와 카풋 모트룸 사이 그 어딘가. 내 콧김이 닿는 그곳에는 허물어진 점막 조직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콧구멍이나 무릎에서 쏟아지던 피와 달리, 심해 생물을 연상케 하는 이 기이한 핏덩어리는 긴 경주를 마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보였다. 월경이 시작되었을 때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배운 적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해 온 위급 상황의 현장은 우리 집이나 학교였지, 이제 막 만난 앙카라 핵가족이 임시로 머무는 고급 에어비앤비가 아니었다. 더욱이 문제는, 바지에까지 얼룩이 흥건히 묻어났다는 거였다. 이 정도로 새어났다면 야외 의자에 깔린 방석에도 칠갑을 하고 왔을 터였다. 방석도 식탁보처럼 새하얬나? 잘 빨리는 소재였던가? 꼬리를 문 걱정에 눈앞이 아득해지는데, 누군가 아코디언 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자석으로 고정된 얇은 슬라이딩 도어가 포닥거리며 내 정신마저 두드렸다.

"지한, 아줌마야. 문 잠깐 열어볼래?"

나는 급한 대로 휴지를 겹쳐서 속옷 위에 깔고 엉거주춤 바지를 끌어올렸다. 문밖에는 아줌마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아줌마는 내 쪽을 최대한 안 보면서 깨끗한 속옷과 치마를 내밀었다. 얼마간 밖에서 기다리던 아줌마는 내가 다시 문을 열자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거울 찬장을 열었다. 그 안에 기지개를 켜는 여자가 그려진 하늘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일반 마트에서는 본 적이 없고 약국에서만 가끔 파는 걸 보았던 생리대였다.

"어떻게 쓰는지는 알고 있니?"

"네."

"아줌마가 안 도와줘도 되겠어?"

"괜찮을 것 같아요."

"아줌마가 문 앞에 서 있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똑똑똑, 문을 세 번 두드려. 그리고 이건 아주 아주 축하받을 일이니까, 오늘 집에 가서 엄마께 꼭 전화 드리렴."

나는 배운 대로 패드가 오염되지 않도록 포장지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열었다. 인공적으로 주입된 포근한 향이 허벅지 사이로 퍼져 올랐다. 접착 면을 속옷에 부착하는 건 스티커를 붙이듯 쉬웠다. 대충 했는데도 정중앙에 잘 들러붙었고 앞뒤 면적도 더할 나위 없이 균일했다. 만족스러운 첫 시도였지만, 이 흠결 없는 유기농 흡수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패드를 처음 건네준 사람이 낯선 아줌마라는 사실에 울분이 치민 것이다. 나는 이제 여자가 되어 엄마 팀에 합류했건만, 엄마는 배웅조차 없이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포장지를 돌돌 말아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알았다.

꩜

 

 

 

각주

  1. [1] 실처럼 가는 밀가루 반죽에 설탕을 섞어 솜사탕처럼 부풀린 간식으로, 머리카락 디저트라는 별칭이 있다.
  2. [2] 고대 그리스와 로마, 지중해 지역에서 사용된 항아리형 토기. 손잡이가 두 개 달린 길쭉한 형태로, 포도주, 올리브유, 곡물 등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데 쓰였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나톨리아 편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아나톨리아 편지

유럽이며 아시아고 지중해권인 이상한 땅에서

뉴스레터 문의minor.historia@proton.me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대표번호: 070-8027-1409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