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송 (5)

2026.10.27 | 조회 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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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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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안동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다음 차는 두 시간 뒤에나 지나갈 예정이었다. 뻥 뚫린 2차선 도로를 따라 가구 할인점과 골동품 가게, 석회암을 절단해 널어놓은 석재상, 여러 품종의 선인장을 파는 비닐하우스가 늘어서 있었다. 산 중턱에는 풍력발전기 몇 대가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섭씨 사십 도를 웃도는 날이었다. 오늘따라 바람 한 자락 없이 뙤약볕만 가혹하게 쏟아졌다. 그늘이 전혀 없는 도로는 생지옥처럼 무더웠고 안동네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사거리에 이르자 작은 슈퍼마켓과 토스트 가게가 나란히 보였다. 토스트집 창문에 걸린 아타튀르크[1]​ 현수막이 '토스트 세상'이라는 가게 이름을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엘리프가 그쪽을 가리키며 시위하듯이 말했다. "여길 지나면 더 이상 아무 식당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난 너무 배고파. 헤이즐넛 가지고는 더 못 버티겠어. 개들도 무지하게 배고플 거야."

우리는 고양이용 닭고기 통조림을 사서 토스트 세상 테라스에 앉았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데도 주위에 경쟁 식당이 없어서인지 가게는 거의 만석이었다. 담배를 피우며 천장 귀퉁이에 켜진 축구 중계를 보시던 주인 할아버지가 테이블에 메뉴판을 놓고 가셨다. "산 채로 타버릴 것 같은 날이로구나." 할아버지의 아랫니는 전부 까맣게 변색했고 가슴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는 긴 머리는 완전히 하얗게 세서, 치아와 머리카락이 운명을 맞바꾸기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가게는 손때 묻은 소품과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양한 판형으로 인쇄된 아타튀르크 초상화 옆에는 여기서 찍은 단체 사진이 여럿 붙어 있었다. 머리 모양새와 옷차림으로 가늠하건대 90년대 이전에 찍힌 것들 같았다. 코팅된 표면에는 기름때가 거뭇하게 껴서 얼굴 몇몇은 절반만 보이거나 아예 가려졌다. 그 옆에는 원색 띠에 매달린 훈장 여러 개가 걸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위에 걸린 사진 속 남자의 공적인 듯했다. 카키색 군복을 입고 완장을 찬 남자는 매우 엄격한 인상이어서, 오늘날 주인 할아버지의 자유분방한 용모를 목도했다면 크게 노해 혼꾸멍을 내셨을 것 같았다. 저분도 혹시 한국에 다녀오셨을까? 가셨다가 돌아오시지 못한 건 아닐까?

주인 할아버지가 그러모으셨을 고철이 무더기로 쌓인 뒷마당은 언뜻 혼돈스러워 보였지만, 할아버지가 나름의 애정을 쏟고 계심이 분명히 느껴졌다. 폐타이어 밖으로 자란 꽃기린은 가지를 사방으로 뻗친 채 루비처럼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고, 싱싱한 채운각은 그걸 타면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이 자랐다. 목재 팔레트가 기대어 세워진 벽에는 에게해에 서식하는 어종이 삐뚤빼뚤 그려져 있었다. 지푸라기 덮인 우리도 하나 보였다. 거기에 토끼나 닭을 키우는 모양이었다. 그 왼쪽으로는 물범 조각상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못 쓰는 선풍기 날개로 만든 바람개비가 슬금슬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앉은 후부터 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햇볕에 바래 흔적만 남은 글씨를 어렵사리 읽어 내려갔다. 메뉴에는 여섯 가지 토스트와 네 가지 수프, 세 가지 샐러드, 다섯 종류의 음료가 있었다.

"할아버지, 저희 주문할게요." 엘리프가 곧게 편 오른손을 치켜올리고 씩씩하게 말했다.

"소시지 토스트들 먹거라. 지금 그거 말고 딴 건 안 되니까. 렌틸 수프가 남아 있긴 하다만 이 불볕더위에 국물 생각이 나는 별종은 없겠지."

우리는 지시에 가까운 제안에 따라 똑같은 토스트를 세 개, 콜라도 세 병 시켰다. 개들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통조림을 싹 비우고 뒷마당으로 사라졌다. 할아버지가 콜라를 가져다주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어가 쓰인 박스티에 통 넓은 인도풍 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가 주방에서 나왔다. 콧수염을 매끈하게 다듬은 남자는 요령을 부려 쟁반 세 개를 한 번에 날랐다.

"여름이 끝나면 너희는 어디로 돌아가?" 한 입 먼저 베어 문 엘리프가 물었다. 너희라고 묻긴 했지만 실은 토프락의 진짜 거처가 궁금한 눈치였다.

"이스탄불." 토프락이 말했다. "엄마가 거기 살아서."

"오, 엄마가 계시구나?" 엘리프가 자기 말에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엄마야 당연히 계시겠지만, 죽은 손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난 또···. 엄마가 이스탄불 어느 동네에 사셔? 사촌을 만나러 나도 종종 가거든. 걔는 아시아 지구에 사는데, 나는 유럽 지구가 훨씬 마음에 들어. 뭐니 뭐니 해도 유럽 지구가 진짜 이스탄불이지. 안 그래?"

토프락은 자책골이 들어가 소란스러워진 텔레비전 쪽을 흘깃 돌아보더니 내게 물었다.

"넌? 넌 어디로 가는데."

"난 한국에 갈 거야." 계획에도 없던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엄마가 거기에 있거든."

언제 슬그머니 돌아왔는지 피코가 내 발치에서 몸을 뒤집은 채 턱을 치들고 있었다. 손목을 직각으로 꺾고 몸통을 좌우로 기울이는 걸 보니 애정을 충전할 시간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평상시에도 피코가 즐겨 취하는 포즈였지만, 피코의 눈이 유독 애달파 보인 건 왜였을까? 피코는 눈치챈 걸까? 무더운 이 계절도 차차 이울고 있음을. 여름이 지나면, 우리 모두 멀리멀리 떠나리란 걸. 토프락은 콩알만 한 점이 난 피코의 턱을 간지럽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 보러 갈 시간이다. 들판이며 해변이 화장실인 너는 이 삼촌 심정을 이해 못 하겠지만."

토프락이 뒷마당으로 사라지자 콜라병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엘리프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너희 엄마들은 시즌제로 활동하시나 봐. 우리 엄마는 반나절만 떨어져 있어도 이 난리인데."

재료가 두둑하게 들어간 토스트를 해치우려면 말없이 씹기만 해도 삼십 분은 족히 걸릴 터였다. 그러나 엘리프는 극구 교회로 데리러 오겠다는 아줌마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콜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있었다. "숙소 근처까지 가는 버스도 있다니까? 여기 토프락이라는 애가 시간표도 다 알아."

토프락은 금방 자리로 돌아왔다. 쓸어 넘긴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끼얹은 물이 너무 차가웠는지, 그 애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토프락은 다소 냉담한 표정으로 엘리프의 오른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여태 하나도 안 먹고 뭘 한 거야?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

엘리프는 의자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더니 통화를 끊어버렸다. 어이없다는 듯 토프락을 가만히 째려보던 엘리프는 백팩을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계산도 하지 않은 채였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두 사람 몫을 지불하고 엘리프를 찾아 나섰다. 길을 알 리 없는 엘리프는 발이 닿는 대로 걷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른 쪽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보폭이 훨씬 넓은 토프락은 나와 엘리프를 금방 앞질러 갔다. 피코와 나는 묵묵히 애들 뒤를 따랐다. 모두가 떠난 것을 뒤늦게 깨달은 조로는 급히 뛰쳐나와 우리 일행을 따라잡았다. 싸구려 고양이 사료가 어떤 신경을 자극한 것인지, 조로는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듯 혈기 왕성했다. 무언가를 이제 막 알아버린 두 눈. 껍질을 깨부수고 그 안에 든 쾌락의 열매를 맛본 표정이었다.

버려진 생수병으로 뒤덮인 개천 위를 지날 때였다. 구급차 한 대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낮아진 사이렌 음을 향해 조로가 하울링을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피코도 하울링에 동참했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엘리프가 억눌린 분노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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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집에서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안 가르치나 본데, 문명사회에는 예의라는 게 있거든. 네가 날 얼마나 안다고 공공장소에서 면박이야?"

"내가 널 알 필요는 없지. 그런데 넌 네 개를 좀 알아야 하겠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 개가 토끼들을 죽였어."

엘리프는 토프락의 뒤통수가 깨지도록 노려보았다. 사이렌 소리가 잦아들고 개들도 조용해졌다. 토프락은 휙 돌아서더니 엘리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시 한번 말해줘? 조로가, 토스트 세상 뒷마당에 있던 흰토끼 두 마리를 죽였다고. 화장실에 가다가 봤어. 우리 안에 조로가 들어가 있는 걸."

샹들리에가 매달린 교회 천장 아래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고루 퍼져 있었다. 우리는 고고학자의 음성이 쩌렁쩌렁 송출되는 스피커 바로 앞에 앉았다. 그러나 내 귀에는 엘리프의 것인지, 토프락의 것인지, 나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박동 소리만 세차게 울려 퍼졌다. 금방이라도 토스트 세상 할아버지가 백발을 휘날리며 교회 뒷문으로 뛰어 들어올 것만 같았다. 개들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었다. 관객들은 피코와 조로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걸로 모자라, 실내에 입장해 우리 옆에 앉을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주었다. 쏟아지는 애정에 어깨가 무거워졌던지, 개들은 북토크가 시작되자마자 곤히 곯아떨어졌다.

고고학자는 고대 소외 계층의 노동을 면밀히 연구해 신간에 담았다고 했다. 책에서도, 박물관에서도, 다큐멘터리에서도 보거나 들은 적 없는 얘기가 주를 이뤘다. 고대 그리스 여성과 노예, 동성애자, 내시, 모자이크 수공업자, 이발사, 점성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했으며 경제에 이바지했다는지 말이다. 책의 맨 마지막 장은 동물들이 어떻게 착취되었는가를 다루는 모양이었다. "수멜라 수도원[2]​의 프레스코화에는 아담과 하와가 쟁기질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쟁기를 끌고 있는 것은 소이지요. 에덴에서 추방된 후, 인간은 곧바로 동물을 이용하기 시작했어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들은 전쟁에 동원되고, 포로로 잡히고, 구경거리로 전락해 서로 싸우고, 훈련되고, 전시되고, 살육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류는 동물에게 가장 큰 빚을 진 셈이지요." 고고학자가 말을 끝내자마자, 앞머리만 하늘색으로 염색한 옆자리 할머니께서 외치셨다. "여기 누운 특별 게스트들 좀 보세요! 희생된 자기네 조상 얘기를 듣겠다고 예까지 왔습디다. 이 대견한 지성견들에게 다 같이 박수 한번 쳐 줍시다!" 좌중은 손뼉을 치며 호응했고 사회자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까지 불었다. 나는 관객들이 부디 조로의 얼굴을 금방 잊어버리기를, 검디검은 눈자위와 빨간 목걸이가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엘리프의 만류에도 아줌마는 교회 맞은편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딸, 마지막 날에 영양가 있는 경험을 했네. 이 이스마일 교수님, 네가 밤마다 유튜브로 찾아보던 분이잖아." 아줌마가 백미러를 보고 후진하며 말했다. 엘리프는 자신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조수석 창밖으로 머리를 내민 조로의 척추뼈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토프락과 내 사이에 비집고 앉아 있던 피코는 잠이 덜 깼는지 우리를 야전 침대 삼아 드러누웠다.

"토스트는 어땠니? 그 집, 너무 기름진 소시지를 쓰진 않던?"

"···"

"너희들 적잖이 서운한 모양이로구나. 서로 연락처들은 교환했겠지? 뒤에 잘생긴 신사는 이름이 타일란이라고 했니? 아줌마가 오늘은 팔라펠[3]​을 튀겨 놨는데···"

"엄마! 제발! 그냥 좀 가!"

안 그래도 에어컨 탓에 낮기 그지없던 차내 기온은 점점 하강해, 우리 동네에 진입했을 때쯤에는 빙점에 다다랐다. 토프락과 나는 피코를 데리고 투나네 빵집 앞에서 내렸다. 불 꺼진 쇼윈도에는 오늘 팔리지 못한 참깨 빵 서너 개가 침울하게 누워 있었다. 아줌마와 몇 마디 주고받는 것 같던 엘리프는 시동이 꺼진 후 조로와 차에서 내렸다. 엘리프는 조로 엉덩이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는 문을 쾅 닫았다. 그러고는 우리를 돌아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안녕." 악수도 포옹도 없이 그 말만 던지고 엘리프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 애가 하지 않은 행동과 말들이, 얇지만 날카로운 종이 모서리가 되어 내 마음을 베고 지나갔다. 토프락의 무릎에 난 생채기를 닮은 빗금 모양으로.

 

꩜

 

「이송」은 예정보다 한 회 연장되어, 다음 주에 연재를 마칩니다.

 

각주

  1. [1]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로, 192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 뒤 세속주의와 근대화를 기반으로 한 개혁을 이끌었다.
  2. [2] 튀르키예 북동부 흑해 연안 트라브존 인근, 해발 1,200미터가량의 절벽에 매달리듯 지어진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 전승에 따르면 4세기 말 아테네 출신 수도사 두 명이 세웠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3. [3] 병아리콩이나 잠두콩을 갈아 향신료와 허브를 섞은 뒤 작고 둥글게 빚어 튀긴 중동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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