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송 (2)

2026.10.06 | 조회 95 |
0
|
from.
신재
첨부 이미지

 

꩜

 

아빠가 투명한 바다로 나뭇가지를 던지자 피코는 민첩하게 뛰어갔다. 너무 한낮이라 그런지 해수욕장은 한산했다. 우리 가족이 즐겨 앉던 아름드리 유칼립투스 아래에는 젊은 근육질 부부가 누워 있었다. 빨간 나일론 목걸이를 한 누렁이도 함께였다. 몸집이 피코보다도 더 비대한 그 개는 마스카라가 주르륵 번진 것처럼 눈가만 시커맸다. 우리의 존재를 먼저 알아챈 누렁이가 다가와 피코의 엉덩이를 쫓으며 적극적으로 킁킁거렸다. 상호 검열에 열중하던 두 개는 피차 결격 사항이 없는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얼굴에 책을 덮고 누워 있던 아줌마가 일어나, 모서리가 바짝 올라간 선글라스를 끼고 바다로 뛰어드는 개들을 바라보았다.

"개가 무척 늠름하네요. 몇 살이에요?"

아빠는 부부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간이의자를 펴며 대답했다. "저희도 잘 몰라요. 단지에 출입하는 들개거든요."

"그렇군요. 슬픈 일이에요. 문제 있는 들개들을 잡아다가 안락사시킬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된 거 말이에요."

엎어져 있던 아줌마 남편이 몸을 일으키며 머리칼을 뒤로 넘기더니 야구 모자를 덮어썼다. 모자 앞판에는 어느 빅테크의 슬로건을 패러디한 유머 한 줄이 자수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위험하게 구는 들개들이 있는 건 사실이야. 우리 조로도 길에서 몇 번이나 공격당할 뻔했잖아."

개들은 어느덧 부부의 자녀로 보이는 남매와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남매는 조로에게 계속 공을 물어올 것을 유도했지만, 번번이 피코가 명포수의 영예를 안았다. 피코는 그런 면에서 눈치가 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시기를 사기에는 의도가 선량하고 답답할 만큼 순수한 개였다.

첨부 이미지

넷이서 치열하게 펼치던 게임은 여자애가 물에서 나오며 중단되었다. 아줌마가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엘리프, 무슨 일이니?" 그 애가 손을 휘저으며 걸어와 아줌마 무릎에 철퍼덕 누웠다. "나 종아리에 쥐 났어."

엘리프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다리가 나보다 한 뼘은 더 길고 가슴도 제법 나와 있었다. 치렁치렁한 곱슬머리는 끝으로 갈수록 금발이었다. 에게해 지역은 처음이라는 엘리프는 심원한 인류사가 켜켜이 쌓인 이 천혜의 자연을 여태 모르고 산 십수 년의 세월이 야속하다고 했다. 넉살 좋은 그 애는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얘기도 잘하고 우리 나이대 애들은 좀처럼 안 쓰는 조숙한 어휘를 즐겨 활용했다.

"지한이는 꼬꼬마 때부터 여름이면 이 마을에 놀러 와서, 에게 바다가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지 모를 거예요. 하기야 그래요. 뭐든 손아귀 밖에 나야 진가가 보이는 법이잖아요." 아빠가 티셔츠를 벗어 감자칩이 든 편의점 비닐봉지에 구겨 넣었다.

"어머나, 운 좋은 아가씨로구나. 우리는 여기 전부 앙카라 촌사람들인데 말이야." 아줌마가 엘리프의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줌마는 중안부가 길쭉하고 드넓은 이마가 톡 튀어나와서 보티첼리 그림에 나오는 르네상스 여자들 같았다. 엄마가 여기 있었으면 속삭였겠지. 저 여자는 후리후리한 느낌이 나는 지중해풍 이름을 가졌을 거야. 시옷이랑 리을은 꼭 들어갈 테니, 셀린이나 멜리스가 어울리겠네. 엄마는 낯선 사람들 이름 맞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런 것들이 가끔 그냥 보인다고 했다. 스물이가 나오는 새 단행본 스케치를 짜던 아빠는, 어느 밤 식탁에 마주 앉은 내게 실토해 버렸다. "그래서 한국에 간 거야, 엄마. 너무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서." 위스키를 입으로 가져가던 아빠는 시선을 잔에 떨구고 혀끝으로 어금니 바깥을 훑었다. 열 개도 넘는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나는 식탁에서 그대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이 동네를 훤히 안다면 엘리프를 도와줄 수도 있겠구나.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못 찾겠다고 했거든. 어디라고 했지, 엘리프?" 아저씨가 보냉백에서 캔맥주를 꺼내며 말했다.

"고대 항구가 있던 바다요." 엘리프가 말했다. "공중목욕탕을 끼고 조금만 걸으면 그 바다가 나온댔어요. 해변에는 와인을 저장하던 돌륨[1]​이 묻혀 있다고 했고요. 어제 서점에 갔다가 어떤 노부인이 말씀하시는 걸 엿들었거든요. 거기서 잠수하면 헬레니즘 시대 유물 잔해를 발견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도저히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이 마을은 구글맵도 잘 안 되잖아요. 시내에서 데메테르 조각상을 지나 폭포가 흐르는 노천탕을 보기는 했는데, 그 주위는 카페 천지였지 돌륨 같은 건 없었어요."

"엘리프는 고고학자를 꿈꾸거든요." 아줌마가 아저씨가 딴 맥주를 자기 텀블러에 따르며 거들었다.

"아빠는 엘리프가 어딜 찾는지 알 것 같은데. 지한, 넌?"

우리 아빠와 피코는 이름만 같은 게 아니었다. 의도는 선량하고 답답할 만큼 순수하지만 눈치가 없는 점. 그 특질이 닮았으며 선량함과 답답함과 눈치 지수는 놀라우리만치 엇비슷했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을 직감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족은 내일 반도 끄트머리까지 옮겨갔다가 월요일에 이 마을로 돌아올 거예요. 다음 주에 다 같이 그 바다에 가서 유물을 찾아볼까요?" 엘리프가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좋겠다만, 이 아저씨는 일요일 저녁에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해서 말이야."

그렇게 금방 올라갈 거라고 귀띔해 준 적 없는 아빠가 미간을 치켜올렸다. 아빠는 미안할 때면 눈썹을 거대한 여덟 팔자로 만드는 습관이 있었다. 엄마는 그걸 팔자 반사라고 불렀다. 올해 들어 아빠는 벌써 연평균치 이상 그 반사를 일으켰다. 내가 만화 그리는 데 싫증이 난대도 팔자, 아빠가 해준 알리오올리오가 맛없대도 팔자, 엄마가 언제 돌아오냐고 물어도 팔자. 

 

꩜

 

열 시에 딱 맞춰 엘리프네 차가 빵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배고파질 경우를 대비해 시금치 뵈렉[2]​을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시금치 뵈렉은 그 빵집 간판 메뉴로, 건넛마을에서도 맛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올 정도였다. 올여름 들어 그 빵집에 간 것은 처음이었지만, 주인아저씨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시고 오렌지 쿠키도 덤으로 주셨다. 나랑 동갑인 아저씨 아들 투나는 카운터에 앉아 아이패드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만 슬쩍 까딱거렸다. 함께 발가벗고 잡기 놀이하던 옛날에 그 애는 툭하면 울었었는데 이제는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 문이 열리자 조로가 멀리뛰기 하듯 점프해 피코와 열정적인 상봉 세리머니를 펼쳤다. 뒤따라 내린 엘리프는 진청색 치마바지에 노란 점무늬가 새겨진 크롭톱을 입고, 네잎클로버 장식이 달린 벙거지를 눌러쓰고 있었다. 어깨까지 바짝 올려 멘 백팩은 투명한 재질이어서 안에 든 비치타월과 수영복, 아쿠아슈즈, 물안경이 훤히 보였다.

"지한 아가씨, 오늘 하루 우리 엘리프랑 조로를 잘 부탁해. 딸내미는 뵈렉 금지, 알지? 이번 여행 와서 너희들 흰 빵을 먹어도 너무 먹었어. 가공식품은 또 어떻고.“

자동차가 클랙슨을 울리며 떠나자마자, 엘리프는 내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서 긴 뵈렉을 꺼내 베어 물었다. "전형적인 건강 염려증에 요가 중독자거든, 우리 엄마. 지금 먹는 건 다 키로 가는 건데 말야. 안 그래?”

빵집에서 고대 항구에 이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개중 나는 경치가 가장 빼어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동선을 택했다. 그러려면 여름 별장들이 늘어선 언덕을 가로질러 소규모 야영지를 지나야 했다. 전면에는 투명한 에게해가, 왼쪽으로는 마르마리스의 산등성이가, 오른쪽으로는 그리스 영토인 시미섬이 내다보이는 지점이었다. 마침 양국의 전투기들이 하늘에 흰 곡선을 그리며 도그파이트를 벌이고 있었다. 타오르다 꺼진 모닥불 주변부에는 빈 와인병과 맥주병이 굴러다녔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비스듬히 자란 케럽나무 아래에는 해어진 텐트가 쳐져 있고 투박하게 생긴 오토바이도 한 대 서 있었다.

"와, 여기서 야영도 하나 봐! 너도 여기서 자 봤어?"

"그러기엔 조부모님 댁이 바로 여기 근처인걸. 야영이라면, 우리가 지금 가는 항구 쪽 캠핑촌에서 해본 적 있어. 외가 식구들이 튀르키예에 놀러 왔을 때 캠핑카를 빌렸었거든."

"우리 엄마는 너희 엄마가 타타르족이나 우즈베키스탄 사람일 거래. 그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잠깐, 말하지 마! 내가 맞혀 볼게. 타지키스탄 사람?“

내가 입을 떼려던 차, 엘리프는 다시 추측을 이어갔다.

“카자흐스탄? 그것도 아니면 설마, 위구르족?”

"엄마는 한국 사람이야."

"한국? 그러고 보니 너 로제랑 좀 닮았다. 난 제니파긴 하지만. 와, 너희 엄마 생각보다 훨씬 먼 데서 오셨구나."

엘리프는 제니 노래 후렴구를 흥얼거리면서 팻말이 박힌 쪽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나로서는 엘리프가 더 자세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게 다행스러웠다. 엄마가 멀리서 온 경위는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었지만, 다시 먼 길을 떠난 사정은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동굴처럼 생긴 건 뭐야?"

"공중목욕탕. 네가 찾던 목욕탕 있었잖아? 그게 여기일 거야."

"이 동굴이 목욕탕이라고?"

"자, 팻말을 읽어보면···, 서기 6세기, 여기 공중 목욕 종합 시설이 있었다, 하고 쓰여 있지. 뒤편에는 예배당 터도 있어. 저기 일렬로 늘어선 기둥들이 목욕물을 데우던 온돌 구조물에서 나온 거래."

"탁 트인 바다에, 뜨끈한 목욕탕에, 죄까지 씻을 수 있는 예배당에. 말 그대로 진정한 종합 시설이네. 고대 그리스인들 여기서 재미 좀 봤겠는데? 아차, 서기 6세기면 로마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첨부 이미지

야영지를 지나면 야자수 열두 그루가 일렬로 심겨 있고 이 해안의 마지막 건물이 나왔다. 한참 전에 폐업한 사 층짜리 리조트였다. 몇 년 동안 방치되었는데도 리조트는 문 닫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소련 건물처럼 생긴 거 말이냐? 그 앞으로 지나다니지 말거라. 귀신 들린 거다, 그거. 할머니는 언젠가 말씀하셨다. 귀신인지 사람인지 알 길 없지만, 누군가 몰래 이 리조트를 수호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폐가가 이토록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통유리로 된 로비에는 갖가지 물품이 수년째 같은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두 원형 기둥 사이에 놓인 프런트 데스크, 녹슨 의자와 테이블, 삽과 밀걸레, 네발자전거, 선베드, 야자수 삽화가 새겨진 킥판, 아이스크림 냉동고···. 유리에 반사되는 바다는 진짜 바다와 진배없이 에메랄드색으로 빛나서, 파사드는 레진으로 굳힌 기념품 자석처럼 보이곤 했다. 떠나버린 삶의 부산물을 떠안은 직사각형. 멈춘 바캉스 속에서 영구히 몰아치는 파도. 살아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죽었다고 치부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리조트에서 가장 기이한 건 트라버틴이 깔린 앞뜰에 줄눈을 뚫고 피어난 한 송이 연분홍 장미였다. 씨앗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장미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아래 팔각형으로 파인 수영장은 야자수 껍질로 가득 차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껍질은 반으로 툭 갈라져 양쪽으로 휜 탓에 가다랑어 꼬리처럼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면 수영장은 가다랑어들의 떼죽음 현장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개들도 눈을 가늘게 뜰 줄 아나? 아니면 언젠가 고여 있었을 물비린내를 맡았나? 피코와 조로가 경사진 바닥으로 힘차게 다이빙했다.

"잠깐, 여기 아무도 안 사는 거 맞아? 저기 꼭대기 층에 누가 속옷을 널어놨는데."

엘리프의 손가락을 따라 올려다보니 사 층 복도에 빨랫줄이 걸려 있고 정말 옷가지 몇 벌이 널려 있었다.

"그거 알아? 가끔 한밤에 사 층 오른쪽 끝 방에만 불이 켜져. 어떻게 전기가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으, 정말 으스스하다. 그래도 저기 산다고 상상해 봐. 이 엄청난 광경을 공짜로 혼자 만끽하는 거야. 천오백 년 전에 고대인들이 향유하던 풍경을 똑같이 누리는 셈이지. 이 해상에는 바뀐 게 하나도 없을 테니까."

 

꩜

 

 

 

각주

  1. [1] 고대 로마에서 와인과 올리브유, 곡물 등을 저장하던 대형 토기. 둥근 몸통에 입구가 넓으며, 땅에 반쯤 묻어서 쓰기도 했다. 용량은 수백 리터에서 천 리터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2. [2] 튀르키예의 페이스트리 요리. 얇은 반죽 사이에 치즈, 시금치, 감자, 고기 등을 넣어 굽거나 찌거나 튀긴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나톨리아 편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아나톨리아 편지

유럽이며 아시아고 지중해권인 이상한 땅에서

뉴스레터 문의minor.historia@proton.me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