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엘리프와 나는 다음 날 같은 시각에 다시 만났다. 물론 피코와 조로도 동행했다. 일상이 단조로운 이 마을에서는 사소한 모임도 중대 행사가 되고, 개들에게도 그건 매한가지로 적용되니까. 엘리프는 어제 허탕 친 것이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저녁 내내 테라코타 조각을 만지작거렸던 통에 작별 포옹을 할 때 보니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애 얼굴에 드리운 상심의 그늘이 자꾸 아른거렸던 나는, 아빠가 작년에 준 생일 선물을 들고 나갔다. 아빠가 내 나이일 때 고대 항구에서 찾았다던 암모나이트 화석이었다. 엘리프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내 볼에 거푸 입을 맞추고, 화석을 투명 백팩에 넣었다.
리조트를 지나며 꼭대기 층을 살피니 오늘은 아무 옷도 널려 있지 않았다. 정말로 누군가 있었다가 사라진 걸까? 나와 엘리프가 바라보는 지점을 의식한 개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컹컹 짖기 시작했다. 엘리프는 조로를 진정시킬 간식을 꺼내기 위해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사이 두 개는 느슨하게 쳐진 쇠사슬을 넘어 우측 계단을 껑충 올라갔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개들을 쫓았다. 겁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개들을 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 층 계단참에 다다랐을 때 위에서 떨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
"야, 이놈들아!"
개들이 단숨에 내려와 우리의 엉덩이 뒤에 숨었다. 엘리프와 나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계단을 내려오는 기척이 들리자, 엘리프는 백팩을 앞으로 돌려 메고 내가 준 화석을 꺼냈다.
"그걸로 뭘 어쩌게?" 내가 속삭였다.
발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다, 커다란 슬리퍼 한 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프는 그쪽을 향해 화석을 내던지고 로비로 뛰어 내려갔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에 놀란 개들도 엘리프를 따랐다. 자리에서 일 센티미터도 움직이지 못한 내 양발은 심장의 과격한 펌프질로 인해 덜덜거렸다. 대리석 바닥에 고정된 내 눈알은 압력으로 인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시야 안으로는 곧 시커먼 물이 흘러들어올 것이었다. 물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내 시야각은 충분히 넓어서 그게 시간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넙데데한 두 발이 내 앞에 멈추었다. 미지의 인물과 나는 마주 보고 섰다. 사위가 고요했다. 파도가 모래톱에 부서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
중생대의 기억을 간직한 돌덩이가 몸을 날려 적중시킨 것은 콜라병이었다. 신생대의 상징적 단물은 매끄러운 흰 바닥을 물뱀처럼 기었다. 고개를 들자, 유리병 주둥이만 손아귀에 남은 남자애의 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쑥 튀어나온 눈썹뼈가 응달을 드리워서 올리브색 눈은 운무에 숨은 달 같았다. 인중에는 콧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왔지만 갈라진 두 턱은 아직 보송보송했다.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진 그 애는 엉덩이까지 축 늘어진 스포츠 배낭을 메고 있었다. 트렁크인지 수영복인지만을 입은 채였다.
"개들이 내 해먹을 결딴냈어. 보시다시피 콜라는 한 입 마시기도 전에 끝났고."
이로써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님이 증명되었다. 토프락 아크만. 그 애는 야영지에 쳐진 텐트의 주인으로, 그 옆에 서 있던 오토바이는 토프락의 아빠 소유였다. 아저씨는 오늘 그걸 타고 대형 병원이 있는 옆 도시에 간 참이라고 했다. 토프락은 어디에서 왔는지, 이 마을에는 얼마나 머물렀는지, 언제 떠날 것인지, 아니, 언젠가 떠나기는 할 것인지 밝히지 않았다. 토프락 부자는 야영지가 너무 붐벼 텐트에서 잠을 청하기 어려운 밤이면 이 리조트에 들어와 잔다고 했다. "한밤에도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시끄럽게 구는 사람들이 간혹 있거든."
"거기 당신! 어서 내 친구를 내려보내지 못해? 내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당장 경찰이 달려올 거라고."
수영장 한가운데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토프락은 엘리프가 내 일행이냐는 듯 턱 끝을 대각선으로 치켜올렸다.
"우린 그저··· 맹세코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콜라는 우리가 다시 사 줄게. 해먹은, 완전히 망가진 거야?"
"상관 마. 어차피 너무 더워서 수영하러 나갈 참이었으니까. 해먹은 됐어. 어차피 똑같은 거 못 구해." 토프락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반쯤 뒤돌아섰다. "앞으로는 함부로 들어오지 마. 오늘은 운이 좋았지만, 못 볼 꼴 볼 확률이 높으니까."
토프락은 어제 우리가 지나간 암반에서 계단을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그 애가 어디서 수영을 하든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개들이 문제였다. 피코와 조로는 토프락의 꽁무니를 충성스럽게 쫓았다. 마치 그 애에게 개를 끌어들이는 페로몬이라도 분비되는 듯했다. 엘리프와 나도 어쩔 수 없이 난간을 붙잡고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디에 자리를 깔지 정했을 때, 토프락은 이미 물속으로 꼬르륵 사라지고 없었다. 개들도 이미 얕은 바다에서 첨벙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저 애는 그 폐가에서 가끔 잔다는 거야? 미쳤어. 쟤네 아빠, 분명 어릴 때 잭 케루악을 너무 많이 읽은 거야."
엘리프가 묵직한 돌덩이를 비치타월 네 모서리에 하나하나 올리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커튼을 찾다가 발견한 아빠의 박스에 그 미국 작가 책이 있었던 게 기억났다. 활주로처럼 아득한 도로가 인쇄된 표지를 넘기니 이런 글귀가 한글로 적혀 있었다. 네 길로 날 데려가 줘. 사랑을 담아 슬기가.
엘리프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가부좌를 틀더니 비트족 책에 함부로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고 물었다.
"어떻게 되는데?"
"파국으로 치닫지. 우리 큰할아버지가 그런 책들을 탐닉하다가 종국에는 객사하셨거든. 68혁명 때 파리로 건너가신 후 연락이 끊겼는데, 돌아가셨을 때 집도 가족도 직업도 보험도 없었대. 낡은 카라반 한 대가 재산 전부였다는 거야. 그 안에는 다 떨어진 해먹 하나랑 해괴한 나무탈만 백 개도 넘게 들어 있었다나."
"탈은 왜?"
"알 게 뭐야. 아무튼 우리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형을 찾아 파리에 가셨대. 그렇지만 번번이 못 찾고 돌아오셨다지. 나중에 큰할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알츠하이머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셨고 말야. 그 영향인지, 우리 아빠는 비트족이나 히피족이나 그 후계자들을 경멸해. 책임과 계율에서 달아나는 회피형 인간들이라고. 삶에는 틀이 어느 정도 필요한 법이래. 어쨌든 케루악이랑 해먹, 이거 불길한 조합이야."
토프락네 아빠가 특정 사상이나 문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전무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표 너머로 나아가는 토프락의 몸짓을 바라보고 있자니 해무가 낀 것처럼 주위가 아득해졌다. 그 애를 중심으로 바다가 활주로로 변하고 있었다.
이쪽 곶에서 저쪽 곶으로 몇 번을 오간 후에야, 토프락은 뭍으로 나와 우리 옆에 털썩 나자빠졌다. 개들도 드디어 힘을 소진했는지 그 애 옆에 드러누웠다. 나는 집에서 싸 온 헤이즐넛 봉지를 꺼냈다. 토프락에게 한 줌 건네자, 토프락은 누운 채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저 케루악 주니어도 그거네, 참외 배꼽." 엘리프가 다가와 귓속말했다.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감지되는 투였다. "야, 토프락. 너는 살면서 제일 이상한 순간이 뭐였어? 과장이 아니고, 내 동생 배꼽이 딱 너 같은 배꼽이었거든?"
엘리프는 어제저녁을 먹으며 나눈 대화 소재에서부터 유물을 찾으러 나선 얘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토프락은 완전히 방전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 손 잡았을 때."
토프락이 말하며 헤이즐넛을 더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엘리프는 턱을 목울대로 당겨 두 턱을 만들고 눈동자를 들어 올려 검은자를 완전히 몰아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지만, 나는 엘리프가 토프락에게 은근히 이끌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엘리프의 눈길은 토프락의 볼록한 배꼽에서 콜라병 파편에 베인 무릎으로 내려갔다가, 터질 듯 통통한 입술을 훑고 있었다. 시선은 푹 꺼진 눈두덩이로는 차마 올라서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눈꺼풀이 열려 녹주석이 쏟아질까, 그 고혹한 빛에 사로잡힐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피코가 토프락의 손바닥에 자신의 오른발을 갖다 얹었다. 언제나처럼 무구한 얼굴을 하고.
"이 녀석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토프락이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고 피코의 앞발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피코가 널 친구로 생각하나 봐. 얘도 가끔 그 폐가에서 자는 거니?" 엘리프가 손을 맞잡은 피코와 토프락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담으며 말했다.
"친구라기보다 삼촌 같은 느낌일 거야. 피코를 받은 게 나였으니까."
피코의 유아기와 청년기는 푼다 아주머니조차 모르시는 영역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피코가 단지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이미 세 살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피코를 받았다면, 토프락은 언제부터 이 마을에서 지낸 걸까? 나처럼 여름에만 잠깐씩 와서 지냈던 걸까? 그런데 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을까? 이 애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 넌 피코 엄마도 봤겠네?" 내가 물었다.
"제이노는 양치기 개였어. 피코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지. 피코는 제이노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어. 체력도 좋고 영리하고. 그걸 간파한 목장 사람들이 양치기를 시키려고 몇 번이나 피코를 산으로 데려갔는데,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좋다고 울타리를 넘어 따라가는 통에 다시 이 시가지 떠돌이 개가 된 거야. 사람을 믿는 법은 가르쳐도, 믿지 않는 법은 가르칠 수 없다는 게 슬플 뿐이지."
엘리프는 피코의 출생 경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챗지피티 창에 타이핑을 하느라 바빴다.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네. 발굴 실적을 바탕으로, 유물 발견 확률이 높은 순서를 정리해 드릴게요. 아크로폴리스 남쪽 항구 L2와 L3 주변··· 아크로폴리스는 또 어디야."
"유물을 찾을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이 해안 끝자락에 있는 헬레니즘 시대 양조장까지는 가봐야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토프락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이봐, 그러지 말고 그 양조장인지 뭔지까지 안내해 줄 수는 없어?" 엘리프가 투덜거렸다.
토프락이 손목시계 문자반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더니 말했다.
"안 돼. 시간이 빠듯해."
"이 게으른 마을에서 서두르는 사람이 다 있네. 어딜 가는데?" 엘리프가 말했다.
"안동네에 있는 교회."
"교회?"
"18세기에 지어진 교회를 마을 문화 센터로 써. 오늘 저녁에 이스마일 게즈긴이 북토크를 하기로 되어 있거든. 넌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면서 그것도 몰라?"
엘리프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이스마일 게즈긴이라면, 「청소년을 위한 고고학」의 저자 말이야? 에게대학교 교수님으로 계시는 분. 북토크는 뭐에 대한 건데? 설마, 신간 「우리의 고고학」에 대한 거야?"
"「타인의 고고학」이겠지." 토프락이 슬리퍼를 꿰어 신으며 중얼거렸다.
엘리프는 당장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늦을 거라고 수선을 떨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줌마가 어딜 갈 건지, 뭘 타고 갈 건지, 밥은 어떻게 할 건지, 언제까지 돌아올 건지 꼬치꼬치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프는 신경질을 내면서도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는 듯 자잘한 세부까지 빠짐없이 보고했다. 우리 엄마는 이런 일로 내 안위를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많았다. 낯설기만 하던 서울의 궁에 갔을 때, 근처 대형 서점에서 나를 놓고 사라져 안내 데스크에 가 엄마 찾는 방송을 부탁한 적도 있었다. 엄마가 사라지기 석 달 전부터 그런 징후가 잦아졌다. 엄마는 연락도 없이 새벽에 귀가하거나 만나기로 한 장소에 늦게 도착했다. 그러면서도 미안해하거나 멋쩍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베이올루[1]에서 아빠의 개인전이 열린 날에는 관계자 대부분이 뒤풀이 장소로 이동한 후에야 나타났다. 엄마에게는 꽃다발도 핑계도 없었다. 아빠는 갤러리 발코니로 엄마를 데리고 나갔다. 얼기설기 증축된 옥탑에 자리한 그 갤러리는 방음이 일절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 왔냐고, 언제까지 이렇게 가족을 불안하게 할 셈이냐고, 이래서야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아빠는 몰아쳤다. 엄마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언제나처럼 나른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과 지한이를 믿으니까 괜찮아. 다들 조금씩은 결핍되어서 살아.
꩜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