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수필

[무구수필] 뜨거운 아인슈페너

2026.08.01 | 조회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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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주 가까이 되는 여행의 마지막 날, 사실상 그 도시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다 보니 평소보다 좀 더 무리해서 식사도 거르고, 간단한 간식만 챙긴 채 열심히 걸어 다녔다. 여행 내내 매일 만 보 이상을 걷는 것이 일상이었다. 저녁 시간 후에도 운영하는 카페가 많지 않아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결국, 숙소 근처의 현지 프랜차이즈 카페를 찾았다. 이미 안팎으로 사람이 북적이는 그곳에서, 간신히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다가와 주문하겠냐고 물어,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메뉴판을 둘러보다가 아인슈페너 한 잔을 골랐다. 한국에서는 주로 차가운 음료로 마셨던 메뉴인데 이곳은 어떠려나? 폭염이 어느 정도 가셔서 저녁이 된 지금은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나는 한참을 걸어 다녀 온몸에 열이 올라 있었다. 어차피 시원한 음료를 시켜도 한국처럼 시원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처음 결정 그대로 아인슈페너 한 잔을 주문했고, 역시나 뜨끈한 커피 위에 크림이 올라간 음료가 나왔다.

더운데, 이거 맞나? 잠시 고민하다가 같이 나온 스푼으로 크림을 떠 마셨다. 달콤한 것이 몸으로 들어오니 기운이 쭉 풀렸다. 크림과 커피를 천천히 섞었다. 분리되었던 층이 슬슬 섞이며 한 잔의 뜨거운 음료가 되었다. 뜨거우니 자연스레 한 번에 한 입만 마셨다. 낮에 미술관에서 봤던 조각상과 그림들을 떠올리며 기념으로 샀던 연필을 사용해 글을 썼다. 커피 한 입, 노트에 한 줄, 커피 한 입, 또다시 노트에 한 줄. 얻은 것은 무엇인지, 잃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았다. 커피 한입에 피로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 특별히 대단히 맛 좋은 음료가 아니었음에도, 내가 느끼고 있던 피로감으로 인해 반가운 회복제 역할을 하는 것. 이건 꼭 이곳이 아니어도 평소에 충분히 겪을 만한 일인데? 그렇지만 그 만족감이 너무나 컸다. 아무렴 어때, 덥고 지쳐도 뜨거운 커피 한 잔과 글을 쓸 수 있는 노트와 연필이 있으니 좋았다. 이상하게도 좋았다.

창밖으로 야외 좌석에 앉은 카페 손님들, 자기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로 지나가는 트램과 잘 모르는 언어로 무엇인가 적혀 있는 건물들. 낯선 상황에서도 익숙한 경험, 익숙한 상황에서도 낯선 경험, 꼭 여행지가 아니었어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우면서도 그러니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지, 다시 나를 다독이며 안심시키는 마음들.

 

아무리 새롭고 낯선 일이 찾아와도 그 앞에 반응하는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나에겐 더 이상 남을 것이 없다. 그 낯섦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모양으로 살아간다면, 대체 무슨 새로움이 의미가 있을까. 이미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시 새롭게 보는 눈, 그것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다행이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삶의 방식.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알고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용기. 이미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시 꺼내, 새로운 상황과 환경에 배치했다. 크다고 느꼈던 게 작아 보이기도 하고, 작다고 생각한 것이 크게 보이기도 했다.

낯선 상황에 당황하는 나, 평소였다면 안 했을 실수를 하는 나, 무력함을 느끼는 나. 새로운 나의 모습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감각과 반응을 관찰한다. 그 순간 내가 무엇을 주목하는지, 무엇에 집중하는지, 나라는 사람의 체를 거르면 그 후에 무엇이 남는지.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떤 경험의 기억은 몸에 각인되어 남는다. 몸과 마음을 다 동원하여 흠뻑 젖었던 순간들. 내 안에 깊이 스며들어 시간이 흘러 표면의 먼지가 다 떨어져 나가도, 꽉 쥐어짜이는 일이 생겨도 사라지지 않고 이미 진하게 물들어 있다.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은 뭘까. 새로운 경험? 단지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젠가 분명 새롭지 않은 것이 된다. 새롭기만 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이상, 무엇인가가 내게 남기를 기대하고 바라던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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