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인간의 기억을 매체에 남겨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기록을 생산하고 보존하고 그 가치를 평가해, 남길 것과 폐기할 것을 선별하는 일은 오랫동안 인간의 판단에 맡겨졌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과정의 일부를 AI가 수행하기 시작했다. AI는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정보를 현재의 맥락에 활용할 것인지 선별하는 새로운 기억의 체계로 발전하고 있다.
필자는 AI를 기록학 전공자로서 관련 정보를 탐색하거나 공공기관 행정 실무에 필요한 보고서 제목을 구상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미 삼아 새로운 채팅창을 열어 “생년월일과 출생 시간, 성별을 입력하며 사주를 요청했다.

그 결과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AI가 추천한 적합 직업군에 기록관리, 아카이브, 정보관리가 포함된 것이다. 특히 ”현재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커리어 추천“에는 필자가 현재 공공기관에서 기록관리와 행정실무를 경험하고 있고 기록학 박사과정과 데이터 분석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사주 풀이를 요청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과거 필자와의 대화 기록을 통한 필자의 이력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 경험은 필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겼다. 일상적인 AI 사용을 통해, 이전 대화를 기억하고 취향을 반영하고 과거에 진행하였던 내용을 이어가는 점은 편리하다. 그런데, 과연 그 기억은 필자가 직접 저장하고자 했던 기록일까? AI의 사용자에 대한 무분별한 정보 선별의 결과일까?
2026년 AI의 기억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화형 AI 서비스들은 사용자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는 기능을 계속 개선하고 있다. 서로 다른 플랫폼에 축적된 기억을 그대로 옮겨와 학습하는 기능이 등장함과 동시에, 과거의 기억이 계속 축적되어 업데이트되는 기능으로 변화하고 있다.
2026년 3월 구글은 다른 AI 서비스에 축적된 메모리와 채팅 기록을 Gemini에 가져오는 기능을 발표했다. 사용자가 다른 AI 서비스에서 진행한 대화를 다시 처음부터 Gemini에 학습시키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발전이다. AI 서비스가 달라져도 사용자의 기억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ChatGPT는 메모리와 관련된 기능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왔다. 2024년 ChatGPT의 초기 메모리 기능은 사용자가 명확하게 메모리 저장을 지시하였을 때 저장이 가능했다. 이는 사용자가 알려준 정보를 이후 대화에 활용하는 기능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후 2025년에는 ChatGPT의 메모리 기능이 개선되었다. 채팅 기록을 참조하여 백그라운드에서 메모리가 자동 정리됨에 따라 저장된 메모리 목록에 없는 대화의 콘텍스트도 참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ChatGPT가 여러 대화에서 학습하고 메모리가 지속적으로 통합할 수 있도록 하는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를 활용한 것이다. 따라서 대화의 최신성과 가장 관련성 높은 콘텍스트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2026년 챗지피티는 메모리에 대해 크게 세 가지 기능을 개선했다.
- 유용한 콘텍스트 이어가기 : 사용자가 한번 정보를 알려주면 이후의 대화에서도 그 정보를 기억한다.
- 선호도와 조건 반영하기 : 사용자가 선호하는 내용을 알려주면 이후에도 선호 조건이 지속적으로 반영된다.
- 최신 상태 유지하기 : 사용자의 대화 메모리는 자동으로 업데이트되어 최신성이 유지된다.
기록인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있다. AI는 과거의 모든 대화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응답에 유용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참조하고, 기억된 정보도 새로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어떤 정보가 남고 어떤 정보가 뒤로 밀려나는 걸까? 아예 삭제되진 않지만 사용되지 않고 메모리 상자 속에 처박히는 걸까? AI의 판단에 따라 한때 중요했던 정보가 현재 관련성이 낮다는 이유로 뒤로 밀려난다면, 그것은 기억의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인지, 선별에 따라 과거의 맥락이 달라지게 하는 과정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기억은 단순한 저장을 넘어 선별과 해석의 결과가 된다.
이러한 질문은 기록학의 오랜 고민과 맞닿아 있다. 먼저 ‘출처’의 문제이다. AI가 기억하는 정보는 이용자가 직접 제공한 것인가, 대화에서 추론한 것인가? 사용자의 의견과 AI의 해석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다음은, ‘맥락’의 문제이다. AI가 어떤 정보를 기억하고 수정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가? 정보가 요약되거나 갱신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대화와 그 정보가 등장한 상황을 얼마나 복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전’과 ‘처분’의 문제이다. 기억을 다른 서비스를 옮기거나 삭제할 때, 그 정보의 맥락과 이력은 함께 관리될 수 있는가?
AI 대화 서비스의 메모리를 공공기록이나 전통적인 기록관리 체계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AI의 기억은 개인화된 응답을 위한 정보처리 기능이며 그 작동 방식과 관리 목적도 기록관리와는 다르다. 그러나 정보를 선별하고 요약하거나 다시 업데이트하는 과정, 그리고 주제에 활용한다는 점 등에서 기록인이 살펴볼 수 있는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AI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기억하는지에서 나아가, 무엇을 기억하도록 선택했는지와 그 기억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등에 따른 책임이 존재하는지도 고민해보아야 하는 시점이다. 기록이 과거를 남기는 일이라면, AI의 기억은 과거를 현재에 맞게 다시 불러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보다 나를 더 잘 기억하는 것처럼 보이는 AI 앞에서, 우리는 기억의 양보다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출처와 맥락, 진본성의 문제는 이제 AI의 기억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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