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기록에 진심이었던 나라다. 그 진심의 흔적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세 가지 관찬 연대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일성록』이다.

위의 세 가지 조선시대 연대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단연 『조선왕조실록』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史官)이 임금의 언동과 정치 논의 등을 사초(史草)로 남겼다가, 임금 사후에 실록청이 편찬한 역사 기록이다. 『승정원일기』는 왕명의 출납 기구인 승정원의 주서(注書)가 임금의 일상 정무와 관련한 국정을 매일 기록한 또 다른 관찬 사서이다. 두 기록 모두 공식적인 국가의 기록으로 출발했으며, 조선 초기부터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실록은 『태조실록』부터 남아있으나, 『승정원일기』는 불타 인조대 기록 이후부터 남아있기 때문에 ‘추정’이라고 하였다.)

반면, 『일성록(日省錄)』은 출발부터 다르다.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 스스로 반성을 위해 쓰던 개인의 일기인 『존현각일기』가 『일성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의 한 구절인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에 감명을 받은 세손이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임금에 즉위한 후 국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점차 일기를 스스로 작성하기가 어려워지자 1783년(정조 7)부터 규장각의 관원들이 시정(施政)을 중심으로 일기를 작성하고, 5일마다 왕의 재가를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일성록』의 작성 실무를 담당했다. 검서관이 매일의 기사 초안을 잡으면(이를 출초(出草)라고 한다), 규장각 각신이 교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체제로 정착한 것이다.
사관과 주서는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하다. 그런데 『일성록』의 실무자는 유독 낯설다. 이들은 정식 문과 출신도 아니었고, 규장각의 핵심 관원인 각신(閣臣)도 아니었다. 이번 글은 그 ‘낯섦’에서 출발한다. ‘검서관’은 누구일까.
규장각과 검서관의 탄생: 정조와 서얼, 그리고 실무자
1776년 즉위한 정조는 곧장 궐 내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했다. 규장각은 역대 임금들의 어진,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는 기구였으나, 점차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모하며 곧 왕권을 뒷받침할 친위 세력을 양성하는 기구로 자리 잡았다.

검서관은 3년 후인 1779년(정조 3) 3월 27일, 홍국영(洪國榮)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홍국영의 건의하는 말을 살펴보면, 검서관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설치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지금 서얼 중에 글과 식견이 있는 자가 적지 않으나, 벼슬길에 막혀 그들이 품고 있는 재주를 시험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 운각(芸閣, 교서관)의 자리 중에 네 자리를 덜어내어 검서관이라 명명하고, 서얼 중에 합당한 사람을 골라 낙점을 받아 임명하되 […]” (『승정원일기』 1779년(정조 3) 3월 27일 신해)
검서관은 정조의 서얼 허통 정책과 문치주의 학술 정책,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기 위한 방안이었다. 홍국영의 건의에 따라 같은 해 6월,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 네 사람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초기에는 내각인 규장각 소속이 아니라, 외각인 교서관 소속이었다가 1781년(정조 5)부터 내각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애초에 검서관은 다른 규장각 각신들과 나란히 설계된 자리가 아니라, 밖에서 편입된 존재였던 셈이다. 검서관은 규장각의 정원 156 자리 중 겨우 네 자리에 불과했다. 그만큼 규장각이라는 조직 내에서 검서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제도적 위상은 이토록 작았으나,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네 사람이 매일 『일성록』을 출초하고 규장각의 업무 일지인 『내각일력』을 편사(編寫)했다는 사실은, 규장각이라는 조직에서 자리의 크기와 실무의 무게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검서관의 기록 실무: 작성, 교정, 그리고 보존
검서관에게 부여된 공식 임무는 법전인 『대전통편』에 짤막하게 규정되어 있다.
“검서관은 4원은 5품으로, 참외관(參外官)은 품계에 따라 군직을 주어 각신들 도와 교서(校書)·사서(寫書)한다.”
글자나 내용을 살펴 바로잡는 ‘교서’와 문서를 기록하는 ‘사서’, 이 두 가지가 검서관 업무의 기본 뼈대이다. 그러나 실제 검서관의 업무는 이보다 훨씬 다양했다. 내각으로 이관된 지 한 달 만인 1781년(정조 5) 2월 13일, 정조의 명으로 검서관은 『내각일력』을 편사하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또한 초대 검서관 중 한 명인 이덕무가 쓴 「검서청기(檢書廳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용(御容, 어진)을 봉심할 때와 절일(節日)에 거둥할 때와 성 밖에서 임금을 뒤따를 때, 연회의 활쏘기, 표전을 짓고,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일, 어제·일력·일성록과 명령하는 문자로서 내각[규장각]에서 나오는 것 치고 손질하고 정서하며 교정하는 임무를 맡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문장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일[쇄서(曬書)]’이다. 검서관의 업무가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서적과 어제(御製)를 정기적으로 살피는 봉심(奉審), 습기와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볕에 말리는 포쇄(曝曬), 안전한 곳에 받들어 모시는 봉안(奉安) 등 이 모든 것이 검서관의 상시 업무였다. 오늘날로 보면, 기록을 ‘생산’하는 일뿐만 아니라 ‘보존’하는 일까지 검서관이 맡은 바 임무였다. 검서관은 그날그날의 기사를 받아 적는 서기(書記)이자, 이미 생산된 기록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관리자였던 것이다. 검서관은 기록의 최종 권위자는 아니었지만, 기록이 만들어지고 정리되고 보관되는 전 과정에 관여한 규장각 실무의 축이었다.
사관의 역할을 기대받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정치적 기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각신의 임명은 형식적인 절차로 남았고, 여러 잡직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검서관만은 예외였다. 오히려 이 시기부터 규장각 내에서 검서관 역할의 비중은 더 커졌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 『내각일력』의 기록을 보면, 궁중 행사에서 검서관이 사관, 주서와 나란히 봉심례(奉審禮)에 진참(進參)하는 모습이 1802년(순조 2)부터 1883년(고종 20)까지 80년 넘게 꾸준히 나타난다. 문과 급제자도 아니고, 각신도 아닌 서얼 출신인 검서관들들이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는 정식 기록관들과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둘째, 순조대 검서관이었던 유본예(柳本藝)는 그동안 축적되어 온 『일성록』의 편찬 체제를 정리하여 『일성록범례(日省錄凡例』를 저술했다. 이는 단순히 기사를 받아 적는 일을 넘어, 국가 기록이 어떤 틀로 정리되어 왔는지를 문헌으로 매듭짓는 작업까지 검서관의 몫이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검서관의 위상 변화는 숫자로도 뒷받침된다. 검서관이 궁중 행사에 참여한 공로로 임금에게 사급(賜給)을 받은 횟수를 왕대별로 살펴보면, 순조대 249회, 헌종대 83회, 철종대 81회, 고종대 51회로 총 464회에 이른다. 전체 사급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재위 기간별로 살펴보면 헌조대와 철종대는 거의 줄지 않고 꾸준히 유지되었다. 규장각의 정치적 기능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이 시기에도 검서관이 여전히 임금이 주도하는 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는 뜻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기구로서 규장각은 저물었지만, 기록 실무를 쥔 검서관의 자리는 저물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규장각의 기능 축소 속에서 검서관의 기능만 유지되는 것에 기인하지 않는다. 조선후기의 국사(國史) 체계 안에서 벌어진 논의와 맞물려 있다. 실록은 조선 최고의 공식 사서로서의 위상을 시종 유지했지만, 정쟁으로 인한 개수(改修)가 거듭되면서 편찬 당시에는 그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함께 따라붙기도 했다. 이런 사정 속에서 매일매일 임금의 동정과 국정을 촘촘히 기록해 온 『일성록』이 대안으로 주목되며 실록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국사(國史) 자료로 그 무게를 더해갔다. 밀도 높고 열람이 비교적 자유로운 자료라는 점에서, 국정 운영이나 역사 서술에 참고할 자료로서 실록보다 유용하게 여겨지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성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초안을 작성하던 검서관이 사관 아닌 사관의 역할을 기대받게 되었다.
이렇게 커진 검서관의 역할과 무게는 검서관 직 자체의 성격도 바꾸어 놓았다. 순조대 이후 검서관 자리가 세습화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초대 검서관인 유득공에 이어 그의 아들 유본학·유본예(정조~헌종대), 손자 유지희(철종~고종대)까지 3대에 걸쳐 검서관을 지냈고, 이덕무와 그의 아들 이광규, 박제가와 그의 아들 박장암 역시 부자가 나란히 검서관 직을 거쳐갔다. 이와 같은 경향은 검서관 결원 시에 문지(門地, 문벌)를 먼저 살피고, 그 다음에 재예(才藝)를 시험하도록 한 선발 규정이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었다.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관직에 나아가기 어려웠던 서얼들이 도리어 한 가문 안에서 기록 실무의 경험과 안목을 대물림하며 전문성을 쌓아간 것이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쓰고, 그 아들 유본예가 『한경지략』을 쓴 것도 우연이 아니라 그 연장선에서 읽을 수 있다.
공적 기록을 넘어서: 개인이 기록한 역사와 지리
검서관들은 『일성록』과 『내각일력』이라는 공적 기록 밖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저술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유득공의 『발해고』는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남북국시대’라는 역사 인식의 틀을 처음 제시했다. 그의 아들이자 마찬가지로 검서관을 지낸 유본예는 『한경지략』을 남겼는데, 이는 한성의 연혁과 궁궐, 성곽, 명승 등을 개인이 정리한 지리지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궐내각사 규장각조에는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일성록』의 출초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검서관이 자기 손으로 자기의 직무를 기록으로 남긴 셈이다.
이 두 문헌은 각각 역사와 지리의 측면에서, 국가의 명령 없이 개인이 자발적으로 남긴 기록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오늘날의 국가가 주도하는 공공기록과 대비되는 민간기록의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것일까? 국가의 공적 기록은 언제나 남겨야 할 것과 남기지 않아도 될 것을 스스로 선별한다. 공공기록의 그물 바깥에서 공백을 메운 것은 다름 아닌, 문과 급제자도 정식 사관도 아닌 검서관 개인의 자발적인 저술 활동의 결과였다.
기록자의 자격을 다시 묻다
사관과 주서가 ‘제도가 정식으로 임명한 기록자’였다면, 검서관은 ‘제도가 규정한 직무를 넘어 역할이 만들어낸 기록자’였다. 검서관이 남긴 두 기록의 말미에는 사관의 사초나 승정원 일기의 좌목처럼 그날을 담당한 검서관과 교정한 각신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누가 무엇을 기록했는지를 그 즉시 문서 위에 남겨, 훗날 기사의 정확성을 따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둔 것이다.
검서관은 사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록을 쓰고, 정리하고, 보호한 손은 분명 검서관의 것이었다. 글의 말미에서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하나이다. 기록자의 자격은 직함으로 정해지는가? 아니면 무엇을 어떻게 남기고 지켰는가로 정해지는가. 조선후기의 역사도, 오늘의 기록도 이 두 종류의 손이 함께 쓰고 만들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김문식 외, 2009,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김현정, 2012, 「『한경지략』을 통해 본 19세기 서울인식」, 『도시인문학연구』4.
오항녕, 2004, 「조선후기 국사체계의 변동에 관한 시론」, 『역사와 현실』52.
이은주, 2013, 「조선후기 검서관 제도의 성립과 위상변화」,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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