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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은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영국 아카이브 서비스 인증 제도를 둘러싼 현실 인식과 대안 모색

2025.04.11 | 조회 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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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영국의 아카이브 서비스 인증(Archive Service Accreditation) 제도는 기록관 운영 수준을 인증하는 국가 제도로, 국내에서도 종종 회자된다. 최근 기록과 사회의 글 <아카이브의 아카이브됨을 고민하다>에서는 이 제도를 소개하며 한국에도 공공과 민간을 아우르는 인증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실제 작동 방식, 한계, 그리고 국내 적용 가능성에 대한 냉정한 분석 없이는 낙관적 전망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필자의 고민에 반가움을 표하며 글을 이어가 본다.

 

이 제도는 '아카이브 됨'을 인증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아카이브 서비스 인증(Archive Service Accreditation)은 어떤 기관이 "아카이브다"라고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제도가 아니다. 핵심은 '아카이브 서비스의 운영 수준'이다. 즉, 그 기관이 기록을 어떻게 수집하고 보존하며, 이용자에게 접근 권한을 제공하는가를 평가한다. 따라서 이 제도는 법적 지위나 조직 정체성 부여가 아니라, 서비스 품질에 대한 공식적 보증에 가깝다.

운영 전략, 보존 환경, 전문 인력, 디지털 보존 전략, 접근 정책 등 다층적인 평가 항목이 존재하며, 이 기준은 작은 기관이 쉽게 따라가기에는 매우 높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인증을 받은 기관"은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체계를 갖춘 기관들 뿐이다.

 

참여 기관의 유형과 추이는 현실을 보여준다

2013년에 시작된 이 제도는 2022년까지 총 215개 기관이 인증을 신청했고, 그중 192개 기관이 최초 인증을 완료했다. 초기 몇 년간 신청이 집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신청 건수가 감소세를 보인다. 이미 인증 가능한 주요 기관들이 인증을 완료했고, 나머지 기관들에겐 현실적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인증기관 유형을 보면:

  • 지방정부 기록관(Local Authority Archives): 다수를 차지하며, 제도의 주요 대상(50%)
  • 국립 및 지역 박물관. 도서관 내 아카이브 (25%)
  •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 아카이브 (15%)
  • 비영리 예술단체, 전문 협회 (5%)
  • 기업 아카이브(5% 미만, 유니레버 등 소수)

즉, 민간도 참여 가능하나 실제로는 공공 성격을 띤 기관이 대부분이며, 순수한 민간단체나 시민사회 조직은 드물다.

 

높은 위상, 제한적인 실효성

ACA 인증 자체는 영국 내 문화유산 분야에서 꽤 높은 상징적 위상을 갖는다. 도서관·박물관의 공식 인증제와 비슷한 위치에 있으며, 인증 기관은 대외적으로 신뢰와 전문성을 인정받는다. 일부 기관은 이를 통해 자금 지원과 정책 파트너십에서 이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위상은 '이미 잘 굴러가는 기관'에게만 해당된다. 실질적으로는 행정적 문서화, 정책 수립, 평가 대응 등에 막대한 내부 자원이 필요하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소규모 아카이브에게는 부담이다. 인증을 준비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리소스를 실제 서비스 개선과 비교해 효율이 낮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우리는 무엇부터 논의해야 하는가?

국내에서도 이 제도와 유사한 모델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우선 던져야 한다.

  • 인증이 '보증'인가, '육성'인가?
  • 인증이 현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 소규모 기관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가?

인증은 그 자체로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미 체계를 갖춘 기관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한국의 아카이브 생태계가 더 필요로 하는 것은 인증보다는 기초 인프라와 정책적 연계, 민간 아카이브에 대한 제도적 인정이다. '인증'이라는 제도의 외피보다 먼저 '지원'과 '정의'라는 구조적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제도보다 '지지'가 필요한 우리의 현실

1990년대 영국에서도 지금과 유사한 논의가 있었다. 특히 커뮤니티 아카이브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 소규모 민간 아카이브들을 직접 인증하거나 관리하기보다는 중간지원조직과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델이 작동했다.

대표적으로 커뮤니티 아카이브 유산 그룹(CAHG, Community Archives and Heritage Group), 콤마넷(COMMA Net, Community Archives Development Group)등은 민간 아카이브 간의 정보 공유, 활동 사례 확산, 역량 강화 등을 통해 자연스러운 인증과 성장의 구조를 만들었다. 커뮤니티 아카이브 자문 팀(CAAT, Community Archives Advisory Team)이나 커뮤니티 아카이브 인증 시범 사업(CAAP, Community Archives Accreditation Pilot)은 공식 인증을 실험했지만, 이 역시 지나치게 경직된 모델은 피하려 했다.

이러한 조직들은 문화유산 지원 기금(HLF, Heritage Lottery Fund)과의 연계를 통해 소규모 단체들이 자율적으로 사업을 설계하고, 지역성과 고유성을 유지한 채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대안: 인증 아닌 '지지 구조'를 설계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식 인증 제도라는 평가 틀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지지 구조'다.

  • 공공과 민간 아카이브가 참여하는 느슨한 네트워크. 기록전문가협회의 분과로 시민아카이브포럼 등이 조직되어 지속적으로 활동. 반상근 이상의 담당 인력 한두명이 주도하고 뜻 있는 현업의 전문가들이 필요에 따라 결합하는 형태.
  • 개인과 단체, 연구자, 전문업체 정보와 연락처 목록 운영 (이번 시민기록 오픈마이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고 만들기 어렵지 않다)
  • 활동 사례와 방법론을 공유하는 워크숍 및 디지털 플랫폼
  • 지자체, 지역 문화재단, 중간지원조직을 통한 소규모 사업 지원
  • 한국아카이브재단 등을 통한 대규모 사업 지원
  • 민간 아카이브의 자율성 보장을 전제로 한 정책적 인정
  •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례가 확산되어 민간단체에 전문가 배정이나 기록시스템 제공이 제도화

이러한 구조는 '인증' 주는 위계적 질서보다는, 서로의 다양성과 맥락을 인정하며 함께 성장하는 협력 생태계를 만든다. 인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지금 시민 아카이브에 필요한 제도는 '무엇을 세울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

 

'지지'만으로 충분한가: 현실적 회의와 새로운 과제

물론 이러한 대안도 현실의 벽 앞에서 실효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NGO지원센터,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등 국내에서도 한 때 다양한 중간지원조직이 운영되어 왔으나, 그 지속성과 독립성, 실효성 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아 왔다. 아카이브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시민 아카이브를 위한 중간지원조직이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느슨한 네트워크가 실질적 협력의 장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더욱이 '지지'라는 말이 실질적 정책 지원의 부재를 가리는 수사로만 작동한다면, 이는 곧 또 다른 무책임일 수 있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말 뿐인 지지나 인증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정책적으로 지원하며, 문화적으로 존중하는 구조'다.

그 첫걸음은, 제도 설계 이전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누구와 함께 갈지를 다시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이어지길 바란다.

한편, 국내에서는 ACA의 전문가 인증 제도(Certified Archivist)와 같은 자격 중심 제도를 벤치마킹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제도는 1989년부터 시행되어 미국 내 기록전문가의 전문성을 공인하는 자격으로 자리 잡아 왔다. 일정한 교육과 경력을 갖춘 뒤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인증을 받을 수 있으며, 2017년 기준으로 약 1,139명이 인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시험의 유효성, 인증 유지 비용, 실제 채용 시장에서의 영향력 등에서 한계가 지적되고 있으며, 일부 주에서는 더 이상 이를 채용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처럼 제도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단순히 외국 제도라는 이유로 이를 도입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국내 기록 환경에 맞는 현실적인 적용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인증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도서관협회(ALA)나 디지털보존연합(DPC)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전문가 대상 온라인 재교육 프로그램이다. ALA는 온라인 강좌, 워크숍, 실시간 웨비나 등을 통해 도서관 및 정보 전문가들의 역량 강화를 지원해 왔으며, DPC는 '초보자에서 전문가로, Novice to Know-How'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디지털 보존 실무 역량 강화를 체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자격 시험 중심의 인증 방식보다 더 실용적이고 유연한 방식으로, 실제 업무에 필요한 역량을 축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실무 중심, 그리고 기본에 충실한 대학원 교과목 개편 역시 시급히 논의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맥락에 맞는 제도를 만드는 상상력과 연대이다. 이번 '시민기록 오픈마이크' 행사에서 시민 기록자들이 원하는 것과 기록 전공자들이 줄 수 있는 게 좀 더 명확해졌다. 이들은 대단한 걸 바라지 않으며 우리는 지금 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시민기록 오픈마이크 기조발제에 등장한 깃발들 사이트https://flaaa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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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laaa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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