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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기록된 이미지는 어떻게 역사를 지우는가

반복된 기록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덮어쓴 탕춘대성 내부 동네의 역사

2026.06.16 | 조회 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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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피

도시 공간의 역사를 연구하는 필자가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공부해 온 핵심 공간은 탕춘대성 내부 동네이다. 탕춘대성 내부 동네의 범위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행정동 기준으로 부암동·평창동(법정동 기준, 부암동·신영동·홍지동·평창동·구기동)에 해당한다. 과거 이 동네의 물리적인 경계를 이루던 산과 성곽은 터널이 뚫리고 도로를 확장·개발하는 과정에서 곳곳이 허물어져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필자가 처음 이 동네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는 서울사 연구에서 배제되어 온 주변의 지역사에 접근하는 것을 의의로 삼아 출발했고, ‘탕춘대성 내부 동네가 지니는 경관 중심의 이미지에 가려진 역사를 찾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나, ‘과연 이 동네의 정체성이 단일한 것이 맞는가?’를 질문으로 던지며 공부를 시작해 어느 정도 다층적인 역사성과 정체성을 밝히는데 성과를 얻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며 애초의 질문과 관련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지역의 다층적인 역사가 가려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특정 이미지가 우선시되며 고착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을 이번 글의 주제로 삼아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한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탕춘대성 내부 동네의 고착된 이미지가 과연 실재하는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인식했던 이 동네의 이미지가 실제로 필자 외의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실제 이 동네의 이미지를 좇아보고자 AI의 도움을 받아보았다. AI가 학습한 데이터의 상당 부분이 미디어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Gemini(Pro Extended)에 광복 이후인 1945년부터 탕춘대성 내부 동네(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가 신문이나 잡지 등 미디어에서 어떤 이미지로 소개되고 있는지 물었다.

 

AI가 분석한 탕춘대성 내부 동네에 대한 미디어 이미지

 

Gemini는 시대별로 변화하고 있는 탕춘대성 내부 동네에 대한 미디어의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45~1950년대 “세검정의 유원지와 혼란 속의 피란지”

-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서울 도심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피란민들의 생활 공간

- 신영동의 세검정 계곡은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 탁족(濯足) 장소이자 빨래터로 잡지에 자주 묘사되며 도심과 대비되는 향토적 변두리로 소비

 

 1960~1970년대 “1.21 사태와 닫힌 성곽 마을”

- 1968년 무장공비 침투 사건(1.21 사태) 이후, 부암동과 구기동 일대에 대한 미디어의 강력한 '안보 및 통제'의 프레임 작용

- 군사시설 보호구역, 건축 제한, 그린벨트 지정 등이 주요 기사로 분포하며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닫힌 공간화

 

1980~1990년대 한국의 베벌리힐스와 갤러리 문화

- 평창동 주택단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신문 사회면과 경제면에서 단골 소재화

- 대형 저택과 높은 담장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집중 조명. 90년대 후반부터 가나아트센터를 필두로 화랑들이 모여들며 '돈 많은 동네'에서 '예술과 교양을 갖춘 공간'으로 이미지 세탁 및 확장

 

2000~2010년대 드라마틱 핫플레이스와 슬로우 라이프

- 커피프린스 1호점(2007), 내 이름은 김삼순(2005) 등 인기 드라마의 배경이 되면서 부암동의 좁은 골목과 산비탈이 '낭만적 감성 공간'으로 폭발적으로 소비

- 여성지나 여행 잡지에서 불편한 교통을 오히려 '도심 속 여유(Slow life)'로 칭송하며, 트렌디한 카페와 공방을 묶어 소비 공간으로 소개

 

AI의 학습 데이터가 대부분 미디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위의 분석 결과는 이 지역에 대한 미디어 이미지의 지배력을 반영하는 증거가 되므로 의미가 매우 크다. 이에 AI의 분석은 이미지의 침투 범위와 재생산 구조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활용하였다.

Gemini가 분석한 탕춘대성 내부 동네를 향한 미디어의 시선은 자연경관·안보 공간 부촌 문화적 소비 공간의 흐름로 읽어낼 수 있다. 시대의 흐름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네의 시기별 이미지의 기저에는 전부를 포괄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도심 속 자연이다. 1945~1950년대에는 유원지로, 1960~1970년대에는 그린벨트와 청정지역으로, 1980~1990년대에는 전원주택지로, 2000년대 이후에는 힐링 공간과 슬로우 라이프의 공간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모두 도심과 인접한 자연이라는 요소가 부각된 이미지이다.

 

1945년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전 시대에 걸쳐 소비되고 있는 이 이미지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또는 어떤 조건 속에서 선택되고 반복된 이미지인가.

 

그 출발점을 찾으려려면 먼저 이 지역이 실제로 어떤 역사적 층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탕춘대성 내부 동네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연산군 시기에 조성된 탕춘대를 중심으로 유흥의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탕춘대가 사라진 이후에도 이곳의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별서가 많이 조성되는 지역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국가 방어체계의 변화 흐름에 맞춰 탕춘대성이 축성되고, 군사 기지가 되며 연융대로의 지명 변화를 겪은 도성 수비 체제의 핵심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전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개별 동네-평창동·부암동·홍지동·구기동·신영동-의 세부적인 기능과 역할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규정되며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통해 이 지역을 살펴보면, 크게 수려한 경관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정체성과 수비체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군사지역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설명된다.

 

이 지역의 군사적 정체성은 현재 지명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평창동은 북한산성의 보조 창고인 평창(平倉)이 위치한 곳, 신영동은 삼청동 인근에 있던 총융청이 이전하며 설치된 신영(新營)이 위치한 곳으로 두 지역 모두 현재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다. 홍지동은 탕춘대성의 문인 홍지문(弘智門)의 축성 이후 생긴 곳으로 현재 홍지동의 서남쪽 경계가 홍지문 내부로 형성되어 있다. 구기동을 포함한 이 동네들을 탕춘대성 안쪽 동네라는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설명하는 배경에는 조선 후기에 형성된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동네를 설명하는 이미지는 조선후기의 군사지역보다 수려한 경관이 우선시 되었을까. 그 답은 이 지역을 둘러싼 기록 생산과 유통의 불균등한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탕춘대성 내부 동네 역사성 소거의 구조적 출발점

 그 원인-이 지역의 역사성 소거의 시작-을 기록의 불균등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 이 지역과 관련하여 여러 시기에 생산된 기록들이 동등하게 생산·유통되지 않은 구조를 검토해 보려 한다. 이 지역과 관련된 기록은 크게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조건 속에 있었다. 존재하지만 대중의 접근이 어려운 기록, 생산되지 않은 기록, 과잉 생산되었으며 대중의 접근성이 높은 기록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이 만들어낸 불균등한 조건이 바로 이 지역의 역사성 소거의 출발점이 된다.

 

존재하나 대중의 접근이 어려운 ‘닫힌 기록’: 군사·방위 공간 관련 전근대 관찬 기록

첫 번째 유형은 이 지역의 군사·방위 공간으로서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이 해당된다. 주로 탕춘대성의 축성 과정, 이후 설치된 군사 시설 관련 기록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군영(軍營)의 등록류 등 관찬 사서와 공문서를 통해 생산되었다. 이 기록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분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생산과 관리의 주체가 국가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접근은 매우 제한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전근대 자료의 특성상 전문 지식 없이 읽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주로 전문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활용되고, 일반 대중의 직접적인 접근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록이 실재하는 것과 사회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명백히 다른 문제다. 전근대 관찬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서 지역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려면 번역·해제·연구·대중화라는 추가적인 단계가 필연적이다. 생산과 보존 이후의 단계가 진척되지 않는 동안 기록은 존재하지만 닫혀 있었다. 닫혀 있는 기록은 연구자의 자료 속에 머물거나 학술지에서 간간이 언급될 뿐이다.

 

생산되지 않은 기록: 생활 공동체와 주민의 일상 기록

두 번째 유형은 애초에 사료 자체가 충분히 생산되지 않은 경우로, ‘아카이브 침묵에 해당한다. 탕춘대성 내부 공간에 대입해 보면, 탕춘대성 안팎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 기록이 생산되지 않았다. 마을 공동체의 구성 방식, 시기별 주민 생활의 변화, 지역민 경제 활동의 구체적 내용 등 직접적인 사실을 기록할 주체도, 기록할 동기를 가진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민간의 일상이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이 지역만이 지니는 특별한 사정은 아니다. 그러나 탕춘대성 내부 동네의 경우, 군사 공간이라는 성격상 일상의 흔적이 공적 기록 안에서 더욱더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이 지역에서 실제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고, 어떤 공동체를 이루었는지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으면서 그들의 삶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되곤 한다.

 

과잉 생산되고 대중적 접근성이 높은 기록: 근대 신문·잡지에 실린 놀이 명소·유원지 경험의 기록

세 번째 유형은 앞에서 소개한 두 유형과 대비될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 지역의 놀이 명소·유원지로서의 경험과 그로 인한 이미지는 근대적 대중 매체인 신문과 잡지를 통해 풍부하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누구나 접근가능한 형태로 생산·배포되었다. 대량 생산되었으며,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고, 여러 번 반복적으로 생산되었다. 탕춘대성 내부 동네는 경성(京城) 근교의 소비 가능한 자연 공간으로서 이미지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당대 신문에는 세검정 주변의 물길과 산세가 담긴 사진이 함께 실렸고, 사진은 지역 공간의 단편적 이미지를 더 강화해 나갔다. 신문은 과잉 생산되고 열려있는 기록으로서, 공적 기록이나 일상 기록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방식으로 생동하며 이 지역에 대한 이미지를 사회에 각인시켰다.

 

첫 번째 덮어쓰기: 일제강점기, 유원지가 된 군사 공간

 기록 생산과 유통의 불균등한 조건 위에서 이 지역 역사성의 소거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시작은 일제강점기였다. 당시의 역사성 소거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조선후기의 군사·방위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유원지·놀이 명소의 정체성으로 대체되는 방식이다. 탕춘대성을 축성하고 연융대를 운영했던 사실, 신영동의 지명 유래가 된 총융청의 신영, 평창동 지명의 기원이 되는 북한산성의 보조 창고 평창 등 군사적 기억들은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뒤로 밀려났다.

근교풍경지상납량(2)(동아일보 1929년 7월 4일)
근교풍경지상납량(2)(동아일보 1929년 7월 4일)

그러나 이렇게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이 완전히 신문지 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맥락이 해체되며 역사성이 소거되었는데, 이 것이 두 번째 방식이다. 역사적 사실 자체는 꾸준히 보도된다. 그러나 역사의 맥락이 제거되며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역사성이 소거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검정(洗劍亭)이다. 세검정은 일제강점기 신문기사에서 이 지역을 설명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소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후기 이 지역의 공간 구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서술되지 않았다. , 세검정은 역사적 맥락을 잃고 옛날 옛적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자로서 경관의 한 요소로 소비되었다. 흔히 기록학에서 기록의 진정성을 이야기할 때 맥락(context)을 핵심 요소로 강조한다. 맥락에서 분리된 기록은 사실을 전달하는 동시에 왜곡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검정에 대한 수많은 기사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동안 세검정의 역사적 맥락이 파괴되었다.

세검정에서(동아일보 1927년 9월 27일)
세검정에서(동아일보 1927년 9월 27일)
세검정 부근(조선일보 1937년 7월 24일)
세검정 부근(조선일보 1937년 7월 24일)

역사성 소거의 마지막 방식은 특정 이미지를 담은 기록이 과잉 생산되며 여타의 이미지가 들어설 공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의 특성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단연 유원지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성 근교의 여러 지역은 경성부 주민들의 레저와 여가를 즐기는 공간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겪는다. 대표적 지역으로 우이동, 청량리, 뚝섬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의 탕춘대성 내부 동네들도 경성부 근교의 유원지로 개발되고 홍보되었다. 당시 신문에는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몰리는 대표적 장소로 이 지역을 소개하는 기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봄에는 하이킹하기 좋은 명소로(山家迎春記 彰義門고개, 조선일보1937.3.26.), 여름에는 사천(沙川, 홍제천)에서의 물놀이 장소로(세검뎡(洗劒亭)의 녀름빗, 동아일보1928.8.1.), 가을에는 단풍놀이 명소로(가을의 誘惑, 가을이면 내가 가는 숨은 명소는 어디어디, 산이 그리워, 동광 제381932.10.1.),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洗劒亭水泳場에 아이스·혹키, 조선일보1932.12.8.) 소개되고 있다.

 

수영강습개시(조선일보 1931년 7월 23일)
수영강습개시(조선일보 1931년 7월 23일)
세검정활빙장 금일부터 공개(동아일보 1932년 12월 14일)
세검정활빙장 금일부터 공개(동아일보 1932년 12월 14일)

조선후기에 국가 수비 체제의 핵심 공간이었던 이 지역이 유원지로 재편되는 이 전환을 단순히 도시 발전의 결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 이 지역은 유원지로 각광받는 동시에 조선 근대문학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의 거점이라 하면 대부분 성북동을 떠올리겠지만, 당시 이 지역에도 많은 문인들이 거주하며 문학과 출판 활동을 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층위는 놀이 명소 이미지의 과잉 생산 속에서 묻히게 되었다. 같은 시기의 성북동이 '문인들의 동네'로 기억되는 동안, 이 지역은 '놀이 명소'로만 기억되었다. 더욱이 유원지의 이미지가 고착화 한데에는 신문에 실린 놀이 명소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 사진이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무언가가 충분히 많이 기록되면, 다른 것은 존재하더라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세검정 인근의 나들이객(동아일보 1929년 7월 4일)
세검정 인근의 나들이객(동아일보 1929년 7월 4일)
세검정 주변 물놀이객의 모습(동아일보 1932년 8월 3일)
세검정 주변 물놀이객의 모습(동아일보 1932년 8월 3일)

두 번째 덮어쓰기: 해방 이후 매체가 계승한 것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어난 세 가지 방식의 역사성 소거가 해방 이후에는 변했을까? 아쉽게도 1945년 이후에도 이 지역을 다루는 미디어의 시선에는 근본적인 전환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유원지의 이미지상춘객의 나들이 장소, 물놀이, 세검정의 절경-는 해방 이후 신문과 잡지를 통해 사실상 그대로 계승되었다. 식민지 도시화의 논리 속에서 만들어낸 탕춘대성 내부 동네의 이미지가 역사적 성찰 없이 원래 있던 이 동네의 모습처럼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단편적 명소로서의 이미지 전승이 더욱 강화되었다. 두 번 째 덮어쓰기는 해방 이후 의도 없이 이루어졌는데, 오히려 의도적 전환보다 구조적으로 더 문제가 된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첫 번째 덮어쓰기가 남긴 이미지자연스러운 지역성으로 오인되면서 그것을 문제 삼을 계기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동네를 보는 틀이 일단 형성된 이후에 그 틀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미디어가 움직이면서 같은 이미지의 반복적인 노출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인식을 하나의 지배적인 이미지로 수렴시켰다.그 결과 이 지역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과 이 지역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이미지로 이 동네를 인식하도록 했다. 시대는 변했지만, 이 동네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관행화된 프레임 속에서 선택되었고, ‘도심 속 자연이라는 이미지라는 기저는 1980~1990년대 한국의 베버리 힐스2000년대 드라마 속 배경이 되는 감성적인 동네로 겉 모습을 바꾸어 가며 강화되었고, 그 아래의 역사적 층위들은 점점 더 깊숙이 눌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검정이 가린 역사: 장소가 역사를 가리는 역설

 

이러한 두 차례의 덮어쓰기 과정에서 한 가지 역설적인 현상이 함께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역사를 전달한다고 여겨지던 장소가 오히려 더 넓은 역사를 가리는 기제로 기능한 것이다. 바로 세검정이다. 오랜 기간 수많은 신문 기사와 잡지 등이 세검정을 이 지역 역사의 상징 장소로 반복적으로 소환하며 기억이 형성된 장소이다.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세검정이라는 단일한 장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더 넓은 역사적 맥락이 그 뒤로 가려지게 되었다. 역사에 대한 이해보다 고적·유적 보존이 우선시된 결과이다.

 

기록은 역사를 반영하는가, 구성하는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후 생산·유통된 신문 기사 즉, 미디어 기록이 탕춘대성 내부 지역에 대해 생산한 것은 이 지역의 역사를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이 지역의 역사를 특정 방향으로 구성한 것인가? 살펴보았듯 맥락이 사라진 채 보도된 유적 세검정의 이미지는 이 지역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이미지를 선택해 강화하는 행위였다. 특히 직접적으로 이 지역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미디어가 구성한 특정 이미지가 큰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사한 틀 안에서 동네를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역사학자와 기록학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 무엇을 꼭 해야만 하는가. 우선 닫혀 있는 사료를 열어야 한다. 전문 연구자는 대중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과거의 기록을 연구하고 번역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작업을 통해 연구자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기록을 사회 속으로 끌어내야 한다. 이는 미디어가 구성한 이미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기록학적·역사학적 실천일 것이다. 이에 더해 지역 주민들의 구술 기록, 일상의 모습과 공동체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들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로컬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것도 배제되어 온 기록이 담고 있는 층위를 복원하는 실천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문과 잡지 기사 즉 미디어 기록 자체를 기록학적·역사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어떤 과정으로 생산·유통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문제는 미디어가 구축한 이미지가 역사를 대체해 온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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