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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정체성과 그 명칭의 문제

- 탕춘대성인가, 연융대성인가? (2)

2025.10.16 | 조회 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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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정체성과 그 명칭의 문제” 1편은 탕춘대성의 명칭이 연산군 시기 임금의 유흥지였던 ‘탕춘서 유래했으며, 탕춘대가 위치했던 지역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중앙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가 숙종이 즉위한 후 재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했었다.

 

숙종 때 축성되기 시작한 탕춘대성이 완성된 시기는 영조 때이다. 숙종 때는 당파 간의 의견 대립이 심해 탕춘대성의 축성이 결정된 후에도 끊임없이 공사에 대한 반대 상소가 이어지고, 그 사이 환국이 발생하면서 탕춘대성 공사의 진행과 중지가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때 시작된 탕춘대성 축성 공사의 시작은 주변 지역에 큰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산성의 배후지가 된 탕춘대 지역

 

숙종 시기 탕춘대 지역의 기능은 유사시 북한산성으로 피난할 경우를 대비해 곡식을 비축하여 보관하는 창고가 위치한 곳으로 한정되었다. 숙종 시기에 탕춘대성을 쌓기로 결정한 이유가 이 창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산성으로 향하는 가파르고 좁은 진입로 때문에 곡식을 장기간 저장할 때 필수적인 개색(改色,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꾸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산성 내에는 최소한의 양을 보관하고 인접 지역인 탕춘대 지역에 창고를 크게 짓고 다량의 곡식을 보관한 것이다. 창고가 설치되며 이를 보호하는 성곽으로서 축성된 탕춘대성이 축성되고 또 수레가 다닐 길도 새로 닦였다. 원래 이 지역은 도성의 서북문인 창의문이 있었으나, 언덕이 가파르고 길이 잘 닦여 있지 않아 교통이 편리한 동네는 아니었는데, 창고 설치 후 도로가 닦이게 된 것이다.

숙종 시기 탕춘대성은 북한산성을 보조하는 창고를 보호하는 시설로 시작되었으나, 이 지역의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연산군 시기에 형성되어 내내 유지되던 “경관이 아름다운 놀러가는 동네” 이미지가 ”보장처인 북한산성을 보조하는 지역“으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의 “평창동”이라는 동명이 이때 생긴 창고 “평창(平倉)”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성격 형성에 창고의 설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

 

군대의 주둔과 도성의 배후지역화

 

숙종과 경종 재위 시기를 거쳐 영조가 즉위한 후, 탕춘대성의 나머지 구간이 완성되면서 지역의 기능도 더욱 확장·강화되며 변화가 이어졌다. 숙종 시기에 공사의 진행과 정지가 반복되던 탕춘대성이 영조 시기에 완공된 배경에는 당시 확립된 수도 중심의 국가 방위 체제 성립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임금과 조정이 도성을 벗어나 피난길에 올랐었다. 그런데 영조는 이와 같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적이 쳐들어와도 백성들과 함께 도성을 지키는 것으로 수비 체제를 바꾼 것이다.

도성방위론을 기본으로 하는 영조의 수비 정책은 탕춘대성과 도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산성의 보조 지역에 불과했던 숙종 때와 달리 영조 때의 탕춘대성은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하늘이 만든 요새지로 비유되었다. 그만큼 도성 방위에 필수적인 지역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면서 탕춘대 지역에 군대인 총융청을 주둔하도록 조치하며 도성 외곽 방어체제를 한층 강화해 나갔다. 총융청의 탕춘대 지역 주둔은 지역 기능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관련 관청과 시설이 갖추어지고, 수비 지역으로서 유지될 수 있도록 거주할 백성들도 모집했다. 탕춘대 지역으로 들어온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여건을 마련해주기 위해 공납계를 설치하기도 하고, 개간을 지원하거나 집을 대신 지어주는 등 다양한 모민정책을 펼쳤다.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이외에도 매우 많은 우대 정책이 펼쳐졌다는 것이 많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마을을 형성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인 정책을 펼친 것이다. 

 

지역의 정체성 변화에 따른 "연융대"로의 명칭 변경 

 

영조 시기의 탕춘대 지역의 기능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탕춘대의 명칭을 바꾼 조치였다. 영조는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연희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탕춘”에서 군사를 단련한다는 의미의 “연융”으로 명칭을 고치도록 명했다. 이로써 “탕춘대”는 “연융대”가 되었다. 물론 탕춘대성의 이름을 연융대성으로 바꾼다는 명령이 별도로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지명을 바꾼 것은 그 지명으로부터 유래한 성곽의 명칭 변경도 자연스레 따라가는 것으로 인식해도 무방할 듯 하다. 실제로 조선후기 지도인 『동국여도』의 「연융대도」에는 성곽의 이름이 “연융서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빨간 박스에
빨간 박스에 "연융서성(鍊戎西城)"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임금의 명령으로 지명이 변경된 것은 국가적인 노력을 통해 지역 정체성을 바꾸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조선 전기에 잠깐 기능하던 ‘탕춘대’는 사라지고 임금의 명으로 새로운 기능과 이름이 부여된 ‘연융대’는 큰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가 나서서 물심양면으로 노력했으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연융대보다 탕춘대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고, 심지어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변경된 이 성곽의 명칭은 “연융대성”이 아니라 “탕춘대성”으로 명명되고 있다.

 

이름은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가장 함축적인 것이다. 즉, 대상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욱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통합하여 “한양의 수도 성곽” 으로 명명했다는 점에서 탕춘대성의 명칭을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비단 탕춘대성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화유산의 명칭은 그 유산이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잘 담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상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거기서 올바른 의미와 가치를 도출해 내는 것은 결국 올바른 문화유산의 향유와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탕춘대성과 연융대성 중 과연 어떤 이름이 이 성곽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적절한지 다시 한 번 깊은 고민과 사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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