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인치 규칙
클리블랜드 히스토리컬을 살펴보느라 밤을 샜다. 일정이 급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였다. 서울기억여행을 이것처럼 만들 생각을 하고 보니 배울 게 많았다. 사이트에 접속하면 미국 클리블랜드 지역의 지도가 펼쳐지고 800개 넘는 장소에 핀이 꽃혀 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힐튼 호텔이 있는 다운타운 부근에는 핀이 안 꽃힌 건물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모든 장소가 유서 깊은 곳이 아닐 텐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하나씩 장소를 클릭하며 제목과 소개글, 사진과 음성들을 읽어나갔다. 이 사이트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건 작은 음식점들이었다. 그 중 하나가 리틀 테드 레스토랑 앤 바(Little Ted's Restaurant and Bar) 이다. 여기 소개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토요일 밤, 당신은 사람들과 어울릴 곳을 찾고 있습니다. 맥앤제리스에는 가고 싶지 않죠. 지난번에 거기 갔을 때 키 큰 매력적인 남자에게 접근했는데, 당신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을 걸자 그는 제법 공격적으로 반응했죠. 캐딜락 라운지에는 다시 갈 수 없습니다. 글로리아의 "12인치 규칙"을 재빨리 키스로 어겼고, 지난주에는 출입 금지를 당했거든요. 전쟁 후 생겨난 다른 술집들은 이제 쇠퇴했고, 어떤 "안전한" 술집이 이번 달에 문을 열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뭐, 리틀 테드가 있으니까요...
리틀 테드 레스토랑 앤 바는 이스트 3번가의 좁은 상업지구에 1944년부터 1955년까지 성업했다. 이 곳은 퀴어들이 숨어 지내야 했던 시절, 격식 없이 들러 친교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오하이오주는 반동성애법 때문에 남성 게이들이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12인치 규칙” 때문이었다. 12인치 규칙이란, 바나 클럽에서 남성 손님끼리 서로 12인치(약 30cm) 이하로 가까이 다가가거나 신체 접촉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가톨릭 개신교 신자가 많은 산업도시 클리블랜드는 보수적이었고 경찰의 단속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게 주인들은 12인치 규칙을 고수했다.
반면 리틀 테드에는 복장 규정이 없었다. 남자들이 바에서 악수하거나 친해지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가게 주인 테드 미클로는 루마니아 태생 이민자로 작은 키와 부드러운 말투로 “리틀 테드”란 별명을 얻었다 한다. 20세기 초 클리블랜드 퀴어 커뮤니티들의 피난처였던 이 곳은 1955년 이사하며 버려졌고 테드 미클로는 1991년 사망했다. 이제 그가 퀴어 커뮤니티에 레스토랑을 왜 열었는지 알 길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엔 재개발된 상업 사무공간과 대규모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이 공간은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사학과 학생인 매디슨 마투작(Madison Matuszak)이 2022년 11월에 기록한 것이다. 그는 아마 마크 티보 교수의 디지털 인문학 수업 과제로 자신이 관심 두던 장소 두 곳을 등록했을 것이다. 이 학생은 1940년대 클리블랜드의 술집 풍경이나 게이 바, LGBTQ를 다룬 참고문헌들을 열심히 읽은 듯 하다. 지역 신문과 공공도서관에서 가져온 옛 사진들과 딱딱하지 않은 소개글 덕분에 미국 중소도시의 70년 전 분위기가 내게도 잘 전달되었다.
클리블랜드 히스토리컬에 아이템을 등록한 크리에이터들은 무수히 많았다. 마크 티보 교수나 연구진도 있었지만 역사학과 학생들이 등록한 장소가 많아 보였다. 한 학생은 무심하게, 다른 학생은 아주 진지하게, 누구는 도시의 옛날 참고문헌을 뒤지고, 누구는 인터뷰 음성을 올려놓았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장소는 많았다. 비트족, 바이커, 대학생, 히피족들이 모여 시를 쓰고 반문화 사상을 논하던 아델스, 1920년대 권투의 인기 덕에 생겨났다 사라진 올드 앵글의 복싱 체육관들, 이탈리아 이민자 형제가 만든 이사벨라 브라더스 베이커리, 가장 오래된 자전거포인 프리드리히 자전거, 백인 여성 웨이트리스만 고용한 뒤 흰색 유니폼을 입혀 사업을 성공시킨 짐스 스테이크하우스 등 도시의 역사와 함께 했던 곳들이 로컬들의 시선으로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오스카 극장을 찾아서
그래, 클리블랜드 히스토리컬처럼 하면 되겠다. 서울에도 이런 공간은 많다. 만남의 장소였던 강남역 뉴욕제과와 타워레코드, 그리고 종로서적, 춘천으로 엠티 가는 대학생들이 집결했던 청량리역 광장, 60년대 무수히도 많이 생겼던 단관극장, 불꺼진 홍등가와 시장, 노포, 문학 속 장소 등 기록할 곳은 넘쳐났다. 연구원들과 회의 끝에 스무 개 장소를 정했다. 장소마다 A4 한 장 분량의 소개글을 쓰고 사진 10장을 붙이기로 했다. 대학원 수업에서 해본 대로 장소마다 예상 수집기록과 킬러 콘텐츠를 써 봤다. 이대로만 되면 클리블랜드 못지 않을 것 같다.
가장 기록하고 싶은 장소는 옛 극장이었다. 킬러 콘텐츠는 옛날 영화 간판이 걸린 극장들 사진이었다. 애마부인이나 별들의 고향, 벤허나 타워링 정도의 영화 간판이 걸려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어디서 찾지? 클리블랜드는 지역의 역사협회나 취미 역사가들이 이미 연구를 많이 해 놔서 발품만 팔면 됐다는데 서울의 기록은 생각만큼 없었다. 네이버 블로그에 많이 언급되는 오스카극장, 답십리극장, 대왕극장 정도를 찾아봤는데 그 어디서도 원하는 사진 한 장 나오질 않았다. 구청 소장기록을 검색하면 주로 공사나 인허가 서류만 나왔다. 옛 극장 터라도 찍어볼 생각으로 카메라 들고 무작정 오스카 극장을 찾아 나섰다. 옛 주소와 블로그의 설명을 따라 여기저기 둘러봐도 여기가 극장 자리라는 확신이 가지 않았다. 지번 체계도 바뀌고 재개발로 풍경이 바뀌어 대략의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일 유명한 극장들인데 사진 하나 없다니. 우리 나라가 가난해서 카메라가 없었나? 도무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결국 그 흔한 극장 정면사진 하나 없이 옛 극장 아카이빙을 마무리했다. 수집한 기록은 KTV에서 찾은 극장 입장권 복권 추첨 영상(1962),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사진아카이브, 경향신문의 협조로 얻은 사진과 구청에서 찾은 극장 인허가 서류 정도였다. 오스카 극장 미술실에서 근무하셨던 김영준 간판화가의 아파트까지 찾아가 얻어 온 개인 사진과 인터뷰를 곁들여 빈곤한 기록을 채웠다.
한 장소 기록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상했던 기록은 하나도 없었고 조금 관련 있는 기록이라도 하나 나오면 다행이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수집전략은 현실에선 통하지 않았다. 구청에서 만드는 서비스인 만큼 내용의 정확성이나 중립성도 중요했다. 옛 뉴스 기사와 논문을 읽고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싸그리 대출하여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내용을 인용했다. 요즘처럼 챗지피티나 클로드가 글쓰기를 도와 주지도 않으니 글짓기 능력도 필요했다. 클리블랜드 히스토리컬의 A4 한 장을 넘기지 않는 적당한 텍스트 분량과 사실적이지만 정감 있는 문체를 따라 했다. 이런 식으로 스무 곳을 기록하려면 반 년은 걸릴 것 같다. 그래도 어쩌랴. 연구원 식구들의 풍족한 노후를 위해 나는 오늘도 아이폰과 녹음기를 들고 서울의 시장과 골목을 누빈다.
Reference
- Madison Matuszak, “Little Ted's Restaurant and Bar,” Cleveland Historical , 2025년 9월 2일 접속,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979.
- Savannah Shaver, “Adele's Lounge Bar,” Cleveland Historical , 2025년 9월 3일 접속,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984.
- Jim Dubelko, “Kilbane Town,” Cleveland Historical, accessed September 3, 2025,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288.
- Jim Dubelko, “Boxing in the Old Angle Neighborhood,” Cleveland Historical, accessed September 3, 2025,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750.
- Chris Roy, “Jim's Steak House,” Cleveland Historical , 2025년 9월 3일 접속,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910.
- Jim Dubelko, “Isabella Brothers Bakery,” Cleveland Historical, accessed September 3, 2025,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729.
- Jim Dubelko, “Fridrich Bicycle,” Cleveland Historical, accessed September 3, 2025, https://clevelandhistorical.org/items/show/964.
- 동대문구의 옛 극장들 - https://memory.ddm.go.kr/items/show/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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