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인들이 뿔났다.
시작은 오픈 채팅방이었다. 국가기록원이 폐기금지 공문을 형식적으로 발송하고, 지난 여름 공수처가 요청한 '채상병 기록'의 폐기금지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며칠 전부터 국무회의 회의록과 속기록이 있네 없네...'국정 기록'의 생산과 관리를 요청하던 목소리가 커지던 참이었다.
이거 1인 시위라도 해야 하는건 아니냐고, 근조화환을 보내는 건 어떻냐고 단톡방이 붐비기 시작했다. 근조화환을 보내자는 의견이 모였다. 누구는 근조화환에 들어갈 문구를 정리하고, 누구는 경찰서에 전화해 근조화환 시위 방법을 알아봤다. 누구는 언론사에 제보해서 기자를 섭외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누구'라고 칭한다. 순식간에 모인 백여명의 '누구들'은 결정도 실행도 빨랐다. 당장 내일 근조화환을 대전정부청사로 보낸다. 그 사이 MBC 취재를 섭외했고, JTBC도 취재를 온다고 한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업계의 문제를 언론사에 공익제보하고 인터뷰까지 하는 일에는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공공기관에서 혼자 일하는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인데 그런 결정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큰 일이다. 그런데 단톡방 메시지는 따라 읽기 어려울 정도로 수북히 쌓였다. 다들 이런 걸 원했나. 사소하지만 용기를 내고 제 목소리를 내는 일.
화환 리본에 넣을 문구도 여럿이 제안했다. 너무 비아냥거리진 말자고. 전문가답게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비판하자고. 직업 윤리는 이런 곳에서도 빛을 낸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자존을 지키며 꾸짖는 일에도 직업 윤리는 필요하다.
- 1. 계엄 관련 기록 폐기 금지 조치를 시행하라
- 2. 2024.12.10. 국가기록관리 사망선고
- 3. 국가기록원은 긴급폐기 금지조치를 발동하라.
- 4. 국민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줘서 감사합니다
- 5. 국가기록관리 사망
- 6. 기록인으로서 사명을 이행하라
- 7. 기록은 국민의 것이다
- 8. 국가기록원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9. 국가기록원은 역사를 수호하라
- 10. 방조도 범죄다
- 11. 공공기록법은 공공기관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
그 사이 기록관리단체협의회가 성명서를 발표했다. 반헌법적 비상계엄의 증거인 기록이 사라지고 있다.
시위를 준비한 사람들은 짧은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이 시위에 동의하는 사람은 각자 근조화환을 발주하고 대전정부청사로 배송한다. 문구는 위에서 골라쓰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다. 문구의 가독성을 고려하고 배송시간을 당부하여 근조화환이 동시에 모이는 풍경을 만들어보자. 조언과 팁을 서로 주고 받으며 단톡이 집단의 행동이 되었다.
그리고 12월 11일 아침. 출근 시간을 전후하여 단톡방에 근조화환 배달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청사 내로 들어가려는데 경비실에서 막는다, 그런 다른 입구는 어떤가, 정부청사역 4번 출구도 좋다, 청사 앞 공원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 카톡은 다급한 무전처럼 오갔다. 청사 안에 3개, 청사 앞 공원에 40개의 근조화환이 세워졌다.
속속 배달되는 근조화환 인증샷에 모두들 놀라워했다. 뉴스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는데 저걸 내가 한 거라고? 모든 화환이 청사 진입에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뭐 어떤가. 단톡방에서 근조화환 시위 준비를 지켜보던(?) 국가기록원 직원도 이런 광경이 놀라웠을 것이다.(점심먹으러 가는 길에 애써 외면하고 싶었겠지만)
MBC와 JTBC 등의 취재가 오후, 저녁부터 보도되기 시작했다. 저녁 정규 뉴스에 우리가 보낸 근조화환 뉴스가 나온다. 와.
옛날로 치면 사관 역할인데"…국가기록원 빽빽이 '근조화환' 왜
십수년 전에는 사관복을 입고 제법 진지하게 여럿이 모여 시위를 했다. 2010년의 일이다.
역사 없애는 행위 중단하라
청와대 앞에서 사관복입고 1인시위 했습니다.
모이는 형식과 시위의 방법은 달라졌지만 마음은 비슷했을 것이다. 공무원으로만 살지 말고,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하지 말고, 아키비스트 윤리 강령에서 읽은 것처럼 제 목소리를 내라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윤석열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이 정부는 막을 내린다. 대통령기록관은 이 정부가 남긴 기록의 이관을 시작할 것이다. 부디 깡통 상자를 이관하지 않길 바란다. 다음은 대통령기록관 차례가 될 수도 있다.
국가기록원은 대체 왜 그럴까, 라고 말하면 억울하고 섭섭한 국가기록원 직원 누군가는 있을 것이다. 조직은 곧 개별 직원이 아닌데, 직원은 조직의 모든 결정에 동의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직업 윤리는 그럴 때 필요하지 않을까. 단톡방에서 누군가 그랬다. 왜 국가기록원에 가면 기록연구직이 다들 행정주사처럼 구는지 모르겠다고. 직업 윤리를 상기하여 누군가 조직의 어떤 나른한 결정에 균열을 냈더라면, 그 균열이 점점 커져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우리는 굳이 모여 근조화환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날 밤, 국회 전산 담당 공무원과 IT 업체 직원 몇명은 국회 담벼락을 넘었고, 지하 비상 통로로 국회에 진입했다고 한다. 그들의 목표는 국회 전자 표결 시스템의 정상 작동이었다. 그들은 전기 코드를 지켰고 표결 시스템은 작동했다. 그리고 비상계엄은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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