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만 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황동만님은 12월부터는 고정적으로 글을 쓸 예정입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동만 님의 지난 글 "어느 포켓몬 덕후의 조금 울컥하고, 많이 다정한 기록"
어떤 사람이 바닥에 드러누워, 치켜든 두 발을 물고기 꼬리처럼 파닥이고 있었다. 요즘 내가 가장 여러 번 돌려 본 영상이다. 뜻밖에도 어느 박물관 행사였고, 그 사람은 그날 대상을 차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분장놀이’ 행사. 사람들이 박물관 유물로 분장하고 나와 런웨이를 걷는 대회다. 반가사유상이 스스로 빙글빙글 돌고, 간돌검이 당당히 걸어 나오고, 대한제국 국새 ‘제고지보’가 “국중 밖은 위험해”라는 팻말을 들고 나와 아직 해외에 남아 돌아오지 못한 다른 문화유산들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는 전국으로 판이 커져 275개 팀, 643명이 참가했고, 오가다 발걸음을 멈춘 사람까지 더해 3천 명가량이 결선을 지켜봤다고 한다.[1]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영상에 달린 댓글에는, 전문 분장 팀이나 값비싼 소품으로 중무장한 사람이 아니라 어딘가 어설프고 수수한 참가자가 대상을 받아 더 좋았다는 말이 많았다. 나도 꼭 같은 마음으로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분장놀이 대상의 주인공은 대학생 전은슬 씨였고, 분장한 유물은 '백자 청화 잉어모양 연적'. 벼루에 물을 따르던 작은 문방구로, 거센 물살을 거슬러 용문(龍門)에 오른 잉어가 마침내 용이 된다는 옛이야기를 형상화한 유물이다.[2] 온몸을 파랗고 희게 칠하고 비늘을 그린 그는, 누운 채로 발끝을 파닥여 물 위로 솟구치는 잉어의 꼬리를 만들어 냈다. 누운 채로 뛰어오르는 잉어라니.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그는 유물을 흉내 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라는 물살 앞에 서서 우울하기도 했다는 스물두 살의 그는, "나답게 획을 긋는 도전을 해보고 싶어" 하필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잉어를 골랐다. 수백 년 전 어느 선비의 책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을 연적이 2026년 한 취업 준비생의 몸을 빌려 다시 한번 물 위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잉어는 더 이상 도자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간절함이었다.
처음엔 의아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의상도, 소름 돋는 디테일로 무장한 전문 팀도 많았는데, 왜 간호학과 학생이었을까. 알고 보니 이 대회의 심사 기준에는 '참가 동기'라는 항목이 있었다. 얼마나 그럴듯한 지보다, 참가자의 진심을 묻는 질문이 마련되어 있던 것이다. 기획자의 말도 같은 곳을 가리켰다. 이 행사는 문화유산 복원 대회가 아니어서, 완벽하게 똑같이 만드는 것을 유일한 기준으로 두지 않는다고 했다. 유물의 이름과 기본 정보만 틀리지 않으면, 그다음은 저마다의 해석에 맡긴다는 것이다.[3] 그 오래된 물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길어 올린 것이 전은슬 씨가 대상을 받은 이유였다.
유홍준 관장은 결선 현장의 광경을 두고, "전시장 안에 갇힌 유물이 현재에 살아나온 것"이라고 했다.[4] 유물이든 기록이든, 누군가 다시 꺼내어 오늘날 우리의 삶과 포갤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기록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나는 그 당연한 말을, 발끝을 파닥이는 잉어 한 마리를 보고서야 새삼 실감했다. 알고 있다고 믿는 것과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은 역시 같지 않았다.
이 분장 덕분에 벌어진 일이 하나 더 있다. 그 잉어 연적은 고 이건희 회장과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하나였다. 기증된 뒤로 줄곧 수장고에 있다가, 이번 분장놀이로 관심이 쏠리자 처음으로 전시장에 나와 관람객을 만나게 되었다.[5] 흉내가 진짜를 불러낸 셈이다.
행사가 하도 반가워서, 다른 곳들은 어떤가 한참을 찾아보았다. 바다 건너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미국 게티 미술관은 코로나로 모두가 집에 머물던 시절, 집에 있는 물건 세 가지로 좋아하는 명화를 재현해 보라고 사람들을 불러냈다.[6] 수건을 두르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휴지를 감아 중세의 드레스를 지어 입은 귀부인이 전 세계에서 쏟아졌다.
기록을 다루는 곳들도 다르지 않았다. 미국 국립기록관과 국립공원청은 독립 250주년을 앞두고, 혁명전쟁에 참전한 이들과 그 미망인이 남긴 연금 기록을 시민들이 한 글자씩 옮겨 적는 프로젝트를 함께 벌이고 있다. 아무도 읽지 못하면 그저 낡은 종이일 뿐인 옛 손글씨가, 자원봉사자들의 손끝을 거쳐 비로소 읽히는 기록으로 되살아나고 있다.[7] 서울기록원은 ‘기록의 날’에 “별걸 다 기록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저마다의 엉뚱한 수집물과 빛바랜 일기를 꺼내 보이게 했다.[8] 대단한 기록이 아니어도, 꺼내어 나누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에게 가닿는 기록이 된다.
유물을 몸으로 입든, 명화를 흉내 내든, 기록을 옮겨 적든, 손짓은 저마다 달랐지만 향하는 곳은 같았다. 과거에 고여 있던 시간을 기어이 내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분장놀이의 열기는 유난했다. 상금이 걸렸다고는 해도, 바닥에 눕고 발을 파닥이고 온몸에 비늘을 그려 가며 기어이 유물이 되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라니. 그 광경이 나는 두고두고 흐뭇했다.
취업이라는 물살 앞에 선 한 학생이 유물 하나에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 기꺼이 잉어가 되자, 수백 년 묵은 도자기는 비로소 오늘의 이야기가 되었다. 수장고에서 유물을 깨워 잉어를 뛰어오르게 한 것은 학예사나 아키비스트의 손길도 아니었다. 그 앞에서 기꺼이 잉어가 되어 준 사람과, 돌계단에 앉아 분장놀이 결선 장면을 함께 즐겨준 사람들이었다.
기록을 다뤄 온 사람으로서 이보다 신기한 풍경도 드물다. 오래 잘 지켜 온 것을 끝내 세상 밖으로 꺼낸 힘이 다름 아닌 참가자의 진심과 대중의 환호였으니까. 전문가의 손길로 정성껏 보존되면서도 좀처럼 수장고 문을 나설 기회가 없던 유물이, 사람들의 흐뭇한 웃음 덕에 끝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잉어가 용이 되어 처음으로 수장고 밖에 나온 모습을, 전시가 끝나는 10월 22일 전에 서둘러 두 눈으로 담아두어야겠다.
[1] "박물관 유물이 살아났다"…국중박 분장놀이 대상은 '잉어 연적', 데일리안, 2026.9.20. https://www.dailian.co.kr/news/view/1692633
[2] '국중박 분장놀이' 대상 받은 '용 된 잉어' 원작 공개한다, 세계일보, 2026.9.23. https://www.segye.com/newsView/20260923509320
[3] 4시간 홀린 국중박 분장놀이, 잉어연적이 대상 받은 까닭, 오마이뉴스, 2026.9.24.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70126
[4] 주 1과 동일.
[5] 잉어 모양 백자 연적, 이건희 컬렉션 첫 공개, 스페셜타임스, 2026.9.28. https://www.special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8014
[6] The world's most famous works – created with everyday household items, CNN, 2020. 게티 미술관 챌린지(#gettymuseumchallenge)는 네덜란드 인스타그램 계정 'Tussen Kunst & Quarantaine'에서 영감을 받았다. https://www.cnn.com/style/article/getty-museum-challenge-art/index.html
[7] Revolutionary War Pension Project, 미국 국립공원청(NPS)·국립기록관(NARA), 2023. 독립 250주년을 앞두고 2023년 6월 시작된 공동 전사 프로젝트로, NARA의 시민 참여 프로그램 '시민 아키비스트(Citizen Archivist)' 자원봉사자들이 혁명전쟁 참전자와 미망인의 연금 기록을 옮겨 적고 있다. 지금까지 4천여 명이 8만여 쪽을 전사했다. https://www.nps.gov/subjects/americanrevolution/revolutionary-war-pension-project.htm ; https://www.archives.gov/citizen-archivist
[8]: 기록의 날 기념 이벤트: 별걸 다 기록하는 사람들, 서울기록원, 2025. 시민이 일상의 기록·수집물·오래된 일기 등을 공유하도록 한 참여 행사다. https://archives.seoul.go.kr/exhibitions-programs/event/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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