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대화가 한 편의 글로 이어졌다. 미술을 전공한 '설리반'과 도시를 전공한 '이대로'가 산업 고고학을 바라보는 시선을 교차시켰다.
베른트 베허(Bernd Becher, 1931–2007)와 힐라 베허(Hilla Becher, 1934–2015)는 유형학(typology)의 방식을 통해 독일을 중심으로 냉각탑, 석탄 세척장, 공장 굴뚝 등 산업 건축물을 기록했다.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공통의 관심사 속에서 협업을 시작했고, 결혼 후 본격적으로 유형을 기반으로 한 사진 기법을 발전시켜 작업을 이어갔다.
산업 건축물은 행정 문서나 도면으로도 기록될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요인에 따라 그 형태와 존재가 급격히 변화하거나 소멸할 위험이 크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베허 부부의 결과물은 단순한 사진 작품을 넘어, 사라지는 건축물을 기록하는 중요한 방법이자 특정 시대의 사회 맥락을 반영한 아카이브로 기능한다. 이들은 산업 건축물을 단발성으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유사한 구조물을 지속하여 기록하고 이를 지역과 형태별로 분류했다.
베허 부부는 산업 유산을 촬영하며 몇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산업 시설을 개별 구조물이 아닌 연구할 대상으로 파악했고, 이를 일관된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첫째, 촬영 방식과 구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건축물의 왜곡을 최소화하고 구조와 형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동일한 거리와 각도로 대상을 촬영했다. 둘째, 조명과 날씨 조건을 통제했다. 극적인 그림자와 강렬한 명암 대비를 피하고, 가능한 흐린 날이나 직사광선이 적은 환경을 선택함으로써 사진가의 감성적인 요소를 배제해 건축물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셋째, 대상을 흑백으로 촬영했다. 색채가 주는 요소를 제거해 산업 시설의 구조를 강조하고, 비슷한 형태를 반복함으로써 특정한 패턴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배열 방식은 각 건축물의 미세한 차이를 강조하는 동시에, 산업 건축의 특성을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베허 부부는 같은 기능을 지닌 건축물을 유형학으로 배열할 뿐 아니라, 각 대상을 온전히 기록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가며 주요 방향에서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근대문화유산 기록화 지침서』(문화재청, 2004)에 따르면, 건축물을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크게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여 촬영한다. 외부의 경우, 건물의 원경(주변 환경과 인접한 건물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찍은 일반적인 건물 뷰), 전경, 4면 입면(정면·후면·양 측면), 지붕면, 상세 부분(주 출입구, 특수창, 지붕, 특이한 장식물 등)을 담아야 한다. 위 사진은 이 중 건물의 전경과 4면 입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한 프레임에 해당 건축물·구조물만을 꽉 채워 촬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베허 부부의 사진은 건축물을 단순히 기능을 지닌 구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형성을 지닌 역사 대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기록했다.
베허 부부는 같은 용도의 산업 시설물을 촬영하면서 형태에 있어 규칙성과 변주를 고수했다. 예를 들면, 위의 사진은 권양탑을 촬영한 것으로, 거의 유사한 외관을 배열한 경우이다.
권양탑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역할을 하는 구조물로, 탄광, 수력발전소, 항만, 건설현장 등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베허 부부가 촬영한 권양탑은 주로 탄광 권양탑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광부와 광석을 지하갱도와 지상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상부는 지지 프레임(Supporting Frame)으로 와이어 로프와 도르래 시스템을 지지하는 구조, 하부는 권양탑 본체로 철골 또는 철근 콘크리트로 제작된 탑 구조물로 권양기가 내부에 설치되어 있다. 직각삼각형 형태의 권양탑은 수직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구조이며, 사각형 형태보다 경제적으로 제작가능하며 설치 및 해체가 비교적 용이하다. 위 9개의 사진 모두 도르래의 원이 정면으로 보이는 뷰로 촬영되었다. 크게 보면 직각삼각형 형태의 권양탑이지만, 자세히 보면 각기 미묘하게 다른 형태와 규모의 도르래와 이를 지지하는 상부구조의 모습과 철골·콘크리트 재질, 직사각·사다리꼴·직삼각형 등의 다양한 하부구조를 구별해볼 수 있다.
이처럼 베허 부부는 특정 산업 시설이 일정한 시대와 기술 조건 아래에서 나타난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고자 같은 유형의 건축물을 반복해서 기록했다. 권양탑 외에도 독일과 벨기에의 수많은 냉각탑, 가스 저장소, 석탄 세척 시설 등을 동일한 구도로 촬영하고 배치해 산업 건축이 기능의 필요에 의해 표준화되는 경향을 강조했다. 이런 방식은 산업 시설을 단순한 개별 구조물을 넘어 공통된 속성을 지닌 집합체로 바라보게 유도하고, 특정 시대와 기술 환경이 건축 형태에 미치는 영향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사례로 같은 용도의 산업 시설물이지만, 전혀 다른 외관을 촬영한 경우도 있다. 위의 사진은 급수탑을 촬영한 것이다.
급수탑은 물을 높은 곳에 저장하고, 중력을 이용해 일정한 수압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상수도 시스템, 산업용, 철도, 군사기지 등 다방면에서 사용된다. 구조 형태에 따라 독립형(Self-Supported), 지지형(Supported, Truss Type), 건물일체형(Integrated, Rooftop Type)으로 구분된다. 위 사진은 지면에서 바로 세워진 기둥형 구조인 ‘독립형’과 철골 트러스 또는 콘크리트 기둥으로 지지되는 구조로 물탱크를 더 높은 위치에 설치가능한 ‘지지형’ 구조이다. 철도용 급수탑의 경우, 상하부로 나뉘며 상부는 물탱크, 하부는 물을 끓이기 위한 엔진과 물 공급을 위한 펌프를 갖추고 있다. 베허 부부의 사진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물탱크를 포함한 상단부와 각기 다른 하부기둥·트러스·내부실 구조의 하단부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해볼 수 있다.
베허 부부는 같은 기능의 시설물이라도 지역과 환경, 건축 자재, 시대 배경에 따른 외관의 다름을 드러내기 위한 배치방식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산업 시설이 획일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각 지역의 경제와 사회, 기술의 요인에 맞추어 변화하는 건축 산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베른트 베허와 힐라 베허의 사진은 건축 기록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학제적 가치를 지닌다. 미학적으로는 건축물이 지닌 기하학의 패턴과 질서를 고찰하는 시선을 드러낸다. 기록학적으로 사라져가는 건축물을 구조와 특성에 따라 분류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산업 고고학적으로는 급격한 산업화와 탈산업화 과정에서 철거된 산업 유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 가치를 내재한다. 이처럼 산업화의 유산을 유형학의 방식으로 구축한 베허 부부의 사진은, 시대와 사회 맥락을 반영하는 시각 아카이브로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베허 부부는 사진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서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토마스 루프(Thomas Ruff),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 등 후속 세대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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