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기록은 말이 없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2003년 4월, 바그다드 함락 직후 이라크 국립도서관·보존기록관(Iraqi National Library and Archive)이 불탔다. 4월 10일과 12~13일, 이틀에 걸친 약탈과 방화로 군주제 시기(1920~1958) 문서 45만 점, 오스만 시대 행정 기록, 왕정 시대 기록의 60% 이상이 사라졌다(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2003; The Nation, 2008). 조직적 방화의 흔적이 있었지만, 약탈인지 의도적 증거 인멸인지 연합군 폭격의 여파인지, 진상은 지금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Wikipedia, 2026a; Moving Stories, 2024).
이러한 현상에 우린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른바 "아카이브사이드(Archivecide)".
아카이브 침묵 vs. 아카이브사이드
먼저, '침묵'과 '말살'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아카이브사이드를 정의하기 전에 혼동하기 쉬운 개념 하나를 먼저 짚어보자. 아카이브 침묵(Archival Silence)과 아카이브사이드.
아카이브 침묵은 기록이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거나, 구조적으로 배제되면서 생겨나는 공백이다. 역사 속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목소리가 기록에 남지 않았던 것, 식민지 피지배민의 일상이 지배자의 언어로만 남겨진 것, 구술 문화를 가진 공동체가 문자 중심 아카이브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 이런 현상을 우린 '아카이브 침묵'의 관점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의도적 파괴를 포함한 기록 체계 자체에 내재된 편향과 누락의 문제다.
아카이브사이드는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기록을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없애는 행위다.
침묵이 "처음부터 목소리를 주지 않은 것"이라면, 아카이브사이드는 "이미 말하고 있던 것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둘 다 기록의 부재를 낳지만, 그 메커니즘과 책임의 소재는 다르다. 이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말살에는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으면 개념도 없다"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대학교의 밥 보부타카(Bob Bobutaka) 교수가 처음 제안한 이 개념은, 단순히 책이 불타거나 서버가 해킹당하는 사고를 가리키지 않는다. 정의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반란·전쟁·영토 점령, 또는 한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변조·말살하기 위해 행정 단위나 가족 공동체의 핵심 문서와 그 수호자들을 계획적으로 제거하는 행위"
핵심은 '계획적'이라는 단어다. 어쩌다 전쟁의 불똥이 튄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를 갖고 기록을 겨냥했다는 것.
여기서 표기 문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보부타카가 언급한 단어는 정확히는 'archivocide'로, genocide(genos+o+cide)의 그리스어 연결 모음 패턴을 따른 형태(어원적으로 정합성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cide' 계열 용어의 역사를 보면 어원적 엄밀함이 표기를 결정해 온 것은 아니다. 'memoricide'는 라틴어 'memoria'에서 왔지만 'memocide'라는 축약형도 학술 문헌에서 함께 통용된다. 중요한 것은 어원 규칙의 준수가 아니라 학술 공동체의 수용과 개념의 명료한 전달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보부타카의 최초 제안과 그 어원적 논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archivecide'라는 표기를 택했다. 'archive'라는 단어가 현대 기록학의 학술 언어 체계 내에서 이미 독립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고, 여기에 '-cide'를 결합한 'archivecide'가 그 개념을 가장 직관적으로 전달한다고 보았기에 이를 개념어로 정의하고자 한다. 표기는 어원의 문제이기 이전에 소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cide'라는 접미사의 계보
더불어, 이 개념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접미사 '-cide'의 역사를 잠깐 짚어볼 필요가 있다. 라틴어 'caedere'(죽이다)에서 온 이 접미사는 원래 'homicide'(살인), 'suicide'(자살) 정도에만 쓰였다.
분기점은 1944년이었다. 폴란드 출신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ël Lemkin)이 'genocide'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연구하면서, 기존 어휘로는 이 범죄의 성격을 담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관점에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New conceptions require new terms)"(Lemkin, 1944).
렘킨의 전례 이후 '-cide'는 여러 개념들과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 개념 | 어원 조합 | 파괴 대상 |
|---|---|---|
| 제노사이드(Genocide) | 그리스어 genos(종족) + cide | 민족·집단 |
| 도미사이드(Domicide) | 라틴어 domus(집) + cide | 주거 공간 |
| 메모리사이드(Memoricide) | 라틴어 memoria(기억) + cide | 기억 |
| 라이브러사이드/리브리사이드(Libricide) | 라틴어 liber(책) + cide | 도서관·서적 |
아카이브사이드는 이 계보를 잇는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은밀한 형태로 그 계보를 잇는다.
학술 개념으로 정의하려면,
아카이브사이드를 단순한 비유어가 아닌 학술 개념으로 쓰려면 좀더 정밀한 조작적 정의가 필요하다. 필자들은 각종 사례를 훑어보며 이 개념 안에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 의도성: 자연재해나 전시 등 부수적 피해와 구별되는 계획적 행위
- 체계성: 산발적 파괴가 아닌 조직적·반복적 말살
- 특정성: 물리적 서적이나 문화적 기억이 아닌, 존재 증명의 근거가 되는 기록 체계
- 목적성: 특정 집단의 역사적 존재·권리·주권의 증거를 지우려는 의도
이 네 요소를 갖췄을 때, 우리는 단순한 '기록 손실'과 '역사 말살의 도구로서의 기록 파괴'를 구별할 수 있다.
역사 속 아카이브사이드
역사 속에서 아카이브사이드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국 식민지 시대: 영국은 1950~60년대 케냐 독립운동(마우마우 봉기) 관련 기록을 조직적으로 파기하거나 런던 근교 한슬로프 파크(Hanslope Park)의 고보안 시설로 빼돌렸다. 당시 식민지 당국의 내부 지침에는 소각, 산성 처리, 해양 투기 등 다양한 파기 방법이 명시돼 있었다. 이러한 '이주 아카이브(migrated archives)'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2011년, 마우마우 생존자들이 영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였다. 영국 정부는 그 전까지 관련 기록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Anderson, 2015; Wikipedia, 2026c).
1992년 사라예보: 1992년 8월 25~26일 밤, 포위된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군대(VRS)가 국립대학도서관(Vijećnica)에 소이탄을 퍼부었다. 유엔과 독립 법의학 조사에 따르면 포탄 100발 이상이 집중 투하된 계획적 공격이었다. 화재로 약 150만~200만 권의 도서와 15만5천 점 이상의 희귀본과 필사본이 소실됐으며, UNESCO는 이를 "유럽의 문화적 재앙"으로 규정했다(UNESCO, 1994; Wikipedia, 2026b).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기억의 창고를 겨냥한 포격이었다.
IS(이슬람국가) 사례: 2013~2019년 IS는 이라크·시리아 점령 지역에서 기록을 포함해 박물관과 유적지를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UNESCO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는 이를 "전례 없이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나 IS는 동시에 자신들의 선전 영상을 꼼꼼히 아카이빙해 전 세계에 배포했다.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길지, 그 선택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였다(Stein, 2022; UNESCO/Foreign Policy, 2017).
한국은 예외일까?
여기서 글을 끝내면 편하다. 아카이브사이드는 한반도 외부의 전쟁터나 독재 정권의 이야기처럼 들리니까. 하지만 한국의 최근 풍경을 잠깐 들여다보자.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이 선포됐다가 국회에 의해 6시간 만에 해제됐다. 그 짧은 혼란의 시간 이후, 기록학계가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계엄 선포 과정에서의 의사결정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는지, 국가안보실 회의록과 군 지휘계통의 주요 문서, 대통령실 내부 검토 자료들이 법적 절차에 따라 등록되고 보존되었는지, 수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관련 기록에 대한 접근과 보존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지 등등.
이런 질문들이 제기된 데는 이유가 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 및 발포 관련 기록이 없어 진상규명에 지금까지 난점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형제복지원 사건은 수용자와 사망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부재하여 피해 규모 자체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역대 정권마다 퇴임을 전후해 대통령 기록물 관리를 둘러싼 논란이 반복됐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관련 기록은 지속적인 공개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째 열람되지 않고 있다.
총성도, 화염도 없다. 하지만 기록이 사라지거나, 접근이 막히거나, 분류가 조정될 때 그 효과는 포격과 다르지 않다. 아카이브사이드는 한국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그 형태가 불길이 아니라 행정 언어와 비밀이라는 외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아카이브사이드라는 개념이 가진 힘은 이 불편한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 기록의 파괴가 언제 단순한 행정 실수를 넘어 말살의 도구가 되는가? 그 경계를 묻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아카이브 침묵이 '구조'의 문제라면, 아카이브사이드는 '의도'의 문제다. 그리고 의도에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기록전문직이 이 개념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은 밥 보부타카 교수가 처음 제안한 개념을 바탕으로 설리반과 rEdbEaN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카이브사이드 개념의 학술적 정립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관련 사례 연구를 통해 학술논문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현재 후속 작업을 진행 중임을 밝힌다.
참고문헌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2003, September). Iraq's lost cultural heritage. Perspectives on History. https://www.historians.org/research-and-publications/perspectives-on-history/september-2003/iraqs-lost-cultural-heritage
Anderson, D. M. (2015). Guilty secrets: Deceit, denial, and the discovery of Kenya's "Migrated Archive." History Workshop Journal, 80(1), 142–160. https://doi.org/10.1093/hwj/dbv027
Schwartz, J. M., & Cook, T. (2002). Archives, records, and power: The making of modern memory. Archival Science, 2(1–2), 1–19. https://doi.org/10.1007/BF02435628
Stein, G. (2022). Performative destruction: Da'esh (ISIS) ideology and the war on heritage in Iraq. In Cultural heritage and mass atrocities. Getty Publications. https://www.getty.edu/publications/cultural-heritage-mass-atrocities/part-2/09-stein/
The Nation. (2008). Iraq's ruined library soldiers on. https://www.thenation.com/article/archive/iraqs-ruined-library-soldiers/
UNESCO. (1994). The National and University Library of Bosnia and Herzegovina. UNESCO Multimedia Archives. https://www.unesco.org/archives/multimedia/document-215-eng-2
UNESCO/Foreign Policy. (2017, April 12). UNESCO fights back as ISIS tries to stamp out culture. Foreign Policy. https://foreignpolicy.com/2017/04/12/unesco-united-nations-isis-islamic-state-cultural-antiquities-trade-irina-bokova-refugees-heritage/
Wikipedia. (2026a, January 22). Iraq National Library and Archive. https://en.wikipedia.org/wiki/Iraq_National_Library_and_Archive
Wikipedia. (2026b, February 23). National and University Library of Bosnia and Herzegovina. https://en.wikipedia.org/wiki/National_and_University_Library_of_Bosnia_and_Herzegovina
Wikipedia. (2026c, March 30). 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 migrated archives. https://en.wikipedia.org/wiki/Foreign_and_Commonwealth_Office_migrated_archives
Lemkin, R. (1944). Axis Rule in Occupied Europe: Laws of Occupation, Analysis of Government, Proposals for Redress.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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