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질서
작년 가을, 나는 새로운 질서라는 이름의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했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이 수업은, 웹이 이미 일상이 된 오늘날 웹과 웹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을 현대인의 새로운 소양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웹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들어볼 수 있다고 제안하는, 대담하면서도 실천적인 교육이었다.
수업은 6주 동안 진행되었다. 웹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고, HTML·CSS·JS와 같은 웹의 언어를 배우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웹페이지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마지막 주에는 각자의 결과를 서로 보여주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웹을 기획하는 일을 하지만, 정작 내 페이지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는 선뜻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질서를 듣는 동안, 왠지 모르게 동료 아키비스트들과 함께할 웹 교육이 떠올랐다. 마지막 주 그 자리에서 웹 교육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것이 내가 교육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동료 아키비스트들이 개발자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웹의 언어를 읽고 써보며, 자신의 기록이 어떤 구조와 언어 위에 놓이는지 감각해보는 교육을 구상한 것이다. 한편, 교육은 웹을 기록이 놓이는 환경으로 이해해보자는 제안이기도 했다. 웹은 문서를 연결하고, 정보를 구조화하고,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거나 남는다. 그런 점에서 웹은 이미 아카이브의 질문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기록을 남기고, 설명하고, 분류하고, 다시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일. 아키비스트에게 익숙한 이 질문들은 웹의 언어 안에서도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이 고민은 아키위키와 동료 아키비스트들과의 대화를 거치며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아키위키에서 개념과 사례를 모으고 엮어가던 일은, 각자의 작은 웹에 기록을 쌓고 연결하는 일과 닮아 있었다. 웹은 낯설어도, 기록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새로운 질서에서 받은 감각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계속 생각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기 전, 교육 구상을 미리 나누었던 아키위키와 동료 아키비스트 분들을 대상으로 ‘시즌 0’이라 부른 베타 버전의 교육을 진행했다. 새롭게 구성한 커리큘럼이 실제로 너무 어렵지는 않은지, 과제의 난이도는 적절한지, 참여자들이 자기소개를 직접 웹에 올릴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시간이었다. 이때 구성한 커리큘럼의 뼈대는 이후 ‘시즌 1’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이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기록전문가협회와 함께 이 교육을 2026년 협회 공식 교육 프로그램으로 제안했다. 4월에는 협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커리큘럼을 압축한 짧은 시범 프로그램을 거쳤고, 5월에는 2026 Archivist PLUS 과정으로 〈아키비스트는 웹을 꿈꾸는가〉 시즌 1을 진행했다.
돌아보면 작년 가을의 호기심은 겨울의 시험과 봄의 협력을 거쳐, 한 시즌의 교실이 되었다. 새로운 질서에서 출발했지만, 아카이브의 언어로 다시 읽고 아키비스트의 질문으로 재구성한 교육이었다.
우연히 들어섰던 웹 기획자의 길
돌아보면 우연과 필연이 마구 섞여 있다. 기록관리 석사를 마치던 해, 나는 웹과 브랜딩을 하던 에이전시에 들어갔다. 내가 속한 팀 이름은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줄여서 ‘DA’였다. 팀의 목적은 아카이브적 성격을 가진 웹사이트 제작에 특화해보겠다는 시도였고, 막 기록관리전공 석사를 마친 나를 통해 그 전문성을 보강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팀은, 내가 입사한 지 여섯 달 만에 해체되었다. 나에게는 새로운 직무가 필요해졌다.
웹 에이전시의 직무는 크게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로 나뉜다. 나는 디자인도 개발도 할 수 없었으니, 말과 글로 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되었다. 신입 기획자로 다양한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에 참여하며 실무를 익혔다. 이후 한 번 이직했고, 지금까지 같은 일을 이어가고 있다. 웹의 세계는 넓고 아득해서 개발자들에게 어깨 너머로 듣고, 필요할 때마다 책과 웹 문서와 자격증 공부로 지식을 주워 모았다.
명함에는 ‘아키비스트’라고 적었다. 아카이브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록학을 전공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기록학은 종이 기록의 시대에, 조직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일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다. 아카이브는 일의 결과로 남은 기록을 의미 있는 배열로 모아두는 공간이다. 그 공간이 종이 시대에는 서고였다면, 지금은 서버와 웹으로 옮겨가고 있다. 나는 서고가 있는 아카이브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데이터가 쌓인 서버 위에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일을 해온 셈이다.
일반적인 기관의 웹사이트는 조직을 소개하고, 정보를 안내하며, 때때로 신청·승인 절차가 진행된다. 이러한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웹 기획자는 조직이 어떤 일을 어떤 절차로 수행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말과 글로 정의한다. 아카이브가 행위의 결과를 모으기 위해 기록이 생산되는 조직의 업무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이 일은 전공과 실무 사이의 우회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생각보면 나는 계속 비슷한 질문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설명할 것인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찾을 수 있게 할 것인가. 식별, 기술, 분류, 접근이라 불렸던 질문을, 나는 웹 기획이라는 다른 언어로 계속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육은 나에게 새로운 분야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회해서 다시 아카이브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아카이브에서 출발해 웹 기획을 거쳐, 다시 아카이브의 질문을 떠올리게 된 지금, 나는 이 둘 사이의 접점을 하나의 교육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아카이브로서의 웹, 웹에 기반한 아카이브
“오늘날 아키비스트에게 웹은 어떤 존재일까? 웹은 아카이브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수업을 소개한 문장이자, 4주 내내 함께한 질문이다.
교육은 4주로 구성된다. 1주차에는 웹이 기록을 담는 환경일 수 있는지, 웹 위의 문서와 연결이 아카이브의 질문과 어디서 맞닿는지를 함께 살펴본다. 2–3주차에는 HTML과 CSS의 문법을 다루며 직접 웹페이지를 만들어본다. 마지막 주에는 각자가 만든 웹페이지를 함께 살보며 구현의 의도와 구성을 이야기한다. 구성만 놓고 보면 간단했다. 웹을 이해하고, 문서를 만들고, 스타일을 입히고, 웹 서버 어딘가에 올려두는 일.
하지만 이 교육은 단지 HTML과 CSS만을 배우지는 않는다. HTML은 프로그래밍 언어라기보다 문서의 구조를 드러내는 언어에 가깝다. 제목이 무엇인지, 본문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문단은 어떻게 나뉘는지, 어떤 말이 다른 문서와 연결되는지를 표시한다. CSS는 그 구조가 화면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조정한다. 코드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문법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내가 쓰는 글의 위계와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과제로 정한 것이 '자기소개' 쓰기였다. 이름, 관심사, 이력, 좋아하는 것, 다루고 싶은 주제,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 등 어떤 소재라도 쓸 수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에디터나 문서 파일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이번 과제는 글의 내용뿐 아니라 그 내용을 어떻게 보이게 할지도 함께 결정해야 했다. 제목과 본문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먼저 드러내고, 어떤 간격으로 문단과 문장을 구성할 것인지와 같은 크고 작은 선택들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을 먼저 보여줄 것인가.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어떤 텍스트에 링크를 걸어 연결할 것인가. 어떤 순서로 읽히게 할 것인가. 내용이 구조를 만들고, 구조가 다시 내용을 다듬는 과정의 반복을 익혀보는 것. 내가 생각한 수업의 의미는 여기에 더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웹은 단순한 게시 공간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서를 만들고, 그 문서에 주소를 부여하고, 다른 문서와 연결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었다. 자기소개를 웹에 올린다는 것은 글을 쓰는 일만이 아니었다. 내 글이 어떻게 보일지, 그 글을 둘러싼 화면과 문서의 구성을 어떻게 할지, 어떤 말과 링크로 설명될지,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주소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를 각자가 정하는 일이었다. 결국 이 교육은 웹을 배우는 시간이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문서로 기술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함께한 사람들
4주가 지나자, 참여자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코드로 써서 웹 위에 올렸다. HTML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전에 배웠지만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던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시간에는 관심사와 이력, 질문과 취향이 서로 다른 웹페이지들이 화면 위에 놓여 있었다. 아래는 그중 세 작업을, 각 사이트의 제목으로 짧게 소개한다.
고민만 많은 연구원
문화유산 수리기록을 기록학적으로 다루는 연구자의 웹페이지. 자기소개, 개인·건축유산 아카이브, 자료검토, 기타 잡썰 등 본격적인 홈페이지 느낌의 메뉴들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유산 데이터를 충실한 메타데이터와 함께 업데이트한 파트가 이 웹페이지의 백미다.
Windows 95 Portfolio
자기소개를 윈도우 95 바탕화면처럼 꾸민 페이지다. 이른바 Desktop Core라고도 불리는, 옛 인터페이스를 그리워하는 interface nostalgia를 차용한 작업이다. 내 컴퓨터, 메일, 프로젝트 창을 열면 자신만의 학력·경력·논문·음악이 조각조각 드러난다.
나의 디지털 아카이브
미술과 문화예술을 연구하는 참여자의 자기소개 페이지. 연구자로서의 관심사와 고민,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를 차분히 정리했다. 글의 톤과 문단의 배치, 색과 여백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내용과 구조가 함께 정리된 작업이다.
사서, 아키비스트, 연구자, 기획자, 디자이너… 직업도, 다루던 기록도, 완성된 페이지의 모습도 달랐다. 4주 동안 같은 교실에서 웹의 언어를 익혔고, 각자의 이야기를 주소가 있는 웹 문서로 만들었다. 내용과 방식은 제각각이었지만,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읽히게 할지를 함께 살펴본 시간이었다. 시즌 1은 그렇게, 각자의 작은 웹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아키비스트는 웹을 꿈꾸는가
시즌 1을 마친 지금,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오늘날 아키비스트에게 웹은 어떤 존재일까. 웹은 아카이브일 수 있을까.
돌아보면 이 교육은 전혀 새로운 시도라기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이어지고 있던 흐름 가운데 하나에 가깝다. 핸드메이드 웹은 플랫폼과 빌더, 생성형 AI가 웹 제작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도, 여전히 손으로 코드를 쓰는 일의 즐거움과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디지털 가드닝은 완성된 결과물을 한 번에 내놓기보다, 정원을 돌보듯 자신이 만든 웹을 조금씩 가꾸고 연결해 가는 태도에 가깝다. 이 흐름들은 웹을 단순한 기술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 기록하고 배치하고 이어가는 공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감각은 여러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질서가 웹의 언어를 오늘의 교양으로 제안했다면, 버드콜은 서재이자 교실로서 자료를 모으고, 함께 읽고, 실습하고, 공동의 기록을 남기는 방식을 실험해 왔다. 이요하우스의 iyo.coding.lab은 생성형 AI와 바이브 코딩을 매개로, 각자의 아이디어를 웹 작업물로 구현해보는 감각을 보여준다. 나는 그 흐름들을 보며, 아키비스트에게도 이런 교육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목의 ‘꿈꾸는가’라는 말이 여전히 마음에 남는다. 웹을 곧바로 아카이브라고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기록이 놓이는 환경을 다시 상상해보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브코딩이 유행하는 지금, 코드를 모두 직접 쓸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웹이 어떤 구조와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해하는 감각이다. 우리가 다루는 기록이 어떤 형식으로 놓이고, 어떤 링크를 통해 이어지며, 어떤 조건 속에서 다시 발견되는지 살펴보는 일은, 여전히 아키비스트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아카이브는 기록을 쌓아두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록이 읽히고, 연결되고, 다시 접근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웹은 아키비스트에게 낯선 바깥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아카이브의 질문이 반복되고 있던 장소인지도 모른다.
시즌 1은 끝났지만,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AI가 빠르게 발전하는 지금, 한때 개발자의 전유물처럼 보였던 GitHub, Markdown, API 같은 개념들도 점점 더 일상적인 작업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분류, 메타데이터, 더블린 코어처럼 기록학이 오래 다뤄온 개념을 함께 놓고 보면, 아카이브를 데이터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가능성도 훨씬 커진다. 기록은 이제 사람이 읽는 문서이면서, 동시에 기계가 읽고 연결할 수 있는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교육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하반기에는 시즌 2로 다시 만나, 웹과 아카이브, 그리고 AI 시대에 필요한 소양들을 조금 더 깊이 다뤄보고 싶다. 아키비스트는 웹을 꿈꾸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이제, 우리가 어떤 기록을 어떤 구조로 남기고 다시 연결할 것인지 묻는 일과도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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