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28]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비가 오는 주말입니다. 강풍이 분다 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평화롭군요. 비가 내리기 전 오전에는 공기가 아주 무겁고 후덥지근했는데요. 그 텁텁함과 따뜻함이 참 좋았어요. 몸의 긴장이 부드럽게 개운하게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제는 신시아 오직의 ⟪숄⟫이라는 소설집을 함께 낭독하는 모임에 다녀왔는데요. 소리를 내어 글을 읽는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더라고요. 결말부에 가서는 주인공과 아주 밀착된 저를 발견했어요. 처음에는 분명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는데도요. 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 모두 각자의 연극을 하는 중인 것 같았습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날 때, 몸의 어느 한 구석이 깨끗해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슬프고 열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주인공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 세계의 멀쩡한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의 말과 행동은 우스꽝스럽고 처절하고 어쩌면 끔찍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 자신의 몸으로 말합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라고요.

우리는 계속 이야기해도 됩니다. 폭력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봄입니다. 이번의 주제는 '꿈'인데요. 전 봄이 되면 꿈을 꾸는 빈도가 현저히 낮아집니다. 겨울엔 몸을 꽁꽁 웅크리고 자느라 더 많은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 저의 추측입니다. (다들 어떠신지요) 그래서인지 생생하고 재밌는 꿈 얘기는 못 적었어요. 언젠가는 총천연색 꿈 얘기도 여기 실어보낼 일이 있기를.

봄입니다! 많이 걷고 자전거도 많이 타는 날들 되시기를. 몸을 움직이면 더워지는 계절이니까요. 

차재신

원래 ‘잠과 꿈의 세계’ 하면 빠질 수 없는 강성은 시인의 시를 데려오려 했는데, 좀 짧은 시를 찾다 보니 이번에도 ⟪철과 오크⟫에서 고르게 되었다. 이 시집을 좋아하기도 한다. 칼로 벤 듯한 문장들, 세계를 뚜렷하게 직시하려는 듯한 태도가 느껴져서.

사냥꾼에게는 '사냥감'이라는, 총을 겨눌 목적과 대상이 있다. 달리 말하면 사냥할 대상이 명확할수록 사냥꾼의 존재 또한 뚜렷해진다는 뜻이다. 시에서 사냥꾼은 총을 든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나타나지 않고 그는 잠시 꿈을 꾼다.

보통 ‘꿈’은 존재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일상의 부산물들이 뒤섞인 이미지로 형상화된 곳. 그러나 사냥꾼의 꿈속은 텅 비어 있다. 총을 들고 있지만 겨눌 대상이 부재한 상태. 무엇을 사냥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냥꾼은 사냥꾼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때 사냥꾼의 존재가 흔들린다. 무언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도 사냥꾼 스스로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사냥꾼의 꿈속을 텅 비게 한다. 그러다 불현듯 '아직 죽지 않은 부모님'을 생각한다. 여러 의미로 확장될 수 있는 마지막 문장이 시의 깊이를 더한다.

'아직 죽지 않은 부모님'은 사냥꾼이 사냥을 하게 만드는 동력(사냥을 통해 먹여 살릴 가족)일 수도, 길을 잃은 사냥꾼에게 가야 할 길을 지시해 주는 존재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언젠가는 죽여야 하는(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발로가 될 수 있다. 혹은 세 가지 모두 중첩될 수도 있다.

꿈은 나로부터 만들어진 세계다. 그러면서도 즉각 이해할 수 없는, 해독이 필요한 세계이기도 하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좌표화할 수 없는 나무들 사이를 헤매는 것처럼. 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꿈을 ‘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 의미로 텅 빈 세계’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텅 빈 꿈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어쩌면 사냥꾼이 마지막으로 겨눌 대상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연정모

꿈과 시에서 나는 자주 어린 사람이 된다. 그것의 의미를 굳이 설명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수치를 겪어왔다. 

(꿈에 관한 얼마나 많은 시가 존재하는가) 

예전 어떤 시에서 ‘꿈속의 얘기를 시로 쓰는 건 비겁한 거래’라는 문장을 쓴 적 있다. 아마 누군가 내게 그 비슷한 말을 해주었던 것 같다. 어디의 누구였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시에 쓸 정도면 뜨끔했나 보다. 무엇이 비겁하고 무엇이 뜨끔한 일인지는 설명하기 어려우나, '내가 알아챈 나'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좀… 여러모로 멋지지 않게 느껴지는 거지.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오래 생각하는 사람은 추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자기애착이든 자기연민이든 꼴 뵈기 싫은 건 똑같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애착은 자기연민을 포함하며 자기연민은 자기애착에서 비롯된다)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꿈 얘기나 하는 걸지도 모른다. 

꿈의 이미지 꿈의 감각은 나에게서 비롯되지만 나도 모르는 더 큰 맥락을 포함한다. 잊고 살던 기억이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심리 상태, 그런 무의식의 부유물이 난데없이 뭉쳐져 하나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것 참 얼마나 시적인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오래 생각하곤 하는 (피곤한) 유형의 사람들은 이런 꿈속 이미지에 붙들리곤 하는 것이다. 어젯밤 꿈에서 난 커다란 흰 빵을 베어물었지, 푹신하고 따뜻했지, 나의 허기는 어디서 오나, – 혹은, 꿈에서 또 엄마가 나에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여전히 슬프고 아프다, 등등등. 안타깝게도, 사랑과 불행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대체로 이런 문법이다. ‘내가 그래서 이랬구나’ ‘그것이 나의 이것을 이루었구나’

(그것 참 얼마나 시적인가!)

시를 처음 썼을 때 나는, 글쓰기가 수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슬픔에 걸려 넘어지고 어떤 이상한 고통을 느끼는지 써도 문제되지 않는다, 비난받지 않는다. 빽빽한 말로 설명한다면 참으로 가관일 그 기분과 감각들은 이미지가, 리듬이 되고. 그 자체로 무언가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쓰는 시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에 부딪혀 있다. 나라는 아주 사소한 개인이 세계에 대해 어떤 무력감을 기쁨을 슬픔을 괴로움을 애정을 느끼든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텐데. 그것을 이 폐쇄적인 말들로 적는다 해서 세계의 중량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을 텐데. 

최근, 시론 수업에서 ‘시의 본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시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미 사람들이 다 해왔던 것을 짜깁기하게 된다는 맥락에서였다. 이 말을 듣고 조금 멍해졌다. 나는 시의 본질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요.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쓰는 건데요.

그러나 내가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고, 나는 그저 쓰겠지. 추해지거나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조금의 결론도 못 내린 채로) 며칠 전 아빠가 꾼 꿈을 들려 드리겠다. 꿈에서 내가 열심히 바닥에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페인트칠을 마치자마자 나는 그 위로 철푸덕 엎어졌다고 한다. 머리카락에 찐득찐득 페인트를 묻힌 채 앵앵 울었다고 한다. 아빠가 그런 나를 안아들어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고. 괜찮다 말해주었다고. 

그것이 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들려 준 얘기였고, 꿈 밖의 나는 왜인지 울먹울먹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왜 나를 울게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시의 멋진 점이다.

🚶생활기

차재신: 요즘 자꾸 농구 얘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 호부터는 좀 더 삶을 살아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연정모: 시를 좀처럼 못 쓰고 있어요. 바쁘다는 말은 그만하고 싶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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