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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ICUE CHRONICLE No.020 “1959년, 서울의 어느 잡지사로”

2026.11.06 | 조회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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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SOPHIE HONG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손금처럼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Ma la città non dice il suo passato, lo contiene come le linee d’una mano.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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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어른들의 이야기, 20세기 전반의 서울을 무대로 활동한 문예인들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에는 늘 그 시절의 서울을 마음에 그려 봅니다. 몇 해만 지나도 골목의 풍경이 변하고, 오가는 사람들이 달라지는 이 도시에서 저는 늘 그렇게 본 적 없는 서울을 그리워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공간에서 생활했을까, 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장소를 채우는 소리는 어떤 스펙트럼과 밀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건축과 도시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서른 즈음, 건강 문제로 잠시 휴직 중이었던 저는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박철수 교수님의 수업을 청강하고 있었는데요. 교수님은 아파트의 원형이 전국으로 보급되기 이전에 지어진 공동주택의 구조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영화 작품들을 조사해 오라는 과제를 내 주셨습니다.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이후로도 저는 건축가 친구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오래된 영화를 함께 보고, 작품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 답사하고, 상영회를 기획하여 문화재청의 후원으로 덕수궁의 중명전에서 아주 특별한 영화제를 진행하기도 했답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는 한 해에 두 번,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로 ‘수토메 무비나이트’를 기획하여 상영회를 이어갔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투숙객이 각자의 객실에서 베개를 들고 나와 응접실의 바닥에 편하게 누워 벽면 전체를 채우는 흑백 화면을 통해 수십 년 전 서울로 시간 여행을 하던 재미있는 장면이 여전히 생생한 기억입니다. 

오늘은 그 무렵에 보았던 작품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다가오는 주말, 여러분 각자의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영화를 즐겨 주세요. 카비큐 시네마테크! 개막작 〈여사장〉(1959)을 시작으로, 랜선으로 함께 즐기는 작은 영화제를 이어가 보도록 합니다. 박철수 교수님이 내 주신 과제를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긴 세월 이어가는 것은, 살아 계실 때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오랜 감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1959년 12월, 연말의 서울 극장가에 아주 당돌한 여성이 등장했습니다. 여성 잡지 '신여성’을 발행하는 출판사의 사장 요안나. 그의 집무실 벽에 걸린 큼지막한 액자에는 '여존남비(女尊男卑)'라는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사내 연애는 금지, 남자 직원들은 늘 긴장해야 합니다. 은막의 스타 조미령이 연기한 이 낯설고 매혹적인 신여성은 아직 전쟁의 폐허가 곳곳에 남아 있던 도시에서 관객들을 웃게 하고, 놀라게 하고, 설레게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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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시작됩니다. 전화를 오래 붙들고 있던 요안나는 처음 보는 청년 용호(이수련)와 시비가 붙어 톡톡히 망신을 당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두 사람은 출판사의 신입사원 면접에서 다시 만나게 되죠. 요안나는 그날의 수모를 갚아 주겠다며 그를 채용하지만, 이 청년은 도무지 고분고분하지가 않습니다. 지위의 차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말다툼, 미운 정이 드는 것인지 자꾸만 눈길이 가는 마음. 첫 만남부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서서히 로맨스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를 보는 듯 경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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