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프로의 책과 영화]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2023)
새해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일곱 편을 곱씹으며 시작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김용규 선생의 책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 덕분입니다. 출간 직후 구입해서 야금야금 읽고 있던 책을 연초에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면서, 한없이 길고 느리고 심오한 타르코프스키의 영상에 압도되고 매료되고 졸렸던^^ 오래 전 기억 앞에 섰습니다.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 제목처럼 저에게 매번 ‘노스탤지어’를 불러오는 이름입니다.
사실 김용규 선생의 책도 그렇습니다. 학문으로 영화를 익히고 연구하던 시절, 빼곡히 밑줄 그어가며 읽던 많지 않은 ‘영화 책’들 중 김용규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 실천, 2004)가 있었습니다. IVP에서 이번에 출간된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는 이 책의 개정증보판입니다. 서문과 본문에서 언급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해서 실은 글이 각 장 말미에 추가되었는데, 이 부록들만 따로 철학사전처럼 읽고 참고해도 좋을 만큼 유익할 뿐 아니라 간간이 위대한 사상가들의 ‘뒷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어 무척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새 버전에서 가장 흡족했던 구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출판사에서 이 책을 다시 출간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요? 물론입니다. 기독교신앙과 부정신학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정교의 신학을 빼놓고서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철학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글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자면, 영화 해석에 성경을 인용하거나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때 부딪히곤 하는 부담과 저항감에서 자유로운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돌려 말하거나 대체용어를 찾지 않고 적확한 언어와 맞춤한 인용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요.
책 제목에 새로 첨가된 ‘파수꾼’이 그런 예입니다. 파수꾼은 첫 장편인 <이반의 어린 시절>(1962)부터 마지막 작품 <희생>(1986)까지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타르코프스적인 인물’들이면서 예술가인 타르코프스키 자신을 가리키는데요, 저자는 이 단어를 쓰면서 “파수꾼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보소서,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하니”(이사야 21:8)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에스겔 3:17)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했어요. 여기서 파수꾼은 구약학자인 월터 그루브만이 ‘예언자’로 칭했던 인물형이라고 저자는 여러 차례 밝힙니다.
저자는 예술가로서 타르코프스키의 작업과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물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거나 분신자살하거나 소명을 잃고 세상을 떠돌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거나 저주받은 인물인 양 멸시되는 그의 주인공들을 ‘파수꾼 신학’으로 해석합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의 이반, <솔라리스>의 크리스, <거울>의 알렉세이, <잠입자>의 ‘구역’ 안내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 화가 루블료프, <노스텔지아>의 작가와 도메니코, <희생>의 알렉산더.... 그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요구와 욕망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유’를 누린 인물들이었어요.
타르코프스키 자신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절망적인 세계’는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초래한 종말론적 위기의 세상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1984년에 이탈리아로 망명했는데요, 서방세계의 물질문명을 직접 경험한 후 이 절망과 위기의식이 더욱 깊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의 질문을 조금 수정해 다시 묻습니다. 이 책을 (기독교출판사에서) 2023년에 다시 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지금 타르코프스키를 다시 읽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서문에서 저자는 지금 우리 세계가 경험하는 위기는 이 위기에서 저 위기로 끊임없이 옮겨가는 ‘영속적인 위기permacrisis’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영국의 콜린스 사전 발행사가 2022년 말에 ‘올해의 영단어’로 이 말을 꼽았다는군요. 언뜻 생각해 보아도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2015년 파리 기후협약이 무시되고 시대에 역행하는 각국의 에너지정책과 가시화된 기후위기 등 지난 몇 년 사이 우리가 당면해온 문제들은 어느 하나 가벼운 것들이 아니고 언제든 확대되어 전지구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이슈들입니다. 최근 뉴스들만 추려보아도 일본열도 서부에서 대규모 강진 피해가 있은 직후 스웨덴은 영화 45도의 강추위로 몸살을 앓았는데, 같은 날 독일에서는 이례적인 폭우가 도심에 홍수를 일으켰다고 하지요.
우리는 어떻게 이 파국을 멈출 수 있을까요. 멈출 수 있기는 한 걸까요.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 선명하게 주장하듯이 ‘희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영화 <희생>의 서두에 주인공 알렉산더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죽은 나무를 위해 매일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는 수도승과 같은 ‘바보(성자)’들이 필요한 거라고요. 구원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구속’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속량’이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분명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지는 것이지요. 파수꾼들은 그 대가와 희생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브루그만이 지적하듯이 위기의 경고나 자기파괴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아침을 예고하는 희생이기에 거기에 개인과 인류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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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2월 1-31일 기준
강도영 강원중 강종철 구귀남 김대현 김동석 김명관 김소혜 김솔지 김영준 김재균 김지향 김진선 김혜영 김희라 대지교회 류현 박성민 박은영 박일아 박재우 박진숙 박현선 박현홍 배재우 서경희 송정훈 신동주 신원균 이동은 이범진 이신석 이유리 이유혁 장다나 정민호 정시안 지은실 채송희 최규창 최은 최현 한송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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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새해를 맞이하고 계신가요?
저는 5회 모기영을 마치고도 한동안 분주히 움직이다가 한껏 늘어져 있기도 했다가, 지난 해 놓친 영화들을 챙겨보며 올해를 시작했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타르코프스키 외에도 <파벨만스>의 스티븐 스필버그, <플라워 킬링 문>의 마틴 스콜세지, <괴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영화사의 거장들이 제각기 예술이란 이런 거지,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오래도록 영화라는 예술 언저리에 머물고 싶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타르코프스키는 “물에 빠진 인간의 육체가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예술이 수행한다”고 말했죠.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 같은 거라고요.
여전히 희망보다는 불길하고 암담한 기운이 더 크게 감지되는 세상이지만, 다 같이 익사하지 않고 함께 살아남을 힘을 나누기 위해 신발 끈 단단히 매고, 올해도 바지런히 좋은 영화를 찾아나서 보겠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글 최은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4년 1월 6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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