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주간모기영 172호

[최은의 취미와 취향] 디킨스라는 알리바이, 그리고 예수 영화: <킹 오브 킹스>(2025)

2025.08.09 | 조회 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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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의 취미와 취향]

디킨스라는 알리바이, 그리고 예수 영화: <킹 오브 킹스>(2025)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어야지. 넘치는 인구도 줄이고…”

 

찰스 디킨스의 1843년 작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기부를 요청하는 자선단체 봉사자에게 에버니저 스크루지는 무자비하게 말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타난 혼령 셋 중 현재의 크리스마스 혼령은 이 말을 스크루지에게 그대로 되돌려주었죠.

『예수의 생애 The Life of Our Lord』, 더스토리, 2025
『예수의 생애 The Life of Our Lord』, 더스토리, 2025

디킨스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쓴 『우리 주님의 생애 The Life of Our Lord』(1846-1849)가 원작인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는 이 대사와 함께 스크루지가 미래의 혼령에게 혼쭐이 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자신의 무덤 비석 앞에서였지요. 뛰어난 낭독자이기도 했던 찰스 디킨스가 청중들 앞에서 이 대목을 실감나게 읽어주고 있었어요. 이 때, 무대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난입해서 낭독을 방해합니다. 디킨스의 막내 월터의 고양이였어요. 이 일로 월터는 아빠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공연은 어찌어찌 마쳤지만 그 날이 가기 전에 디킨스는 월터의 화를 풀어주어야 했어요.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온통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와 엑스칼리버에만 꽂혀 있는 막내 월터에게, 찰스 디킨스는 ‘왕’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을 건넵니다. 네가 좋아하는 아서왕 이야기도 그 왕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요.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들과 예수의 열두 제자를 연결시킨 거겠지요.

어린 월터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아직 삐져있는 중이라서 차마 펄쩍 뛰지는 못하고, 팔짱을 낀 채 곁눈질을 하며 이렇게 반응하죠.

“뭐, 그럼 한번 들어나 볼게요....”

디킨스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어 가면서, 월터는 윌라와 디킨스와 함께 ‘원탁의 기사들’ 같은 제자들 또는 예수를 따르던 군중의 일부가 되어 1세기 팔레스타인으로 긴 모험을 떠납니다.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바로 이 지점이었어요. 아서왕와 월터와 고양이 윌라는 원작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 영화의 캐릭터들이거든요. 아, 물론 스크루지도요.

막내 월터에게 아서왕에 기댄 왕의 이야기라는 미끼가 있었듯이, 저에게 디킨스의 작품이 원작이라는 점은 이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마 상당한 수의 성인 관객들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엄연한 인간 ‘작가’의 존재와 문학적 허용(게다가 무려 디킨스!)에 기대어, 혹시라도 제기될지 모르는 신학적 오류 문제를 비껴가기도 좋은 장치이지요. “디킨스는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자기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잖아요.” 라는 ‘팩트’로 숨어들어갈 수 있거든요.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20세기 중반 할리우드의 최전성기를 생각하면 이 점은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네, <십계>(1956)나 <벤허>(1959) <쿼바디스>(1951)가 대세이던 그 시절 말입니다. 기독교영화제라면 그런 영화 상영하는 거냐는 질문을 모기영이 이백스물다섯 번쯤 듣던, 바로 그 작품들의 시대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았던 그 시절”로 기억하는 대작 성서영화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할리우드가 실은 ‘딴따라’가 아니고 유럽 지식인들이 비판하듯이 ‘일차원적인 인간’을 만드는 복제된 상품 또는 타락한 오락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 내러티브의 권위와 도덕적 이미지를 빌려온 관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실패하지 않는 시장이라는 검증된 흥행실적과 이미 준비해놓은 풍부한 시대극 의상이나 고가의 소품과 세트를 재활용하겠다는 실용적 마인드와 스튜디오 현실도 기독교와 성경영화 붐의 배경이 되기도 했죠.

<킹 오브 킹스>를 만든 장성호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야기는 부가시장에서 오래도록 소구되면서 실패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계산을 고려한 기획이 있었다고 말이지요. 여러 제작배경을 고려하더라도, 한때 기독교와 성경이야기를 알리바이로 두었던 대중영화가 이제는 기독교를 말하기 위해 디킨스(문학)를 알리바이로 두게 된 점이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합니다. 시대정서와 감정구조에 예민한 대중예술의 자연스럽고도 뛰어난 감각이겠지요.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생각난 김에 일찍이 할리우드에서 <King of Kings>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영화들을 간략히 훑어보고 갈까요? 그들이 성경 내러티브를 재현한 방식을요.

세실 드밀의 1927년 작 <왕중왕>은 무성영화로, 간자막 텍스트로 성경구절과 출처인 장과 절까지 직접인용하면서 이 영화가 성경 ‘그대로’임을 간간이 상기했습니다. 물론 그 뿐만은 아니죠. 그 유명한 <십계>(1956)와 <삼손과 데릴라>(1949) 등을 연출한 세실 드밀은 스펙터클하고 선정적인 이미지를 성경의 서사와 합법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대 배경 설명과 함께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뜻을 땅 끝에 이르도록 명령한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자막으로 시작을 열지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미지는 귀족과 고관들을 휘어잡는 요염한 창부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입니다. 예수의 얼굴은 17분이 지나서야 공개되는데 말이죠. 마치 한때 사극 드라마들이 시청률을 의식하여 첫 회를 자주 여배우들의 목욕씬으로 시작한 것과 같은 원리라고나 할까요. 성서를 스펙터클의 도구로 이용했던 당시의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이 ‘타락한’ 여인의 등장은 이내 영화 속에서 성공적으로 정당화됩니다. 그녀는 곧 예수를 만나 화려한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왕중왕 King of Kings>(1927)
<왕중왕 King of Kings>(1927)

반면 니콜라스 레이의 <왕중왕>(1961)은 성경내러티브에 적극적인 해석을 적용한 사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지금부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듯이 영화는 친절하고 진중하게 말을 건네지요.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렸다는 점에서 장성호 감독의 <킹 오브 킹스>와 유사한 메시지를 담았습니다만, 여기서 평화와 용서의 예수 대척점에는 월터의 아서왕 대신 민중이 따르는 지도자 바라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매달라!”고 유대인들이 외쳤던 강도 바라바인데요, 강도로 번역된 헬라어 '레스테스'는 원래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는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그밖에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그가 랍비 가문의 유대인 열심당원이며 당대 유명한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는 이 부분을 특별히 확대하여 복음서의 기록을 재구성했어요.

요컨대 바라바는 반란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리더였고, 예수는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는 쪽입니다. 여기서 레이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같은 구절입니다. 가룟 유다는 정확히 이 둘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로마 장교 루시우스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바라바는 예수의 집회는 물론이고 재판과 처형의 현장에 늘 와 있었던 것, 즉 그 역시 군중의 일원이었어요.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줄곧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때문에 살아난”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바라바는 그의 죽음을 '대신 죽음(대속)'으로 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표단수가 됩니다. 의지와 본성으로는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으나 얼떨결에, 혹은 극적으로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된 자. 그것이 구원과 관련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니콜라스 레이의 친절한 영화 <왕중왕>은 때로는 바라바가 되어, 때로는 그를 선택한 군중이나 가룟 유다가, 때로는 루시우스가 되어 안팎으로 이 점을 되새기게 하는 걸작입니다.

<왕중왕 King of Kings>(1961)
<왕중왕 King of Kings>(1961)

그렇다면 전복된 권위와 알리바이를 사용한 <킹 오브 킹스>는요? 그래서 왕의 이야기를 미끼로 월터를 ‘우리 주님의 인생’으로 초대하고 싶었던 디킨스의 작전은 성공했을까요?

“명심하거라!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도 항상 선을 행하는 것이 기독교란다.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 기독교란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용서를 해 주며, 그러한 미덕을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하고 그 사실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 또는 우리의 기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겸손하고 묵묵하게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 주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기독교란다.” 

찰스 디킨스, 『예수의 생애 The Life of Our Lord』, 더스토리, 2025, 108쪽

디킨스는 원작을 위와 같은 말들로 마무리했습니다. 무적의 칼 엑스칼리버로 적을 응징하고 세계를 정복한 아서왕과 반대로 ‘왕중 왕’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단칼에 잘려나간 말고의 귀를 붙여 회복시켜주시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며, 죄를 짓고 끌려온 여인을 보호해주셨지요. 그리하여 <킹 오브 킹스>는 예수님의 왕 되심과 왕으로서의 능력은 칼과 힘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로 증명된다는 것을 분명한 대조를 통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같은 종교인들에게는 불을 뿜으셨지만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고 병을 고치고 슬픔을 보듬는 자비를 지닌 분이라는 점은 어린 월터의 마음 뿐 아니라 이야기의 전달자인 디킨스의 마음까지도 바꾸어놓습니다.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킹 오브 킹스>(장성호, 2025) [이미지출처: KMDB]

완고한 스크루지의 무자비한 말로 영화를 시작했던 것이 이제 더 촘촘히 이해가 되는군요. 결국 이 이야기의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디킨스 자신이었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복음의 최대 수혜자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 자신인 것과 같은 이치일지 모르겠네요.

마치 스크루지가 하룻밤 모험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듯이, 왕의 이야기를 마친 디킨스는 이제 조금 더 착해지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가 완고함을 돌이킨 결정적 증거로 천덕꾸러기 고양이에 대한 용서를 선택한 것은, 월터와 어린이 관객을 위한 깜찍하고 귀여운 배려였겠지요?(그게 아니라면 좀 실망스럽고 허탈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디킨스는 서재 문에 붙은 경고문 - “작업 중 출입금지, 특히 고양이 윌라” - 을 떼어내는 것으로 “상냥하고 자비롭고 용서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에 한 발 더 다가섭니다.

아, 꼬마 월터는 어떻게 됐을까요? 아서 왕 대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형과 누나를 깨우러 달려갔네요. 그리스도가 왕중 왕이라면 월터는 이제 증인 중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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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와 계절이 다 무너져가는 줄 알았는데 입추가 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아침저녁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묻어납니다. 그 생각을 하니 살짝 소름이 돋았어요.

이미 무너진 줄 알고 방치하고 포기한 많은 질서들이 실은 어떤 모양으로든 작동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다시 품게 되는군요.

희망과 진리를, 혐오와 배제 없는 축제를 말하기 위한, 또는 그저 극장에 출몰할 핑계가 되고 알리바이가 될 만한 좋은 영화들을 모기영은 올해도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다. 변함없이 함께해주시고 응원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최은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5년 8월 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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