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예술가와 증인
<퍼펙트 데이즈>를 보며 영화 <패터슨>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패터슨>이 ‘패터슨’의 일상을 포착하듯이, 이 영화도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대체로 비슷한 하루를 담거든요. 매일 아침 그는, 성실한 누군가의 비질 소리에 깨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마다 그의 루틴이 여일하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간단한 세면을 마치면 화분에 물 주기. 작업복 입기.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 뽑기. 키를 꽂아두면 , (잠깐) 쉬었다가, 커피를 충분히 마신 다음, 시동을 걸고 출근하기. 범위를 그의 하루로 넓혀도 비슷합니다. 평일 퇴근길에는 상가 지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휴일에는 세탁소와 단골가게인 선술집을 들리죠. 특별할 것 없는 평이한 하루의 연속. 그러나 <패터슨>에서처럼 우리는 이 영화에서도 권태나 우울보다는 어떤 희망과 긍정에 가까운 정조를 느낍니다. 그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패터슨과 히라야마의 능력
버스 기사인 패터슨이 일상의 권태에 빠지지 않은 것은 그가 시를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시상은 관념이나 감정보다, 늘 현실 속 구체적인 세계였죠. 그러므로 그에게 시-짓기란, 현실을 해명하고 해석하는 일과 같았을 거예요. 비평가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는 삶에서 고유하고 반짝이는 인식과 감각을 포착해내고, 그것을 시적 언어로 옮겼습니다. 휴버트 그레이퍼스와 숀 켈리의 『모든 것은 빛난다』에는 장인의 능력을 설명하는 문장이 나오는데, 패터슨의 능력과 퍽 어울립니다. “(장인의 능력은) 그런 기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볼 수 없는 의미심장한 차이를 볼 수 있게 해준다.”(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사월의책, 2013, 355쪽) 범인이 분간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장인이라는 겁니다. 요컨대 패터슨의 시-짓기는 희미한 것들의 존재를 포착하고 비슷한 것들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합니다.
히라야마는 시를 쓰진 않지만,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사람이에요. 도쿄의 공공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그는 벽면에 내려앉은 나뭇잎의 살랑이는 그림자를 보며 미소 짓고, 어제와 달라진 햇살의 농도와 기울기에도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와 관련해 점심식사 장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과 그 사이로 살짝 비치는 햇빛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듯, 시간을 들여 인내했다가 카메라를 들어요. 히라야마는 ‘코모레비’(木漏れ日: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를 찍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그가 그 일을 꽤 오래, 열정적으로 해왔다는 것이 드러나는데요. 그동안 찍은 모든 사진들이-연도와 달 표시가 된- 수납장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영화가 다 보여주진 않았으나 우리는 압니다. 모두 같은 코모레비를 찍었으나, 실은 하나도 같지 않다는 것을요.
그러므로 패터슨과 히라야마의 능력은 같아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감지해낼 수 있는 능력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둘의 예술로 이어져요. 시와 카메라로 세계의 반짝이는 일면을 포착하고, 그것을 범속한 것으로부터 구출해내죠. 위에서 언급한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는 현대인들이 허무와 무의미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그러한 ‘장인의 포이에시스’를 권합니다. 대체로 비슷한 나의 하루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새로운 점을 찾고, 그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라는 거예요. 책에는 이런 문장도 있네요. “장인의 과제는 의미를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중략)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분간하는 데 있다.”(같은 책, 357쪽) 우리식대로 말해보면 이런 문장일 겁니다. ‘세계에서 하나님과 닮은 것들을 찾는 동안 우리는 공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패터슨과 히라야마 둘 모두 예술가라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남깁니다.(제도적인 예술계에 속하진 않았으나 둘의 존재론적 성격이 예술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반짝이는 것을 포착하는 방법은 꼭 예술만 할 수 있는 걸까요? 시나 카메라가 아닌 것으로도, 그러니까 예술이 아닌 것으로 숨죽인 신성을 길어올리는 일은 가능할까요. 그런 방법이 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그와 관련해서 아렌트에게 들을 말이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라는 증인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적 삶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노동’, ‘작업’, ‘행위’.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 생명뿐 아니라 ‘인간 종’의 생명을 보존합니다. 또한 인간은 작업을 통해 자신은 소멸될지라도 영속적인 무언가를 남깁니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인간 모두에게 의미있는 공동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과정, 소통과 관계합니다. 노동과 작업과 달리 행위는 타인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다원성’(복수성)에 기초해 있는데, 이점에서 아렌트가 다원성에 근거한 행위를 중요시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어요. 여기서 잘 알지 못하는 아렌트의 철학을 길게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녀의 사유 전반에 배어있는, 알고보면 행위만이 아니라 노동과 작업에도 타인을 염두에 둔 흔적이 스며있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한 것 같아요.
그중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친밀한 내적 삶의 가장 강력한 힘-마음의 열정, 정신의 사유, 감각의 즐거움-조차도, 그것이 탈사적, 탈개인적으로 변형되어 공적 현상에 적합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가질 때까지는 불확실하고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9, 132쪽) 자신에게 아무리 강렬한 감각적 경험이 있더라도,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내보일 수 없는 한,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라며 아렌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해요. “반드시 예술가의 형식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생활과 친밀성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이 경험을, 일종의 실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 영역으로 집어넣는다.” (같은 책, 133쪽)
아렌트는 예술적 기예보다 그것이 지닌 공적 역량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를 잘 쓰는 것, 사진을 잘 찍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각적 경험이 타인과 어떻게 나뉘어 질 수 있는가, 일 거예요. 무심하게 말을 걸듯,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어제 내가 겪은 일에 관해 말하는 순간 우리는 또하나의 예술을 짓는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덜 주목된 인물인, 공원에서 점심 먹는 히라야마를 힐끗 쳐다보던 사람을 말하고 싶어요. 그녀에게 히라야마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살랑이는 햇살에 마음이 빼앗기다가 이윽고 카메라를 들고마는 그는, 그순간 그녀에게 하나의 예술적 형상으로 다가갔을 겁니다. 동시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다른 것을 좇으며, 작고 귀중한 것에 애정을 쏟는 모습 자체가 감각적 파문을 일으켰을 거예요. 그렇게 히라야마의 말 없는 행동은 그녀에게는 무수한 말로 다가갔을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바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마다, 이렇게 반짝이는 것도 있다며 알려주도록. 이 세계가 얼마나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훗날 사람들에게도 생생하게 가닿도록. 그렇게 우리는 예술가와 증인을 동시적으로 감당하네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증인으로서의 예술. 우리의 ‘코모레비’는 그러니, 햇살만 찾지 않을 겁니다. 숨죽인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 무수한 사람들. 그것을 발견하는 한 우리는 연결됩니다.
인삿말
주간모기영의 소임 중 하나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먼저 다가온 아름다운 것을 독자님들께도 건네드리기 위하여.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글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5년 8월 16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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