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프로의 책과 영화]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글항아리, 2021)과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1978)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작품 <가을 소나타>는 7년 만에 만난 모녀의 이야기입니다. 목사의 아내이며 작가인 딸 에바(리브 울만)의 집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엄마 샬롯(잉그리드 버그만)이 큰 여행가방을 들고 도착합니다. 평범한 모녀의 상봉인 것처럼 보였던 이들의 만남은 점차 미묘한 긴장을 드러내고 함께 피아노를 치고 과거 즐거웠던 휴가를 떠올리며 대화하다가 마침내 둘은 폭발하고 맙니다. 결정적으로, 샬롯의 가장 행복했던 여름휴가는 에바의 가장 끔찍한 휴가였고, 샬롯이 그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는 부활절 휴가는 에바와 여동생 헬레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참았던 분노와 상처를 쏟아내며 서로를 할퀴는 시간이 이어졌어요. 세월이 많이 지났을 뿐 아니라 최근에 애인을 잃은 엄마가 상실감에 빠져 있을 줄 알고 에바는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던 건데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딸을 무섭게 몰아붙이는 엄마에게 에바는 다시 실망하고 경악하게 됩니다.
진실에 직면해야 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고 싸움은 잦아들지만, 영화를 마칠 때까지 둘은 완전히 화해에 이르지는 못해요. 샬롯이 도망치고 말죠. 7년만의 모녀 상봉은 그렇게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종결됩니다. 루터교 목사였던 엄격한 아버지와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던 베리만답게, 그의 영화에서도 모녀는 각자의 슬픔과 좌절을 안고 또 한 번의 가을을 보내게 되겠지요. <가을 소나타>를 볼 때마다 딸에게 언어(글쓰기)가, 엄마에게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베리만이 외롭고 슬픈 여인들에게 나누어준 선물인가 하고요.
<가을 소나타>에는 저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에바가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부분인데요, 해외공연을 다니느라 늘 부재했던 엄마가 집에 머물 때면 엄마에게 다가가고 말을 걸기 위해 어린 딸은 엄마의 연습실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엄마가 연주를 잠깐이라도 멈추고 쉬는 타이밍을 노려야 했거든요.
멀뚱하게 서 있는 소녀 에바의 모습에서 기시감이 들어 움찔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난 후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자면 간혹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경우가 있었죠. 잠에서 깬 딸이 서재 앞에 에바처럼 서 있었던 건데요, 그런 날이면 딸아이는 제 책상 아래 자리를 펴고 다시 잠을 청했어요. 타다닥타닥 키보드 타이핑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지요. 이제 다 자란 딸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아이가 혹시라도 매의 눈으로 관찰한 끝에 (예컨대 엄마에 대해서라든가...^^;) 글 쓰는 사람이 될까봐, 그때나 지금이나 살짝 두려워하면서 말이지요.
자전적 글쓰기의 대가 비비언 고닉의 책을 읽으며, <가을 소나타>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비비언 고닉은 진짜로 자기 엄마 이야기를 아주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책으로 써냈거든요. 에바와 샬롯은 7년 만에 만나서 싸우다가 하루만에 엄마가 도망가버리고 말았지만, 비비언 고닉은 쉰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여든이 다 된 엄마와 거의 매일 만나 싸웠던 모양입니다. 도망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나란히 뉴욕 시내를 걸으면서요. 오죽했으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엄마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비비언이 담담하게 답합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고닉 모녀간 애증의 연대기는 194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5년생인 비비언 고닉은 노동자계층 유대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뉴욕 브롱크스의 다세대주택에서 여섯 살부터 스물한 살까지 살았습니다. 문학비평가로서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기도 하고 자전적인 서사의 선구자로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칼럼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입니다. 유대인 부모가 모두 사회주의자였고, 특히 어머니는 젊은 시절 급진적 노동운동가로 활동했을 정도로 사회생활에 재능과 열의가 있는 여성이었어요. 그런데 그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일을 그만 두고 브롱크스 유대인 공동체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비비언의 아버지가 “애들에겐 당신이 필요해.”라면서 단호하고 간곡하게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죠.
동네에서 유일하게 억양이 없는 표준언어를 구사하고 나름 신여성이었으나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로서의 정체성과 ‘사랑이 최고’라는 믿음에 유독 집착했던 것은 일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던 어머니의 정신승리이자 생존전략이었던가 싶습니다. 40대 중반에 돌연 남편과 사별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지요.
비비언 고닉은 고향 같은 그 곳에서 어머니 자신도 모르는 어머니의 지적인 면모와 아버지의 죽음에서 꽤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 그녀의 슬픔과 우울을 먹고 자랐습니다. 엄마도 아빠처럼 돌연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요. 『사나운 애착』은 여든을 바라보는 엄마와 거의 매일 뉴욕 시내를 걸으며 엄마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한 비비언 고닉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어린 시절 그가 만났던 이웃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친구들과 연인들, 뉴욕 변두리에서 시티 칼리지에 진학한 소수민족 배운 여성으로서 꼬장꼬장한 홀어머니 곁에서 이혼녀로 산다는 것들에 대해 깜짝 놀랄 만큼 진솔하고 예리한 기록을 남겼어요. 고닉의 문장들을 읽고 있자면, 가끔 눈이 뚱그래져서(“하아. 이걸 이렇게 표현한다고?!”) 읽기를 멈추고 북마크를 찾게 되는 순간들이 자주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죠.
모기책방 시즌 1 OPEN !
모기책방은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와 함께 책을 읽는 방’입니다.
❙ 기간: 2024년 3월 19(화) – 5월 28일(화) / 격주 화요일(총6회)
❙ 시간: 저녁 7시-9시 30분
❙ 장소: 빅퍼즐문화연구소(마포구 홍익로5길 43, 2층)
❙ 모임 형식: 세미나(참여자 중 발제 담당자 지정)
❙ 진행자: 최 은 영화평론가. 모기영 부집행위원장
❙ 인원: 10명 내외
❙ 참가비: 모기영 정기후원자 5천원 / 비후원자 5만원
❙ 신청기간 및 방법: 2024.2.6.(화)-2024.3.12.(화) 구글 폼
https://forms.gle/TfZCjDD57tLSST4M8
3개월 간, 이런 책들을 읽습니다.
3/19 『다시, 성경으로』(레이첼 헬드 에반스, 바람이불어오는곳, 2020) **읽고 오세요!!**
4/2 『무례한 기독교』(리처드 마우, IVP, 2014)
4/16 『누가 포스터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제임스 K. A. 스미스, 도서출판100, 2023)
4/30 『문화의 신학』(폴 틸리히, IVP, 2018)
5/14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김용규, IVP, 2023) (1)
5/28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 (2)
이런 분들이 오시면 좋습니다.
+기독교와 문화를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싶은 분
+기독교와 대중문화, 두 세계에서 분투하시는 중인 분
+모기영과 함께하고 싶은 분
+모기영의 미래가 궁금하신 분
[참고사항]
+첫 모임은 발제 대신 각자 책(『다시, 성경으로』)을 완독하고 오셔서 감상을 나누는 시간으로 진행하고, 2-6회차 발제자를 선정합니다.
+5,6회차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는 영화를 각자 감상하고 와서 타르콥스키 영화와 책을 함께 논할 예정입니다.
Q.‘시즌2’가 있나요?
모기책방 시즌2는 6월-8월 중 시즌1에 이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읽는 책의 목록은 달라집니다.
소중한 정기후원 감사드립니다 ❤️
* 2024년 1월 1-31일 기준
강나루 강도영 강원중 강종철 구귀남 김대현 김동석 김명관 김미지 김소혜 김솔지 김영준 김재균 김지향 김진선 김현주 김혜영 김희라 대지교회 류현 박성민 박은영 박일아 박재우 박준형 박진숙 박현선 박현홍 배재우 서경희 송정훈 신동주 신원균 심에스더 오늘교회 윤선정 이강희 이동은 이범진 이신석 이유리 이유혁 이정식 장다나 정민호 정시안 지은실 채송희 최규창 최은 최현 한송희 님
보내주신 소중한 후원금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명절은 외롭고 적막한 날들일 수 있겠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 명절이란 사나운 애착관계를 확인하는 괴롭고 고단한 날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단단하게 밀착된 것이 차마 떼어낼 수 없어 징글징글하지만 마치 탯줄과 같아서 자신의 근원을 이루고 이상한 안정감을 주는, 그래서 없으면 또 서러울 만남과 관계들이 각자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명절은 그런 관계가 애증으로 폭발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시점이 되기도 하겠고요.
다들, 평안하신가요.
어쩌다 보니 설 연휴 한복판에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진부하지만 절박한 인사로, 벌써 두 번째 달에 진입한 새해를 다시 한 번 환영해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겨울 유독 자주 오는 눈처럼, 하늘에서부터 복이 내려와 소복소복 쌓이는 한해가 되시길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글 최은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4년 2월 10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주간모기영에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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