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18. 나는 어떤 꿈 속에서

세점사이의 열여덟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05.08 | 조회 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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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열여덟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작년 하반기에는 인터뷰가 담긴 뉴스레터를 만드는 친구와 함께 단행본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예전에 인터뷰를 했던 인터뷰이들을 대상으로 업데이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들의 사진을 담는 방식이었어요. 저는 포토로 참여했었는데, 그 단행본의 펀딩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발송 준비까지 모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실물 책을 확인하고 나니 만감이 교차하더라구요. 사실 사진의 인화는 종종 해왔지만 또 사진용 용지가 아닌 책을 위한 종이 위에 인쇄를 하니까 느낌이 또 다르더라구요.

 

책을 좋아합니다. 글을 읽는 것 자체를 떠나서 책이라는 물건이 가지는 물성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바빠지면서 전만큼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책이라는 물건 자체에 집착이 더 심해지더라구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예쁜 책을 우선적으로 구매하는 요상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냥 종이가 가지고 있는 질감이 잘 사는 책들. 실물로서의 책들. 책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피사체이기도 한데, 오늘은 책, 혹은 책이 있는 공간들의 사진들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뒤돌아보니 정말 많이 찍었더라구요.

 

이건 제 책장입니다. 옆에도 많이 있답니다 . . . .
이건 제 책장입니다. 옆에도 많이 있답니다 . . . .
인터뷰 작업을 위해 찍은 인덱스숍이라는 공간이에요.
인터뷰 작업을 위해 찍은 인덱스숍이라는 공간이에요.
책과 맥주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종종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십니다.
책과 맥주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종종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십니다.
제주의 한 독립서점. 사진을 찍고 싶다면 책을 구매해야 한다는 정책이 있는 곳이었는데, 납득이 가는 바가 있습니다. 최근 브로드컬리에서 펴낸 독립서점의 현실에 대한 책을 읽고 새삼 떠올랐어요. 저는 이곳에서 김초엽 작가의 므레모사를 구매했습니다.
제주의 한 독립서점. 사진을 찍고 싶다면 책을 구매해야 한다는 정책이 있는 곳이었는데, 납득이 가는 바가 있습니다. 최근 브로드컬리에서 펴낸 독립서점의 현실에 대한 책을 읽고 새삼 떠올랐어요. 저는 이곳에서 김초엽 작가의 므레모사를 구매했습니다.
요새는 요런 책들에 환장을 합니다. 종이질감이 느껴지는 사진을 볼 수 있는 책들.
요새는 요런 책들에 환장을 합니다. 종이질감이 느껴지는 사진을 볼 수 있는 책들.
집 앞의 독립서점 겸 카페입니다. 설희책방이라는 곳인데, 종종 소개했죠?
집 앞의 독립서점 겸 카페입니다. 설희책방이라는 곳인데, 종종 소개했죠?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잡지인 어라운드의 전시회. 두 번 갔어요 후후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잡지인 어라운드의 전시회. 두 번 갔어요 후후
상수역 인근의 독립서점.
상수역 인근의 독립서점.

 

오늘은 보여드린 사진들과 연관이 꽤 깊은 이야기를 보내드릴 것 같아요. 크게 특별할 것은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음, 휴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어떤 꿈 속에서

어느 완벽한 휴일을 상상해본다. 계절은 봄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초록잎이 막 나기 시작하는 5월 정도면 좋겠다. 라일락이 있는 계절도 괜찮을 것 같다. 하늘은 파란색. 20도가 조금 안 되는 낮이다. 블레이저를 벗을지 말지 고민할 만큼의 날씨. 면 재질의 옷을 입은 상상 속의 나는 종각역에서 하차한다. (상상 속의 완벽한 하루에도 오점이 있다면 그것은 꿈속에서마저 1호선을 타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 통로와 통하는 영풍문고를 애써 무시하고 잠시 걸어 1번 출구로 나서면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있다. 종로 일대의 클래식한 빌딩숲과 청계천, 스타벅스, 무인양품, 유니클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 같은 것들. 인파는 적막하지 않을 만큼 붐비고 길은 잘 뻗어 있어 천천히 걷기에 좋다.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누른다. 하늘은 파랗고 길가에는 가로수들의 초록이 있다.

길의 끝으로 가면 광화문 광장의 교차로가 있다. 서로 다른 종파의 크리스찬 어르신들께서 찬송가 대결을 하지만 1호선 라인을 사랑하는 이상 감내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다. 다른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길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돌아가는 날은 있지만 여기를 들르지 않고 돌아가는 날은 없다. 계단을 내려가 회전문을 통과한다.

 

사실 교보문고에 가더라도 대부분은 아이쇼핑으로 온 매장을 몇 바퀴 돌고 돌아나오는 게 전부다. 원하는 책을 전부 살 만큼 통장이 넉넉하지는 못하니까. 포기하고 포기하고 포기하다 보면 결국 빈손으로 나온다. 그리고 예쁜 책들은 대체로 비싸지. 그래서 상상속의 하루에서는 나에게 이십만원의 한도를 부여하기로 한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열 바퀴고 스무 바퀴고 돌면서 한도 내에서 어떤 책들을 골라야 가장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것이다. 사진집이나 아트북, 디자인에 대한 책, 소설, 에세이, 잡지들 사이를 무작정 떠도는 상상은 언제나 행복하다. (그 고민들 사이에 문제집이나 재태크가 끼어들 틈은 없다.)

고민을 끝내고, 묵직한 백팩을 버티며 계단을 다시 올라가겠지. 해가 저물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해가 지는 시간에 그 동네 건물들은 산호색으로 변한다. 유리 건물들에는 빛이 반사된다. 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며 카메라를 꺼낼지 말지 고민을 하겠지. 맛있는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에 앉아(그날따라 인파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장님께는 죄송한 일이다.)잠봉뵈르와 커피를 주문하고 백팩 안에 가득찬 이십만원어치 책들을 뒤적거릴 것이다. 예뻐 보이는 책들은 적당히 연출을 해놓고 사진을 찍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아이패드를 꺼내 글을 쓸 수도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핸드폰을 꺼내들고 분주히 메모를 하겠지. 어쩌면 필사를 해볼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려볼지도 모르고.

 

그런 날에는 동행이 있을까? 아마도 상상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어떤 날에는 사무치는 정적이 필요하고, 또 어떤 날에는 소소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쨌든 둘 다 왁자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런 날의 정적은 더없이 소중할 것이다. 그런 날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라면 정말로 애틋하겠지. 둘 중 어느 쪽이든 좋다. 정적이 있는 날 쪽이라면 바깥에 있는 동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다.

 

하지만 내게는 하루를 통째로 비울 여유도 이십만원어치 책을 고를 담력도 없다. 이십만원어치 책을 사고 잠봉뵈르에 커피를 마시는 사치를 부리다니. 그런 용기가 있었다면 내 인생속에서 굵직한 사건이 몇 개는 더 일어났을 것이다. 핸드폰의 알람이 울리면 결코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정쩡하게 길가에 서 있다가 어설프게 귀가하는 미래만이 내 것이다.

 

예전에 촬영 상품으로 내걸 것들을 고민하다가, 고객들과의 간단한 인터뷰 후에 그것을 토대로 그들의 프로필을 촬영하는 프로그램을 생각했었다. 실질적인 상품성의 문제로 결국 내걸어지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샘플을 만들기 위해 이전에 촬영을 몇 번 진행해보았던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조금 찍었다. 사진을 찍기 전에 그들을 위한 질문지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몇 개의 질문은 사람마다 달랐고 몇 개의 질문은 공통적이었다. 공통질문들 중에 가장 요긴하게 써먹었던 건 이하와 같았다. ‘당신의 가장 이상적인 휴일을 묘사해 주세요.’ 그리고 그 휴일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 장애물이 있나요?’

바다에서 헤엄을 치거나, 무작정 나가서 동네를 거닐거나, 그저 편안히 집에 눌러앉아 있거나. 누군가는 완전히 고독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다.

사람마다 상상하는 휴일은 모두 달랐는데 그 각자의 휴일은 그들 하나하나를 그럴싸하게 설명했다.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이상향, 그들의 목표, 그리고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한 것까지. 이렇게 적나라하게 사람을 그려내도 괜찮은 걸까 싶었다. 취향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고 했던가. 누군가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순간을 이야기했다. 어느 쪽이든 그 환상들은 그들을 닮았다. 놀랄 만큼 그랬다. 그들은 말하면서 조금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이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멋쩍어했는데, 나는 그들이 그런 휴일을 보내는 모습을 명료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들을 휴일로부터 가로막는 장애물들까지도. 이후의 촬영은 대부분 그 질문들에 의지해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꿈속의 나는 대체로 누군가와 싸우거나 누군가에게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다. 가진 것들이 전부 까발려지는 꿈들을 꾸기도 한다. 그런 날의 꿈에서 깨고 나면 비겁하게도 안도감이 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별 것 없는 세계가 아직 멀끔히 남아있다는 것에 평안함이 생기는 것이다. 꿈 속의 내가 상상하는 완벽한 하루는 잠에서 깬 나의 하루와 같을까? 가끔 좋은 꿈을 꾸는 날에는 깨고 났을 때 모든 걸 빼앗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결국에는 금방 잊어버리는 것들이다.

내가 꾸는 꿈이 나의 심리를 반영한다는 류의 이야기들을 종종 본다. 나는 언제나 불안해하고 언제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하니까. 하기사, 그렇다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꿈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니까. 정말로 기억 속에 남는 건 유달리 이상한 꿈들 뿐이다. 비몽사몽간에 글감이 될까 싶어 카카오톡에 메모를 해둔다. 그러고 나면 두고두고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나를 말하지는 못하겠지.

 

이십만원의 책값을 제외하면 내 가장 완벽한 하루는 크게 현실과 괴리감이 있지는 않다. 작업실에서 광화문까지는 이십 분 정도면 갈 수 있어서 유날리 농땡이가 치고 싶은 날이면 아주 여유로운 사람이 된 척 그리로 도망을 친다. 날씨는 자주 별로고 가끔은 사람이 너무 많고 쓸데없는 알림들은 자주 울리지만. 버거킹은 오늘도 삼천원 이벤트를 한다든가, 그런 것들. 거기에 바람들을 살짝 덧붙여 이상적인 날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순간은 현실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쪽으로 아주 살짝 가까이 있구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이미 거기에 꽤 가까이 엉덩이를 끌어다 놨던 것이다. 내가 던졌던 질문들의 효능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꿈으로 돌아와 본다. 그런 꿈이라면 꾸면서도, 깨고 나서도 불쾌하지 않을 텐데. 빼앗긴 거래봤자 구름 없는 하늘 정도. 어쩌면 안도할 필요조차 없어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 이미 여러 번 꾸었다면 어떨까. 지금도 몇 번째 꾸는 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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