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14. 감히 그렇습니다.

세점사이의 열네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04.10 | 조회 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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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열네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날씨가 훅 더워졌다가 훅 추워졌어요. 일찍 핀 꽃들은 부동산 사기(...)를 당한 기분도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긴 겨울을 지나고 나니 비의 존재가 너무 생소하더라구요. 일정 사이사이 자리잡은 비소식에 적잖이 당황을 했습니다. 양말이 다 젖는 경험, 너무 오랜만이더라구요.

사실 이번 비가 사진을 찍는 저에게는 참 미운 존재였지만 남부의 가뭄과 전국 곳곳의 산불에 이번 비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비소식도 그럴 테지요. 올여름에는 장마가 아주 무겁다고 합니다. 저는 겸허하게 레인부츠나 한 켤레 장만해야겠어요. (맞습니다. 레인부츠를 사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묵직한 비구름이 담긴 사진들을 좀 공유해 볼게요. 저는 사실 날씨를 가리면서 사진을 찍진 않아요. 오히려 날씨운이 워낙에 없어 초탈한 축이거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굉장한 대자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집 뒤의 도봉산은 비소식이 있으면 멋진 여름구름을 만들어요. 이 사진은 공을 좀 많이 들인 사진인데요, 135mm의 망원으로 찍은 사진 수십장을 합쳐 만들어진 한 장이랍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굉장한 대자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집 뒤의 도봉산은 비소식이 있으면 멋진 여름구름을 만들어요. 이 사진은 공을 좀 많이 들인 사진인데요, 135mm의 망원으로 찍은 사진 수십장을 합쳐 만들어진 한 장이랍니다.
저는 비 하면 항상 제주도가 떠올라요. 갈 때마다 정말 천방지축 어리둥절인 날씨를 선사하곤 했어요. 렌즈에 맺힌 저 빗물이 보이시나요?
저는 비 하면 항상 제주도가 떠올라요. 갈 때마다 정말 천방지축 어리둥절인 날씨를 선사하곤 했어요. 렌즈에 맺힌 저 빗물이 보이시나요?
하지만 저 날 아침까지만 해도 저렇게 멋진 일출을 보여줬답니다. 그런데 이제 저게 다 비구름이었던 거죠.
하지만 저 날 아침까지만 해도 저렇게 멋진 일출을 보여줬답니다. 그런데 이제 저게 다 비구름이었던 거죠.
버스에서 내려 폭우속을 걸어가던 때. 저 먼 하늘이 푸른 걸 보며 희망을 가졌지만 저쪽도 점점 짙어져만 가더라구요.
버스에서 내려 폭우속을 걸어가던 때. 저 먼 하늘이 푸른 걸 보며 희망을 가졌지만 저쪽도 점점 짙어져만 가더라구요.
하지만 하루가 끝날 때쯤엔 아주 멋진 무지개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끝날 때쯤엔 아주 멋진 무지개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무지개를 한 장 더 보여드릴게요.
무지개를 한 장 더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한바탕 폭우 이후의 멋진 노을. 영화 같죠.
그리고 한바탕 폭우 이후의 멋진 노을. 영화 같죠.

날씨운이 워낙 안 좋아서인지, 비를 생각하면 복잡한 애증이 생깁니다. 하지만 비가 온 다음날의 하늘이 아주 멋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비 이야기는 이쯤 하고, 오늘은 사진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해요. 글 보여드릴게요.

 


감히 그렇습니다.

사진 일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뒤늦게야 정신이 좀 들었다. 전에는 넋이 나가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자연스레 새로운 걱정으로 떠올랐다. 가장 먼저 생긴 걱정은, 정말 소소한데, 손님을 맞을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였다. 예전에 일하던 학원업계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워낙에 심했다. 편했던 곳은 그냥 슬리퍼를 끌고 와서 수업을 해도 좋다고 했고 심했던 곳은 첫날 나의 컨버스 운동화를 지적했다. 그 날 나는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는데도. 학원에서 일하는 내 친한 친구는 매일 잘 세팅된 정장 차림으로 출근을 한다.

사진 쪽에서는 어떤 게 정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년 전에 면접을 봤던 웨딩 스튜디오에서는 잘 세팅된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길 요구했다. (그런데 시급은 3000원이었었지 아마) 아는 다른 사진사는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손님을 맞이한다고 했다. 사진 스튜디오 면접을 보러 갔다가 옷차림이 너무 정석적이라 퇴짜를 맞았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도 들려왔지. 여기도 어지간히 중간이 없는 업계구나, 생각했다. 최근 몇년동안은 일본식 캐주얼 무드를 가진 펑퍼짐한 모양 옷들이 여러 모로 마음에 들어서 그런 방향의 옷차림들을 고집하고 있다. 사실 남이사 누가 신경쓰겠냐마는, 얼마 전까지는 손님을 볼 때 그런 옷을 입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옷장 앞에서의 시간이 나름 길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말을 봤다. 글쓴이는 ‘프로 사진사는 자신의 개성과 방향성을 모두 지우고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야 하는 거’라고, ‘클라이언트에게 거스르며 감히 자신의 색을 넣을 거라면 밥을 굶고 예술을 하든가 썩 꺼지고 취미 사진이나 찍으러 가라’고 말했다. 어조가 과하게 공격적이었어서 할일 없는 누군가가 남들의 화를 돋구려 일부러 쓴 글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의외로 댓글란에는 거기에 동조하는 반응들이 좀 있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사진을 찍는 일에 대한 어떤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겠냐마는,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은 말들이었다.

요새는 옷차림을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옷장(정확히는 행거) 앞에서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긴 하지만 내가 감히 이런 것을 입어도 되는가에 대한 걱정은 없다. 늘 비슷한 방향성의 사진들을 만들다 보니 나에게까지 오는 손님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련히 좋아하겠거니,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있다. 적어도 손님을 만날 때 깔끔한 셔츠와 슬랙스를 입지 않았음에 성낼 사람들은 아니라는, 그런 작은 믿음.

부모님은 여전히 나의 펑퍼짐한 옷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잘 들어봐, 나는 허리가 비교적 얇고 허벅지가 두꺼워서 늘 허리 치수를 과하게 크게 사야 했는데, 이것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 그리고 대체로 짧게 나오니까 기장을 수선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사진을 찍으려면 활동성도 좋아야 하니까 이건 기능적으로도 나한테 최적인 옷들이야. 실용성에 입각한 이야기를 해도 납득할 수 없는 눈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팔기 위해 밀고 가는 일은 실용성에도 불구하고 벌룬팬츠를 좋아할 수 없는 이들을 모두 포기하고 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건 돈이 안 된다는 뜻이고 돈이 안 된다는 건 많은 돈이 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보같은 버티기겠지. 인터넷에서 본 그 글을 쓴 사람은,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은 나에게 주제넘는다며 화를 낼까?

 

사진에 대해서 남에게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짐짓 진지한 태도가 된다. 진지한 말들의 끝에는 언제나 그래서 왜 그걸 담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결국 프레임 안에 담기로 결정한 것들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결정이 담긴다. 다시 말해 내가 사진을 찍는 모든 순간은 내가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해 고민한 길고 긴 시간들이 모두 담긴다. 누군가의 모든 ‘그냥’은 ‘하필’ 그 순간을 향한다. 아무 의도 없이도 의도 있는 사진들이 담긴다. 내가 쌓아온 미감이 눈과 몸과 머리에 익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진을 찍으면서만 쌓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감히 색을 넣지 말라고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살아온 삶 모두에 감히를 붙이는 일.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사진에 확신은 없다. 나의 시선이 타인을 완벽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구현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상을 살았으므로 그저 적당히 성근 필터로 굳이 나를 읽어주는 이들의 넓은 온정에 기댈 뿐이겠지. 사실 ‘나만 재밌는 이야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도 하곤 한다. 회식 자리에서 눈치없이 떠벌거리는 사람으로 사는 건 아닐까?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나의 ‘왜’를 읽어주는 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없다.

하지만 종종 내가 만든 것들에 대한 해석을 조심스럽게 제시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나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디 구석에서 킬킬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의 구조와 교훈과 메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다. 이들은 그치지 않고 거기에 대한 호오를 나눠주기도 한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큰 셔츠와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나타나도 하나도 놀라지 않는 이들.

 

그래서 가격은 늘 고민이었다. 사진을 처음 시장에 내놓았을 때는 타인에게서 오는 미묘한 확신조차 전혀 없었어서 무작정 저렴한 가격을 붙였다. 물론 그 때는 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고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덜 되어 있던 시점이기도 했지만. 두 시간 촬영에 겨우 몇 만원을 받고 돈을 받았다고 좋아했던 기억들이 있다. 소요되는 시간들을 모두 생각하면 최저시급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나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까 두려워 그 가격을 무작정 고수했다. 사진을 조금 더 찍다보니 비로소 주변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이 보였다.

생각이 크게 두 가지로 흘렀다. 이렇게 사진을 공급하는 건, 사진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내 방향성을 좋아해주는 이들의 마음의 값어치를 깎아내리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그건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음, 그러니까 나는 나의 가장 비정한 착취자였다. 내 노동의 가치를 가장 형편없이 깎아내릴 수 있는 사람이자 내가 가진 미감의 가치를 가장 철저하게 구겨버릴 수 있는 사람. 그것은 타인도 아니고 나. 물론 당장의 일을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다만 내가 그 중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좀 더 고집을 피우기로 한 거지. 돈 많이 드는.

어쩌면 그 결정들이 확신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비싼 돈을 받고 있지는 않다. 소요되는 시간에 얼추 최저시급 만큼을 곱한 돈을 받는다. 적어도 내 노동에 그만큼의 가치는 있다는 생각이랄까. 언젠가는 더 높이고도 싶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 나는 나의 어렴풋한 작가주의에 가치를 매기기로 한 거다. 손님들 앞에서 벌룬 팬츠를 입기로 결정하기까지의 시간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름답다고 결정할지에 대해 고민한 시간들에 대해서. 그게 오히려, 좋아해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굳이 언급해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렴을 나의 미덕으로 놓지는 않기로 했다는 거지.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태생적으로 사랑을 몰고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니므로, 작가님 사랑해요, 하는 후기를 한아름 안고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처럼은 될 수 없겠지. 어쩌면 이런 뚝심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종류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꿋꿋이 가야만 하는 마음이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설픈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분주히 고민하고 연습해야 하겠지. 사실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매일매일 다른 회사에 이력서 쓰는 상상을 한다. 사업체 운영 경험은 좋은 자소서 꺼리가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과잉의 세계에서 타인이 나에게 굳이 연락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인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좋아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어느 쪽에게나 굉장한 행운이 필요한 일이므로. 정작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마음을 다한 애정을 준 적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음, 글쎄. 그러므로 나는 거기에 장엄함을 느낀다.

이 모든 이유로, 나는 감히 나여야만 하는 것이다. 옷을 걸쳐입고 집 밖을 나올 때 고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미지들을 기꺼이 제안하고, 내가 결정한 시선을 담아 기꺼이 그들을 분석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아름답고 감사한 일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곧 끝이 올지도 모르지. 그러나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나는 내가 나였으면 좋겠다. 통 큰 바지의 펄럭거리는 허벅지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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