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16. 완벽한 콜라 한 병

세점사이의 열여섯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04.23 | 조회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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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열여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저번에 미용실에 갔는데 미용사 선생님께서 여행은 좀 다녀오셨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생각해 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 참 좋은 계절이기는 합니다. 날씨가 부담이 없고 적당히 파릇파릇하구요. 딱 짜인 휴가철이 아니다 보니 사람도 비교적 적어서 그것도 장점이겠습니다. 이런 시기의 여행을 떠나기에 프리랜서만큼 좋은 고용 상태는 또 없겠습니다만 그건 또 그것대로 쉽지가 않죠. 바빠서 갈 수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돈이 없었던 것도 크지만요 후후.

 

한편으로는 요즘 여행들을 또 많이 가더라구요. 저는 사람들이 일본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어요. 마치 이어달리기처럼 일본에 가더라구요. 저는 일본에 가본 적이 아직 없긴 하지만,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영화 '윤희에게'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구요, 버킷 리스트에 눈이 많이 온 홋카이도에서 화보를 찍어보는 것이 있기도 해요. 해볼 만할까요?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지난 여행을 곱씹는 사진들을 좀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직장을 관두고 떠난 2020년 제주도의 여름입니다.

2020년 여름, 코로나 시기에 간 첫 여행이었어요. 숙소는 내내 같은 곳을 잡아두었는데, 공간이 참 좋았습니다.
2020년 여름, 코로나 시기에 간 첫 여행이었어요. 숙소는 내내 같은 곳을 잡아두었는데, 공간이 참 좋았습니다.
하늘의 질감에서 굉장한 무더위가 느껴지지 않나요?
하늘의 질감에서 굉장한 무더위가 느껴지지 않나요?
철저히 제주도적인 풍경도 봤구요.
철저히 제주도적인 풍경도 봤구요.
여기는 우도입니다. 버스를 잘못 타서 섬을 가로질러 한 시간 남짓 걸었어요.
여기는 우도입니다. 버스를 잘못 타서 섬을 가로질러 한 시간 남짓 걸었어요.
더위를 잊고자 사진을 많이 찍었더랍니다.
더위를 잊고자 사진을 많이 찍었더랍니다.
이건 제가 참 좋아하는 새별오름의 사진입니다. 빛이 내려오는 게 참 장엄하죠.<div><br></div>
이건 제가 참 좋아하는 새별오름의 사진입니다. 빛이 내려오는 게 참 장엄하죠.

그리고 이건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참 많아 감사한 사진. 새별오름의 빛내림입니다.
그리고 이건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참 많아 감사한 사진. 새별오름의 빛내림입니다.
바다 앞 카페와
바다 앞 카페와
참 아름다웠던 물결.
참 아름다웠던 물결.

오늘 보여드릴 글은 제가 종종 다뤄왔던 주제이기도 한데요, 머릿속의 소란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벽한 콜라 한 병

만약 내가 백 년쯤 전 홀로 길거리를 떠돌다가 어느 서커스단에게 발견되었다면, 일 주일쯤 뒤에 다시 길거리로 복귀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커스단의 주인은 나에게 공을 저글링하면서 외발자전거 타는 걸 시키다가 결국 포기하고 나에게 공이든 외발자전거든 집어던졌겠지. 그런 확신이 있다. 둔한 몸도 몸이지만 멀티태스킹에도 재능이 끔찍하게 없다. 남들이 과자나 젤리같은 걸 집어먹으며 일을 한다는 이야기도 사실 신기하다. 물론 주전부리를 들고 책상 앞에 앉는 일은 자주 있다. 그러나 나는 금방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젤리를 집어먹는 데에만 집중하게 된다. 집중을 유지한 상태에서 양쪽을 오가는 것은 내겐 어려운 과제다.

한 때는 음악을 들으면 공부가 잘 된다고 착각을 했다. 이제는 그냥 그 때의 내가 음악을 듣고싶었을 뿐이었다는 걸 안다. 누군가는 음악을 들을 때 정말로 공부가 잘 되는지도 모르지만, 음, 나는 확실히 아니었다. 소리와 머리를 따로 굴리기엔 내 집중력은 너무 나약해서. 나는 얼마 안 가서 음악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되었고, 종국엔 그걸 더 잘 듣기 위한 음향기기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삿말을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 싶어 알지도 못하는 팝송도 잔뜩 들어봤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외국 락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한 번에 하나씩만. (물론 후순위로 밀려나는 건 언제나 일과 공부.)

 

사진을 보정하는 일은 어느 정도 작업의 갈피를 잡은 뒤부터는 단순 작업에 가깝다. 컬러를 맞추고, 명암을 잡고, 피부를 정리하고, 이목구비나 턱선을 만지고. 한 세트의 촬영에서는 대체로 같은 공간 같은 빛의 같은 사람을 다루기에 작업 중 취하는 행동이 그리 다양하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어김없이 꾸벅거린다. 보정 도중 조금이라도 도파민을 얻고자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한다. 집중력에 해가 된다는 건 알지만 졸음보단 산만이 낫지. 하지만 요새는 음악에조차 무감해져 버렸다. 일하면서는 어떤 좋은 곡을 들어도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분명 처음에는 정말 멋진 곡이었을 텐데. 그러니까, 찜질방 안마의자에 질리는 것처럼.

탄산에 진심인 편이다. 요새는 제로 음료도 많이 나와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자주 마시고 있는데 (몸에야 어차피 안 좋긴 하겠지만) 사실 언제나 최고의 맛은 아니다. 캔을 따고 나서 한두 모금까진 정말 행복하지만 그 뒤로는 왠지 부담스럽다. 아닐 때도 있지만.

몇 년 전에 우도에 갔을 때였다. 그 날은 500ml 콜라 페트 한 병을 단숨에 다 마셨다. 해녀의 집에 가볼 생각으로 섬 초입의 항구에서 버스를 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버스를 잘못 탔다는 걸 알았다. 나는 목적지의 정확히 반대편에 있었다. 구름도 없는 37도의 여름. 가방엔 커다란 카메라와 렌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고. 면허가 없어 바이크 같은 건 빌리지도 못했다. 핸드폰을 켜 섬 반대편까지 걸어가는 데 얼마나 걸리나 찾아보니 51분 정도가 찍혔다. 나는 반쯤 녹아내려가며 섬을 가로질렀다. 음악을 들을 기운도 없어서 그냥 시골길을 조용히 걸었다. 이따금씩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콜라부터 시켜 단숨에 전부 마셨다. 엄밀히 말하면 콜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콜라가 필요했고 오직 한 병의 콜라만을 위해 한 시간을 걸었다. 그냥 그 순간에는 500ml가 전부 행복했다. 다른 일은 없었다.

 

아까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됐다. 그 당황스러운 고요가 참 좋았다. 하던 일은 다 날아가 버렸지만. 아무것도 듣거나 보고싶지 않은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무작정 방 밖으로 나가서 걷곤 하는데 바로 뒤에 산이 보이는 동네지만 온갖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금방 깨닫는다.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 소리와 카페의 노래와 노래와 노래. 한 번은 지인과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좀 하려는데 문득 배경으로 틀려 있는 음악이 귀에 훅 들어왔다. 여자 가수였는데 온 힘을 다해 지르는 고음이 참 애절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별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이별노래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게 슬펐다. 나 역시 고요를 찾아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노래를 들었다면 신경질 나는 소음으로 인식했겠지. 카페는 북적거렸고 고급 원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천오백 원이었다. 내가 라이브 카페에 앉아서 이별 노래를 하는 상상을 잠시 했다. 외발자전거를 탄 채 저글링을 할 줄 알게 된다고 해도 손님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 애절의 낭비. 내가 만들어온 모든 애절들 역시 대부분의 순간에는 노이즈였을 것이다. 캔 콜라의 끝에서 세 번째 모금.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밥을 먹은 뒤엔 탄산 음료를 마시고 싶어하고, 일호선 지하철의 소음을 막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그러면서도 슬퍼하는 거지. 귓속에 들리는 그런 애절함들과는 별개로. 디지털 시대의 물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새인지도 모르겠다. 유튜브를 틀어놓은 채로 보정을 하고, 일호선의 혼잡을 가리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책을 읽고. 애절한 이별의 비명을 뒤로한 채 카페에서 잡담을 하는 일상. 그럼에도 슬퍼하는.

퇴근을 하면 보통 열 시가 좀 넘는다. 주변을 정리하고, 씻고, 정신을 좀 차리면 열두 시쯤. 보통 모두 잠들어서 주변은 조용하다. 잠드는 일 말고는 해야 할 일이 없는 때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좋아하는 곡들의 소리가 얼마나 잘 만져진 소리인지 생각한다. 그들의 이별이 슬프고 애절이 애절하다. 노래만 듣는 밤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저마다의 탁월이 비로소 빛나는 순간들. 그런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고요다. 내 시간이 음악을 듣는 것, 그 외에는 고요로 가득차야 한다. 만들기 어려운 조건이다.

 

종종 내 사진을 보고 사진이 너무 무거운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곤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산만한 내 시선에는 그런 약간의 답답함이 필요했다. 얇은 종이 위의 문진, 혹은 무거운 겨울 이불의 기분 좋은 압박. 나는 지금도 손가락을 꽉 깨물며 내 생존을 확인한다. 나의 고요는 무작정의 침묵은 아니다. 그것이 서슬퍼런 정적일 필요는 없다. 제주 곶자왈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숲에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나무들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났다. 그것들은 모두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분명 고요함이기도 했다.

 

인물이나 제품 사진을 찍을 때 종종 검정색 폼보드를 피사체 가까이에 가져다 댄다. 그러고 나면 잡다한 반사광들은 곧 사라진다. 그렇게 피사체는 잡색이 끼지 않은 자신의 온전한 색을 되찾는다. 집중해서 글을 써야 할 때면 헤드폰을 끼고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재생시킨다. 그러고 있으면 바깥에서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하나의 감각이 지워진 상태에서, 혹은 어쩌면 하나의 감각이 짓눌린 상태에서 나는 가장 깔끔한 시야를 가진 채 생각을 할 수 있다.

요즘의 삶은 자주, 너무 밝다. 너무 밝아 사물의 윤곽과 질감을 온전히 볼 수 없다. 모두가 매끈한 평면이 되어서 닿는 순간 미끄러지듯 스쳐가고 만다. 그래서 소중하기 전에 사라진다. 가끔 떠나고 싶다. 나는 한 번에 하나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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