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26. 어쨌든 웃기고 싶어

세점사이의 스물여섯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10.23 | 조회 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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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스물여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저는 글을 쓰겠답시고 비싼 키보드를 샀는데요, 요며칠은 또 손으로 직접 글을 쓰고 싶어져서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글 쓰는 건 딴짓을 하기 너무 좋거든요. 아이패드로 콘티를 짜고, 만년필로 노트에 옮기고, 그걸 다시 타이핑하며 고치는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고 있어요. 집중력이 없어서 이게 무슨 낭비인가 싶네요. 오늘은 제가 결코...놓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인데요, 바로 유머입니다. 웃기는 소리에 대해서 나누어 봤어요.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웃기고 싶어

수업에는 자신이 있었다. 조금 자만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수업에 들어갈 때 겁을 먹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어찌저찌 살아가다 보니 내 말솜씨는 제법 그럴싸해져서 나는 해야 할 이야기들을 하는 걸 넘어서 나름의 재간까지 부릴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 자체는 무섭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무서운 건 다른 쪽이었다. 예를 들어서, 수업 듣기에 질린 학생들이 이렇게 말할 때 두려웠다. 선생님, 재밌는 이야기 해주세요. 그 말을 들으면 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겁에 질렸다. 대체 재밌는 이야기라는 게 뭔데. 여러분이 최불암 시리즈 그런 걸 듣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녜요.

나는 딴 건 몰라도 개그맨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연극을 하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동시에 웃음기 없는 대화를 견딜 수 있는 대범한 사람도 아니어서 사람들을 웃기기 위한 개그 외의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나의 선택은 잔잔바리 변화구였다. 자연스러운 흐름 사이에 예측을 벗어나는 단어들을 한두 개씩 섞고, 괜찮은 비유를 살짝 비틀어서 묘하고 우스운 쪽으로 모양을 냈다. 학생들은 내가 교양있어 보이는 한자어 어휘들 사이에 첨단의 인터넷 유행어들을 섞어 문장을 펼쳐나가거나 고전 문학을 설명하면서 현대적이고 생활에 밀착된 예시를 드는 것들을 좋아했다. 이걸 반복하다 보면 나름대로 수업의 리듬이 생겼다.

 

개그맨이 될 수는 없어도 내가 무대 체질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모든 무대 위에서 나는, 웃기고 싶었다. 소심한 성격과 화려한 언변이 더해지면 이상한 시너지가 나온다. 웃기지 않으면 탈락할 것만 같은 이상한 룰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살았다. 내 말을 들은 타인이 웃고 있지 않으면 괜히 혼자 불안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냥 자의식 과잉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누가 내 말을 듣고 웃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내 직업이 코미디언도 아닐 뿐더러, 뛰어난 코미디언들조차 종종 남들을 웃게 하는데 실패한다. 하물며 국어 수업이나 사진 수업 같은 걸 하고 있으면서 상대방이 매 분 매 초 웃기를 바라다니 이거야 말로 괴상한 심보인 것이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그건 선방한 강의다. 그걸 머리로는 안다. 그럼에도 내가 웃기는 현장의 웃기는 주체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강의나 발표를 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웃기고 싶다. 일상 속에서 잔잔바리 대화를 할 때도 상대가 웃지 않으면 불안하다. 웃긴 이야기를 하지도 않으면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상대방이 웃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셔터만 누르는 주제에!

차라리 무술을 배워 무림 고수라도 되겠다고 하면 몰라, 털끝도 안 움직이면서 남이 뭐 어떻게 해주길 바랄 거면 개그가 아니라 장풍을 연마하는 게 합리적일 거다.

이런 사진을 찍으면서 웃기기를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겠죠 아무래도
이런 사진을 찍으면서 웃기기를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겠죠 아무래도

멋진 에세이들을 쓰시는 양다솔 작가님은 그의 책과 책 바깥에서 자신을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정의한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지인 같지만 그냥 나 혼자서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해놓은 사람이다) 그 정의가 감명깊어서 종종 그 표현을 훔쳐 쓰곤 하는데 (물론 그는 실제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사람이다) 그의 자기표현을 자주 흉내내지만 내가 따라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대범함. 웃기지 않을 여유다. 그는 여러 일들을 거쳐, 웃길 필요가 없을 때 웃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기꺼이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그는 그 결과 냉랭해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기꺼이 아무말 하지 않는 건 너무 어렵다. 애초에 수업이나 발표 도중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으면 그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데. 대신 나는 반대 방향으로 활로를 찾았다. 정색의 몫을 타인에게 안겼다고 말하면 너무 이기적인가? 어처구니없이 안 웃긴 이야기들을 골라서 하나도 안 웃긴 타이밍에 말하는 건 나의 장기이자 취미다. 가장 짜증나는 형태의 말장난들을 가져다가 말 사이에 끼워넣으면 상대방은 이내 정색해 버린다. 하지만 곧 나는 다시 대화를 시작하며 웃길 수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웃김과 안 웃김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인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가장 좋은 점은 그 둘의 방법론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말이 나오는 타이밍이나 빌드업의 차이에 따라서 나는 그 말이 웃길지 안 웃길지를 어느 정도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전능감마저 느껴진다. 이러니까 무슨 굉장한 언어의 마술사 같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무슨 대단한 웃수저는 아니고 비결은 그냥 끔찍하게 안 웃긴 말장난 뒤에는 아무리 형편없는 꽁트를 해도 꽤 웃기다는 걸 받아들인 데에 있다.

이 사진은 왜 여기 들어왔을까요? 이것이 바로 침묵을 견디지 못해 들어가는 아무말 같은 겁니다.
이 사진은 왜 여기 들어왔을까요? 이것이 바로 침묵을 견디지 못해 들어가는 아무말 같은 겁니다.

아무튼간에, 나는 웃기기에 미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클래식한 개그를 하지도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면 굳는 주제에 대체 무엇이 웃기단 말인가. 그래서 한 번은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웃음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고 나는 왜 하필 웃기고 싶었나? 사실 대화 상황에서 분위기를 잡는 방법은 웃기기 말고도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나는 굳이 웃기기를 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체로 일단 웃겼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변화구를 던져 실소하게 하는 작품들이 나는 참 좋았다. 그런 웃음의 과정에서 누군가를 업신여기지 않고 다같이 웃을 수 있다면 가장 좋았다. 각자의 최선이 모인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수습하기 어려운 아사리판이 펼쳐지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이 더이상 숨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내는 것. 그 순간 불경하게도 웃음은 터져나온다. 그게 참 좋았다. 내 유머들이 항상 공들인 것들과 삐끗함 사이를 오가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결국 좋아하는 방식으로 웃기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 방식의 웃음들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드러내고 또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웃기고 싶었다. 웃기기 위해 노력하며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의외로 꽁트에 능했다는 것. 나는 기꺼이 누군가가 되어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사실 나의 말은 원래부터가 연극적인 구석이 있다.

이제는 강의를 할 일이 거의 없다. 학원에 출근하지도 않고 사진 강의를 멈춘 지도 좀 됐다. 요새의 일들은 대부분 사진을 찍거나 부차적으로 글을 쓰거나 하는 일들. 그래서 사진으로는 어떻게 웃길 수 있을까 고민한다. 어느 순간 문득 사진으로도 웃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웃기지 않는 사진은 어느 정도 찍을 수 있게 되었다는 자만심이 생겨서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사진으로는 어떻게 웃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데 있다. 철 지난 개그처럼 얼굴을 구기거나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들을 비아냥대는 식으로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웃기지도 않고.) 모두까기를 한답시고 비겁하게 만만한 이들의 벌거벗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싫다. 그게 쉽게 허영심을 느끼는 방법이긴 하겠지만. 사진을 기획하며 늘 충돌실험을 한다. 평온한 것들 두 개가 의외의 상황에 놓여있는 모양을 그리고 그 행간을 상상한다. 거기서 나오는 스파크를 더 연구하면 위트라는 게 생길까 고민한다. 어떤 비유를 만들까, 아니면 어떤 삐끗을 만들어 볼까. 말을 가지고 장난을 하듯 리듬을 만들 준비를 한다. 나는 내 유머가 일 분쯤 뒤에 웃겼으면 좋겠다.

그러나 웃기는 건 어렵고 그래서 요원한 일이다. 하여 또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굴리며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을 하거나 원맨쇼를 덧붙인다. 아직 사진으로 코미디를 할 만큼의 헤드룸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 가긴 가야겠지,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거기에 있으니. 어쨌든 나는 웃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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