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25. 구체적인 예쁨들

세점사이의 스물다섯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10.16 | 조회 179 |
0
|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스물다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저는 오랜만에 감기에 걸려서 조금 고생을 하고 있어요. 요며칠을 조금 바쁘게 보냈더니 면역력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그냥 반팔 반바지를 입은 채 밖에서 러닝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간에,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오늘은 저의 물욕 버튼들에 대해서 써 봤습니다. 바로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구체적인 예쁨들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아이패드를 꽤 유용하게 쓰는 편이라는 것이다. 아이패드를 넷플릭스나 유튜브 머신이라고 부르는 밈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자신감이 붙는다. 애초에 아이패드로 그것들을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웬만해서 뭔가를 본다면 큰 모니터로 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니까. 그 대신 나는 몇 가지 다른 일들을 한다. 애플 펜슬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매일 두 시간씩을 보내는 지하철에서 꺼내들어 전자책을 읽는다. 회의나 미팅이 있을 때 메모용 노트 대신 사용하거나 카페에서 사진 작업의 시안을 작성하기도 하고. 손이 직접 획을 그을 때 비로소 생각나는 것들이 있으니까. 또 뭐가 있을까, 간단한 일상 사진의 보정이 필요할 때는 리더기로 곧장 파일을 옮긴 뒤 모바일 라이트룸을 켜서 펜슬로 쓱쓱 보정을 한다. 아예 사진의 프리뷰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많이 쓰는 건 쓰는 거고, 사실 유튜브 같은 데서 보여주는 ‘아이패드를 위한 멋지고 참신한 활용 방안-’ 그런 걸 사용하지는 않는다. 삶을 굉장히 멋지게 만들어줄 것 같은 체계적인 신기능들이 주루룩 나오지만 그런 건 잘 모른다. 그 흔한 노션도 포트폴리오 만드는 용도로밖에 안 써봤는걸. 생각나는 일들이 있으면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써놓는다.

그래서인가 정작 아이패드를 나보다 훨씬 덜 사용하는 친구들보다도 섬세한 활용 방안에 대한 인사이트는 적다. 예를 들어 나는 디스코드의 사용 방법이나 페이스 타임같은 것조차도 전혀 몰랐다. 종이가 할 수 있는 일 말고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가끔, 가장 최신의 기기들을 그러모아 살면서 그걸 제일 구식으로 써먹고 있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정말 종이뭉치처럼 써먹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걸 잘 써먹고 있다는 주장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어쨌든 아이패드는 내 삶에 녹아서 나의 사고기능 일부를 완전히 대체했다. 어느 곳에서나 병목 없는 브레인스토밍을 하게 해주는 기계, 가장 아날로그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견인하는 전자기기. 그거면 충분하다. 이렇게 잘 쓸 줄 알았다면 12.9인치를 살걸.

일상 사진들은 요걸로 가볍게 보정을 한다.
일상 사진들은 요걸로 가볍게 보정을 한다.

왓츠 인 마이 백 류의 영상에 유독 약한 편이다. 유튜브에서 누가 자기 가방에 든 것들을 늘어놓는 썸네일을 보면 정신을 빼앗긴 듯 클릭해 버린다. 특히 일본 브이로거들이 찍어서 올리는 영상에 약하다. 일본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지만, 그 사람들이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참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 사람들은 간단한 물건들을 리뷰하며 곁가지를 참 많이 붙인다. 물건에 대한 에피소드와 그 물건을 사용하며 바뀐 구체적 생활상, 그것들로 만들어낸 최선의 결과물들. 예를 들어 카메라 렌즈를 리뷰할 때 그 사람들은 대체로 그 렌즈의 작은 크기가 촬영 시의 부담을 어떻게 줄여줬고, 어떤 망설임을 최소화했고 그래서 어떤 장면을 담을 수 있었고, 사고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편히 들고나갈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에 카메라 슬링 백에 방수 처리가 되어 있어서 촬영 시의 옷차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적어졌다거나, 그래서 좀 더 산뜻한 마음으로 영상 작업을 한다든가. (옷이 마음에 들면 그 날 하루가 맘에 드는 법이니까.) 예전에 돌던 유머에서 일본 드라마에서는 모든 면에서 교훈을 찾는다고 하던데 딱 그런 짝인 것 같기는 하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난 그런 것들을 듣고 싶어하는 편이다. 정확한 스펙 같은 건 네이버에 검색만 하면 나오는데 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사람들이 아무거나 리뷰를 한다고 해서 아무거에나 다 끌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 평균으로 볼 때 물욕은 많은 편이라고 분류해야 할 것 같다. 몇 살 더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한테 얼마만큼의 돈이 딱 주어진다면 그걸로 좋아하는 걸 딱 사고 돈을 모으기만 할 텐데. 그 때 생각했던 게 천 만원이었나 이천 만원이었나. 몇 년동안 적어도 천 만원보다는 많은 돈을 썼고 나는 여전히 세상의 온갖 것들을 원한다. 나에게 소중한 71억이 주어진다면 71억 8000원 정도를 써도 괜찮을지 고민하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뭔가에 꽂히면 스스로를 너무 능숙하게 설득해 버린다. 그걸 사야 하는 이유나 그것들이 가진 희소가치 같은 것들.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머릿속에서는 거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남을 부추겨 뭘 사게 하는 것도 좀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종이책의 질감이 좋다.
종이책의 질감이 좋다.

좋아하는 구체적인 물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컨버스 신발, 안경, 나일론 밴드 스트랩, 진청 생지 청바지, 면 자켓, 줄 이어폰, 만년필, 수동 렌즈, 키보드, 종이책, 뭐 그런 것들. 컨버스는 목이 높은 것이 좋고 안경은 금속 테인 편이 좋다. 키보드는 살짝 미색이 도는 것이 좋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나는 그런 물성을 좋아해’라고 말하고는 하는데 이게 엄밀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좋아한다. 저런 것들을 즐겨 사용하는 데서 그 사람의 삶이 얼추 그려지거나 유도된다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만년필을 즐겨 쓰는 사람을 보면 그가 굳이 수고를 들여 펜에 잉크를 주입하고, 세척을 하고, 손 글씨를 쓸 것이라는 걸 상상할 수 있다. 면 자켓을 입는다면 그의 평소 옷차림이 약간 캐주얼하면서도 완전히 격식이 없는 걸 원하지는 않는 축이라는 걸 생각해볼 수 있겠지. 그런 거다. 무엇보다, 저것들을 보면 구체적인 촉감을 상상해볼 수 있다. 생지 데님의 까끌한 느낌, 나일론 밴드의 오돌토돌한 광택, 금속 안경 테의 서늘함, 뭐 그런 것들. 나는 기꺼이 그런 것들을 그리고 싶어 서슴없이 좋아한다.

친구들은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네가 쓰는 물건들은 전부 다 예쁘다고. 예쁜 것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 예쁨의 면면이야 주관적이더라도 그 주관적인 미감이 한 데 모이면 묘한 아름다움이 나오는 법이다. 완결성을 가진 물건들을 좋아한다. 그 자체로 비어 있는 부분 없이 완성이 되어 있어서 도구로서 쓰일 준비가 된 것들. 사용자가 그 특성과 타협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게 되는 것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기가 충실해야 하고 약간의 고집이 있어야 한다. 아이패드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좋은 질감을 가진 물건, 단순성 위에 핵심적 디테일을 가한 물건. 그것들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포기하는지. 혹은 어떻게 비워나가는지에 대해서. 블로그에 아주 가끔씩 올리는 리뷰에도 대충 비슷한 내용들이 담긴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는 건 추상성과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다. 추상적인 것들을 한 데 그러모아 구체적인 그림을 만드는 일이고, 어느 정도는 땅 위에서 붕 떠있게 되는 일이다. 저것들의 질감을 만지고 있다 보면 땅에 발이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이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소비주의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는 언제나 인지하고 있다. 카드를 긁는 것만으로 좌표계가 고정된다면 세상 온갖 자아찾기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어. 하지만 둥둥 떠 흘러가는 삶에 내 경로를 닮은 손때를 남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며 내가 매료되었던 건 다른 것도 아니고 애플워치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사용하는지에 관해서였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애플워치 음성 메모로 사랑을 고백하고 행적을 읽고 목소리와 문자를 교차한다. 아마 그게 이 영화가 이 시대의 로맨스로 꼽히는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건을 통해 사랑을 기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은 모른 척하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콘셉트다. 나는 애플워치로 운동을 기록하고 시간을 확인하는 게 전부다. 아날로그 시계였어도 큰 차이가 없었겠지 생각한다. 물건 하나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가장 내밀한 삶의 방식이 나온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물건에 대한 리뷰나 칼럼 읽는 걸 좋아하지.

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아이패드를 종이 노트처럼 쓴다. 나에게는 그 방식이 가장 맞다. 멀티 태스킹이 불편하다고들 하지만 딴 짓을 너무 많이 하는 나에게는 멀티 태스킹이 안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요즘은 노트 위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컴퓨터로 글을 쓰다보면 딴 짓을 하도 많이 해서 스스로를 묶어 두고 싶었다. 왠지 손으로 쓰는 글이 머리도 잘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필압이 꽤 강한 데 비해 손목은 약해서 긴 글을 쓰면 금방금방 손목이 지치기 때문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만년필은 나에게 안성맞춤의 도구다. 예전에는 작은 글쓰기 대회의 상품으로 받은 라미 사파리 만년필을 사용했는데 얼마 전에 트위스비 에코라는 만년필을 샀다. 가볍고, 예쁘다. 몸체가 투명해서 안에 있는 잉크가 보인다. 좋아하는 초록색 잉크를 넣었다. (이 글은 그걸로 작성되었다.) 그렇게 쓴 글은 컴퓨터로 옮기면서 자연스레 한 번 퇴고를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살짝 미색이 도는 무접점 키보드를 거친다. 말캉한 타격감이 손 끝을 스치며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 우연인지 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의 글들은 대부분 종이 위에 쓰고 옮긴 것들이다.

쭉 나열된 일들에서 삶의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그게 웃기다. 그래서 스스로의 물욕 많음을 그렇게 안타까워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한 번 구매한 것들은 삶에 충실하게 녹여 내고 있어서. 돈이 좀 더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왓츠 인 마이 백을 찍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점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