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11. 영영 어설픈 아침

세점사이의 11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03.20 | 조회 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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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열한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완연히 봄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마지막 레터가 작년 11월이었으니 우리는 한 계절을 통째로 뛰어넘은 셈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겨울을 보냈는데요, 지난 겨울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들을 몇 개 꼽아서 먼저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정말 분주하게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아요. 겨울 동안의 목표는, 간결하게 말하자면 확장과 성장이었습니다. 사진도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주로 많이 촬영했고, 기존에 알던 사람들과도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쌓아나가려 노력했어요.

그리고 공연을 정말 많이 다녀온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밴드들이 콘서트를 많이 열어주셔서 홍대 주변을 자주 들락날락했네요. 멀지만...멀지만...!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습니다. 세 점 사이의 지난 회차에서 오늘 사이까지 약 3.5만장 정도의 사진을 촬영했네요.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고, 깨달은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사진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으니 나름 알찬 겨울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말할거리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아주 오래 전...) 이후로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고, 그리다 포기하고, 그리다 포기하고를 반복해왔는데 이제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바로 말씀드릴게요.


영영 어설픈 아침

요새는 매일 아침 그림을 그린다. 별 것 아닌 말인데 텍스트로 쓰고 나니 좀 낭만적으로 보이네. 크로키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고 정정하자. 이 스터디는 단체 채팅방에 최소 세 장의 크로키를 매일, 하루가 끝나기 전에 업로드하는 게 원칙이다. 프리랜서에게 특권이랄 게 있다면 별 일이 없을 때는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하루의 어떤 블럭을 사용해 일을 할지 정할 수 있다.) 저녁형 인간인 나는 기꺼이 오전을 여유롭게 보내는 데에 그 특권을 사용한다. 

그림 제출이 과제처럼 밀리는 게 싫어서 아침 루틴에 크로키를 포함시켰다. 침대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과 서글픈 마음으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커피를 옆에 둔 채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여유가 없는 날은 딱 세 장만, 그림에 재미가 붙은 날은 열 장씩도.

2023년 1월 1일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딱 두 달 하고도 반 정도를 이어나간 셈이다. 아침 루틴에 포함시킨 덕에 두 달동안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 없이 그림 그리기를 이어나갔다. 꽤 행복한 의외다.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오늘 저녁의 나는 언제나 어제의 나와 동일하거나 좀 더 무뎌진 사람이었다. 가장 처참한 실패를 겪은 건 독일어 공부였다. 독일어를 배우는 과정은 모든 부분에서 절망적이었다.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고자 했던 급작스런 열망이 만들어낸 두 학기짜리 비극. 나의 독일어 공부는 모든 부분에서 형편없었지만 그 모든 부분이 모여 만든 결과는 특히 더 형편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나는 독일에 교환학생을 가지 못했다. 코로나가 한창때였어서. 그리고 지금 나는 단 한 마디의 독일어도 읽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서 잊은 건 딱히 아니다. 모든 것이 헛돌아 생긴 종말이었다.

일 년동안 종이 위에 아무것도 못 써낸 사람이 되니 불쑥 그런 의문이 생겼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아닐까? 그 의문이 아마도 독일어 공부가 내게 던진 가장 큰 좌절이었을 것이다. 이후로 한동안은 내가 왜 뭔가를 포기했는지, 왜 뭔가를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걸로 타인과 함께하는 대화의 많은 부분을 구성했던 것 같다. 일종의 체화된 무기력이라고 유식하게 말할 수 있겠다.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프리랜서 일을 시작하면서는 다행히도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역시 헛소리가 많을 땐 바빠야 하는군.

무기력에서 벗어난 건 순전히 우연의 힘이었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작업실 월세가 궁했기에 나는 어디에서라도 돈을 끌어모아야 했다. 때마침 감사하게도 친구가 과외를 하나 넘겨줬다. 과외 학생은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에게 짧은 시간동안 글쓰기를 지도했다. 덕분에 커피가 공짜인 무신사 스튜디오에서 글쓰기 과외를 하는 이상한 광경이 한동안 펼쳐졌다.

글을 쓰는 앞뒤 시간에 학생과 스몰토크를 하면서, ‘그림을 좀 그려보려다 끈기가 없어 매번 포기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는 미술 자체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진지하게 죽을 맞춰 줬다. 어쨌든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렇게 그는 나를 본인이 속한 스터디에 초대했다. 선생님, 제가 대충 이런 스터디를 하고 있는데, 혹시 같이 하시겠어요? 못내 이끌리는 척을 하며 자연스레 흘러들어갔다.

첫 날 크로키를 제출하기 위해 오랜만에 드로잉 노트를 펼치니 인체인지 뭔지 모를 선들이 가득했다. 그림이라기보단 선더미라고 부르는 쪽이 맞을 것 같았다. 며칠쯤 연습하다가 포기한 흔적들. 능력이 따르지 않는 어설픈 완벽주의는 자기파괴적이다. 손목이 막막해졌다.

아침 일찍 크로키를 했지만 일부러 채팅방에 업로드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서, 그리고 부끄러워서. 하루가 지나며 천천히 올라오는 스터디원들의 그림을 보니 아무래도 나 빼고는 전부 전공자들인 것 같았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저녁쯤에야 그림을 올렸다. 첫 며칠간은 계속 그랬던 것 같다.

못난 그림그리기의 과정은 형편없이 반복된다. 이 강단없는 선은 영영 형편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미 응해버린 초대이므로 나는 매일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어떤 날은 세 장, 어떤 날은 스무 장.

스터디의 한 세션은 두 달. 그리고 매 세션의 끝에는 오프라인 모임이 있다. 지난 2월 말에 내가 이런 자리에 끼어도 될까, 하는 마음으로 오프라인 모임에 나갔다. 크로키 스터디에서는 모여서 어떤 걸 할까 궁금했는데 옹기종기 모여서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왠지 귀여운 사람들. 모임 중 꽤 긴 시간을 각자의 도구를 보며 즐거워하는 일과 서로를 모델 삼아 크로키 하는 것에 할애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현장에서는 그림을 못 그릴 줄 알았는데. 형편없는 내 그림으로 그려지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일단 머리를 처박고 그림을 그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엉성하게라도 어쨌든, 내가 뭔가를 그려내고 있었다. 긋고자 하는 곳에 선을 긋고 있었다는 거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 몸은 정말 이상해서 뭔가를 반복하면 어쨌든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진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뭐라도 배워낸다. 자연히 배운 것들이 많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 때의 그림이 종이 위에 그리는 것보다 유독 형편없어지는 이유나, 사람 몸의 자연스러운 비율 같은 것들. 새로 산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쓰고 나서부터는 좀 더 다양한 것들을 그려보고 있다. 이제는 결과물이 이상할지언정 겁내지 않고 그림 속의 손발을 그려낸다. 전신 그림에 머리칼과 눈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그리다 보니 자연히 됐다.

쇠락하기 시작하는 숯더미처럼 남은 삶을 보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이제는 하지 않는다. 사실 완전히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조금 덜 한다고 말하자. 걱정 대신 반복해야할 것들이 많다. 나는 크로키 스터디의 두 번째 세션에 참여하고 있다. 매일 아침 그림을 그린다. 사실 요새는 아침이 자주 바빠서 자꾸 밤으로 그림을 미룬다. 어쨌든 지금까지 지각이나 결석은 없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는 촬영 시안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거나 소설의 한 장면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림을 선물할 수 있어도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독일어를 배울 때가 올 것이다.

재작년쯤, 직장을 관두려는 고민을 한창 하며 친구들에게 했던 얘기가 있다. 나는 겨우 스물여섯인데, 누구를 만나서 할 수 있는 얘기가 학원 얘기밖에 없어. 애들은 사랑스럽지. 사랑스러운데, 나는 내가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계속 있으면, 여기서 그대로 멈춰있을 것 같아. 차라리 완벽하게 안 맞는 곳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학원이란 공간은 나를 가둬두기에 너무 알맞게 짜인 곳이었다. 물론 그 직장은 형편없는 직장이었지만.

결국 결정내린 퇴사는 짜릿했고, 지금 내 아침에는 특권이 있다. 아침에는 그림을 그린다. 바쁘면 세 장, 기쁘면 스무 장. 어느 쪽이나 스물여섯에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내 아침은 영영 어설퍼 영영 새어서 영영 흐르리. 여기보다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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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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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siwol

    0
    about 1 year 전

    다시 만나서 기분 좋네요 훌훌 읽고 후후 웃었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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