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28. 유럽에서는 그렇대요

세점사이의 스물여덟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11.06 | 조회 167 |
2
|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스물여덟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저는 대학생들이 졸업사진을 찍는 시즌이기도 해서 요새는 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글까지 쓰려니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프리랜서의 삶이란 바쁜 게 제일이죠. 오늘 글은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와중, 지하철에서 든 생각을 길게 펼쳐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보여드릴게요.

 

 


유럽에서는 그렇대요

오전에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니 대충 열두 시가 조금 안 되어 있었다. 주말이긴 했지만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지하철에는 제법 앉을 자리도 있고 분위기도 한적했다. 구석 자리에 푹 앉아 벽에 기댄 채 핸드폰을 봤다. 갈 길이 멀어서 핸드폰만 보려니 좀 질렸다. 원래는 이럴 때 아이패드로 책 보는 걸 좋아하지만 요새는 촬영 짐만으로도 부담스러워 잘 들고다니지 않는다. 잠깐 창 밖을 볼 겸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 자리에 비슷한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주욱 앉아 계셨다. 그들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각자 다 달라 살짝 흥미가 동했다. 맨 왼쪽 구석 두 자리를 차지한 부부는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할머니는 무릎을 모으고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팔다리를 넓게 편 채 커다란 신문을 넘기고 있었고, 그 옆의 할머니는 쪼그린 자세로 핸드폰을 보고 계셨다. 그들이 차지한 자리는 각자 손 위에 들고 있는 것들 크기만큼 넉넉했다.

그 모습을 잠깐 보다가, 책 얘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 하나 생각났다. 유럽에서는 대중교통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나? 유럽을 안 가봐서 그 나라 사람들이 정말로 그런지는 모른다. 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유럽 지하철에는 자리가 많을까? 하는 의문부터 떠오른다. 프리랜서의 몇 안 되는 장점이라면 9-6 출퇴근에 신경 쓸 필요가 덜하다는 건데, 그래서 늘 엇박 출퇴근을 한다. 보통 정규 출근 시간보다 한두 시간쯤 늦게 집에서 나와서 서너 시간쯤 늦게 집으로 간다. 그 타이밍에는 꽤 자주 앉은 채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중간에 환승도 없으니 그런 때면 구부정히 앉아 책을 읽는다. 경기도 일호선이 사실 조용하고 편안한 환경은 아니라서 복잡한 것들을 읽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려면 넘길 수는 있다. 아이패드나 종이책이 가방에 있다면, 적어도 그렇다.

왠지 핸드폰으로는 뭘 읽기가 어렵다. 아이폰 미니가 작다 뭐다 해도 사실 예전에 쓰던 전자사전 같은 것보다는 화면이 크고 가독성이 좋을 텐데 그냥 잘 안 읽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나에게 그만큼의 적극성이 없는 것일수도 있고. 그렇다고 지하철에 사람이 많을 때 손잡이를 붙들고서 한 손에 아이패드를 붙들고 있기도 뭐하다. 몇 번 해본 결과 팔이 너무 아픈 것도 아픈 건데 그냥 별로 그러고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꼭 앉아있을 때만. 그래서 내 독서는 들쑥날쑥하다. 자리 운이 없는 주간에는 그냥 한 주 내내 아무것도 읽지 않을 때도 있고. 그런 때는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SNS 피드를 새로고침하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고 있으면 왠지 초라해지는 기분.

오후 지하철의 햇빛
오후 지하철의 햇빛
차창 밖엔 가을
차창 밖엔 가을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종종 인터넷에서 공간을 예민하게 따지는 사람들을 보고 어차피 할 사람들은 어디서든 하는데 괜히 어정쩡한 놈들이 유난을 떤다며 씅을 내는 모습을 보는데, 그런 걸 보고 있노라면 괜히 찔릴 때가 있다. 책상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고장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이 지저분해도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진다. 음, 그리고 무엇보다 용도별로 공간이 나눠져 있었으면 좋겠어. 핑계가 많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그렇게 느낀다는 얘기다. 안타깝게도 모든 게 충족되는 삶을 살아본 적은 아직 없지만서도.

최근에는 지내고 있던 작업실에서 나와서 한 달 좀 넘는 기간동안 집에서만 일을 했다. 출퇴근하면서 하루 합산 두 시간씩을 버리는 것도 아까웠고, 월세를 비롯한 이런저런 부대비용도 부담스러웠어서. 그러나 집에 머물면서 온전하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거라는 건 착각이었다. 작업실을 나올 때쯤 컴퓨터를 좋은 성능을 가진 걸로 바꾸면서 능률이 두 배쯤 올랐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 배쯤 후진하는 걸 느꼈다. 나는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로 무너졌고, 일이 이렇게 밀린 적이 최근 일 년 들어 처음이었다. 새벽까지 어영부영 일이 밀리니 지내기는 게으르게 지내면서 컨디션은 컨디션대로 나빠졌다. 차라리 지하철을 타면서나 카페에 갈 때 머리가 더 잘 돌아갈 지경이었으니. 

집은 일하기 편안한 공간은 확실히 아니었다. 휴식과 유희와 업무와 공부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건 참 뭐랄까, 정신사나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내 방 책상 앞에서 맘 놓고 놀 수도, 아이디어를 짤 수도, 글을 쓸 수도, 보정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됐다. 온전한 하나만을 위한 부피가 필요하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심적으로도 그렇다. 나는 차라리 지하철에서 더 책이 잘 읽혔고 차라리 불편한 의자의 카페에서 글이 더 잘 써졌다. 곧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시 매일같이 지하철을 타고, 일을 하러 가서, 집에서는 쉴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따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것들이 무의미한 것이었다면 공간 디자인이니 스터디 카페니 하는 것들은 전부 광팔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겠지만서도.) 어떻게 보면 나는 내 공간을 판단하고 원하는 대로 짜맞춰 보는 호사를 누리는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참을 뿐이겠지. 아마 참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이야깃거리 자체가 호사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난 떤다고 씅내는 사람들이 성정이 나쁜 사람들이라 그렇겠는가. 맘에 안 들어도 참고 사는 사람들이라 그렇겠지 아마도.

빽빽함이 빽빽한 사람들의 잘못이겠는가
빽빽함이 빽빽한 사람들의 잘못이겠는가
그러려니
그러려니

어쨌든 나는 한산한 지하철을 자주 타고, 매일 일호선을 보고 비명을 지르네 뭐네 해도 어느 정도는 적응해 버렸다. 지하철은 나에게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공간이다. 자주 정신사납고 자주 사람을 화나게 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건 출퇴근시간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프리랜서인 나에게나 해당하는 얘기고,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9호선을 타는 사람이었더라면 지하철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들고 책을 읽는 일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이야기였을 것이다. 핸드폰을 들고 도파민을 채워 주는 영상을 보며 이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겠지. 버스를 타고 종로 일대를 휘 돌아가는 낭만이 만원 통근버스를 포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중교통은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공간이다. 그들이 한산한 시간에 지하철을 타더라도 호기롭게 책 한 권을 꺼낼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핸드폰을 보겠지.

그러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노부부, 신문을 펼쳐읽는 할아버지, 성경책을 읽는 할머니에게 지하철은 그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지하철이 아이패드로 밀리의 서재를 켜는 공간이듯이. (물론 이들의 삶의 질이 모든 곳에서 출퇴근하는 이들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하철은 각자에게 그 만큼의 여유를 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모두에게 그랬더라면 유럽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많이들 책을 읽는다던데, 하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었겠지. 사실, 나는 그래서 유럽 지하철 이야기를 싫어한다. 거기도 사람 많이 몰릴 땐 그냥 서 있을 것이다. 아니 그리고 일단 거기는 애초에 지하철에서 인터넷 안 된다면서요. 감히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웬만한 유럽 아무개보다야 책을 많이 읽겠지만서도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 없으면 그냥 별 수 없이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인스타그램 새로고침을 한다. 곁에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이 모두가 모두에게 타인.

 

나는 그래서 눈 앞에 놓인 평화로운 장면을 보면서 좀 슬퍼지고 만 것이다.

 

나이가 차니 슬슬 친구들이 각자 차를 장만한다. 운전면허도 없는 나는 그들의 차 생긴 감상을 다소곳하게 듣는다. 그들이 말하는 자가용의 장점은 다른 것보다도 길 위에 작게나마 자기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거였다. 어쨌든 혼자 앉아 기쁘든 슬프든 음악을 듣든 열이 받든 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야기가 조금 부러우면서도 왠지 서글펐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점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Sasiwol

    0
    6 months 전

    지하철은 제 손이 쥐고 있는 게 아니면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버스는 멀미 때문이라도 창 밖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좀 더 센치해지는 고런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청춘물의 흔한 배경이 버스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ㄴ 답글 (1)

© 2024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