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세 번째

세점사이의 세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2.09.19 | 조회 277 |
2
|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세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드디어, 평범한 월요일에 레터를 보내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저도 아마 작업실로 출근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가을은 정말 바빠요. 매일매일 밤늦게 퇴근을 하고 있답니다. 사실 바쁜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 다만 친구에게도 말했지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 바쁨이 의미있는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쁜 시간과 어떤 전환. 하여, 저의 이번 가을은 말 그대로 환절기라고 불러야 하겠네요. 여러분의 이번 가을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 보고 싶으신가요?

 

이번 주에는 제가 좋아하는 제 가을 사진들을 보여드릴게요.

공모전에 내기 위해 찍었던 사진이에요. 물론 똑 떨어졌습니다.
공모전에 내기 위해 찍었던 사진이에요. 물론 똑 떨어졌습니다.
나무, 그림자, 물. 제가 정말 좋아하는 느낌이 가장 잘 담긴 사진인데 왠지 남들이 좋아해주진 않는 사진입니다.
나무, 그림자, 물. 제가 정말 좋아하는 느낌이 가장 잘 담긴 사진인데 왠지 남들이 좋아해주진 않는 사진입니다.
예전에 포토로 참여했던 작업을 마치고, 그 동네 옥상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해 지는 게 멋지죠? 어쩌다 보니 이 동네에서 다시 작업을 하고 있네요.
예전에 포토로 참여했던 작업을 마치고, 그 동네 옥상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해 지는 게 멋지죠? 어쩌다 보니 이 동네에서 다시 작업을 하고 있네요.
햇빛 속에 잠긴 도봉산의 모습입니다. 이것도 정말 좋아하는 사진인데 저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햇빛 속에 잠긴 도봉산의 모습입니다. 이것도 정말 좋아하는 사진인데 저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알록달록 낙엽이에요.
알록달록 낙엽이에요.

세 번째 글을 보내드립니다. 저는 대학교 새내기 때와 성격이 많이 달라졌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조금 파고들면서 써본 글입니다.


흐물거리는 것들에 대해서

다분히 감정적이었던 어떤 오후들이 떠오른다. 그런 시간들에는 우울에 관한 한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 믿곤 했다. 요즘은 오후 햇빛이 행복 버튼처럼 작용하지만 그 때는 그조차도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우울했던 날들이다. 

내 동생은 어릴 적에 복통으로 학교를 종종 빠졌다. 스트레스성 복통이라고 했다. 학교를 너무 가기 싫어서 생긴 스트레스가 정말로 복통을 만들어 버린 거였다. 의사 선생님은 ‘본인은 정말로 아픈데 꾀병이라고 해서 억울할 거예요’ 하고 말했다. 어릴 때는 그걸 보고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몇 살 더 나이를 먹고 웃을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우울할 때마다 몸살이 났으니까. 우울해서 몸살이 났고 몸살이 나서 우울했다. 동생의 여덟 살 시절을 스무 살 넘어 겪은 셈이다.

 

사실, 몸살은 하룻밤 푹 자고 나면 사라지니 차라리 나았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우울감에 취해 쓴 글이나 그런 감정(및 약간의 알코올)에 취해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목격자가 생기는 건 몸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었고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았다. 생각난 것들에 대해 말하거나 써야 하는 성미는 그런 오후와 괴상한 시너지를 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워낙에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들을 못본 체 해주거나 웃어넘겨줬다. 아니면 마음을 열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어 주거나. 

하지만 평생 일어나면 몸살이 낫기를 바라거나 그런 호의를 기대하는 식으로 지낼 수는 없었다. 몸살을 원망하며 허비할 수 있는 날들도 한계가 있을 것이며 친구들의 마음에도 언젠가 바닥이 보일 테니까. 확실히 그런 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아니었다. 흐물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감정이 좀 안정된 것인지 스스로 나아지고자 했더니 마법처럼 나아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정신머리가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다. 이제는 친구들마저 속을 도저히 모를 사람이라고들 한다. 장족의 발전을 하다 못해 너무 멀리 왔다.

그렇다고 몇 년 전의 내가 완벽히 사라진 건 아니다. 입시 스타일 시 해석에 비유하자면 마이너스 요소로서 맘속에 있다. 남이 그러는 것도 싫고 내가 그러는 것도 싫다. 감정이 쏟아질 것 같으면 백스텝을 밟고 누가 나에게 한껏 무너지려 들면 질색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친다. 물론 질색하는 모습 역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도 어떤 면에선 내 감정을 쏟아내는 거니까. 아무튼 대충 그런 사람이 됐다.

 

작년 초쯤에 친구가 이상형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리는 없겠지만 리스트를 적으며 한 번 재미삼아 생각은 해보라는 투였다. 나는 거기에다 대고서 베버적 이상형인거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안 웃겼다. 마침 일하기도 싫은 참이었어서 곰곰 생각하며 리스트들을 적어 내려갔다. 리스트들은 대충 이랬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 확실한 취향을 가진 사람, 자신의 강단이 있는 사람, 그리고, 무너지지 않는 사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머지 모든 것들을 안았다. 무너지는 무너지는 무너지는 마음 없이.

한창 녹아내리던 때 늘 꿈꾸던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완전한 아웃사이더의 일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 앞에 완전히 무너지는 사랑. 상대방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는 하루들. 둘 중 어느 것도 마음처럼 해내지 못했지만. 이제 저걸 마이너스 포인트로 둬 버린 최근에는 누가 비슷한 걸 물어보면 상대방이 필요없는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좋아하는 역설이다. 말하고 보니 무슨 세상 비정한 사랑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서로가 너무 충만해서, 상대방이 없어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관계. 필요 없이도 유지되는 관계. 우와, 쓰고 보니 진짜 느끼해. 그럼에도 그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두 가지 문제를 만났다. 하나, 저만큼이나 딴딴한 인간은 실존하지 않는다. 둘, 근사치에 도달한 사람들을 내가 생각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랬다. 나는 무작정 단단한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실제로는 사랑이나 존경이나 그런 것보단 꼬움을 먼저 체감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타인에 대한 모종의 무감각은 나에게는 호감보단 비호감으로 다가오는 요소였다. 

물론 한없이 매사에 녹아내리는 사람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쪽이었지만 무작정의 딱딱함은 너무 매정해 보였다. 도저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먼 발치로 도망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말은 취소하기로 했다. 이상형을 잃었다.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감정성 몸살을 겪었다. 한 때는 아침처럼 당연했던 그 증상이 몇 년만에 찾아오니 당황스러웠다. 입에 잘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고 컴퓨터를 켜고 딴청을 피우며 일을 했다. 무작정 누워 있으면 그런 내가 오히려 맘에 안 들어서 더 우울해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적당한 핑계의 어영부영한 능률이 몸에는 좀 힘들더라도 오늘 전반을 위해서는 훨씬 나았다. 당황스러운 것 치고는 대처를 꽤 잘 했다고 생각한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몸살이 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다시 다분히 감정적인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내가 문득 좋았다. 여전히 내 감정은 살기에 너무 성가시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어떤 것들에 대해 화내거나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게 좋았다. (아니었던 적 없지만 뭐든지 새삼스러울 때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럼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내가 좋았다. 그 적절한 열감.

몸살이 다시 와도 그게 다시 온 줄은 나만 알 것이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고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흐물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최근에 흐물해진 정신머리로 술에 취해서 몇 번 메시지를 보내 보았기 때문에 또 안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여전히 친구들은 내 속을 모르고 나는 몇 마디 말을 안 하고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나 자책을 한다. 하지만 내게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마음들과 쏟아내고 싶어서 갑갑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역시 나는 안다. 아마 긴 시간동안 내 삶은 그 사이의 어느 조정 단계에 있을 것이다. 어떤 게 최고의 비율일지는 더 살아봐야 알겠지.

 

나는 나처럼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한 연애 감정 범위를 떠나서 그렇다. 바깥을 향해 감정을 가지고, 본인 안에 무작정 쏟고 싶은 말이 있지만 어느 정도가 적절할지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사람들. 애써 강하게 사는 사람들. 애써 단단한 사람들. 종종 흐물흐물해지고 무너지는 사람들. 무너지고 싶은 사람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점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에움

    0
    over 1 year 전

    어쩌면 이 레터가 쏟아내고 싶어도 쏟아내지 못하는 말들의 도착점이 되어줄 지도 모르겠어요.

    ㄴ 답글 (1)

© 2024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