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13. 영영 붉은 꽃은 없다

세점사이의 13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04.03 | 조회 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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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13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벚꽃의 개화가 참 빨랐습니다. 참 혹독했던 겨울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땀이 흐르는 날씨가 되기도 했구요. 출근을 하는데 여러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 있더라구요. 개나리, 목련, 매화, 벚꽃. 라일락도 보라색 꽃잎을 펼치기 시작했더라구요.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이들에게는 원래 개화의 순서가 정해져 있다고 해요. 원래는, 한꺼번에 피어있어서는 안될 친구들인 거죠. 그래서 아침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종말이 찾아오는구나. 그 왜, 기후 변화로 사막에 눈이 내리거나 한 모습을 보면 정말 기이하면서도 아름답잖아요. 그런 것들의 연장선상으로서 이번 봄이 있는 거란 생각을 하니까 왠지 오싹해졌네요.

 

이번주는 정말 바빴습니다. 한번은 밤을 새고서 그 날 늦은 오후에서야 퇴근을 했고, 다른 날들도 밤 열 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의미가 있는 시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주간이었지만 오고가면서 꽃을 보는 재미로 지냈네요. 출퇴근길에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벚꽃이 가득 피어있습니다. 기회다 싶어 카메라를 들고 매일 달려들었는데, 그래서 퇴근시간이 매일 더 늦어지기도 했어요. 사진들 한 번 보여드릴게요.

가로등불에 의지해 담은 밤벚꽃에는 왠지 차가운 느낌이 있습니다. 집 근처 지하철역 앞에 우뚝 서있는 벚꽃나무들 중 한 그루예요.
가로등불에 의지해 담은 밤벚꽃에는 왠지 차가운 느낌이 있습니다. 집 근처 지하철역 앞에 우뚝 서있는 벚꽃나무들 중 한 그루예요.
이건 작업실 근처 국립의료원 벚꽃나무입니다. 벚꽃이 참 예쁜 곳인데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요. 하긴 아무래도 관광지는 아니니까요. 
이건 작업실 근처 국립의료원 벚꽃나무입니다. 벚꽃이 참 예쁜 곳인데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요. 하긴 아무래도 관광지는 아니니까요. 
벚꽃이 필 때쯤 이 꽃은 이미 바람에 흩날리고 있더라구요. 살짝 초록빛이 돕니다.
벚꽃이 필 때쯤 이 꽃은 이미 바람에 흩날리고 있더라구요. 살짝 초록빛이 돕니다.
해질녘 빛에 물드는 벚꽃! 벚꽃 촬영을 다녀오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해질녘 빛에 물드는 벚꽃! 벚꽃 촬영을 다녀오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건 목련. 사실 목련이 예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목련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찬찬히 듣다 보니 왠지 그 매력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목련. 사실 목련이 예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목련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찬찬히 듣다 보니 왠지 그 매력을 알 것도 같습니다.

 

오늘은 벚꽃과 연관된 주제로 글을 써봤어요. 사실 덧없음의 대명사잖아요, 벚꽃이란 꽃은. 저는 영원함에 대한 강박이...좀 있는 편인데요,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영영 붉은 꽃은 없다

몇 년 전이었을까, 핫팩을 잔뜩 선물받은 적이 있다. 아주 섬세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렴풋한 기억에 그 해 겨울은 꽤 추웠던 것 같고 내겐 야외 촬영 스케줄이 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추운 날 바깥을 을 자주 나다니지만 두껍고 불편한 옷을 입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는 그 흔한 롱패딩도 하나 없다. 내게 그 핫팩은 꽤 요긴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겨울 그걸 단 한 개도 쓰지 않았다. 그 소중한 게 소모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지금 내 손에는 그 핫팩이 없다. 아마 가족들이 한두 개씩 야금야금 빼다가 전부 썼거나, 극단적으로는,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전부 버려지거나 했겠지.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걸 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가진 뭔가가 바닥을 드러내는 게 너무 싫었다. 충분히 있던 것들이 조금씩 줄어들며 나에게 공백을 인지하게 하는 것은 나를 평생토록 따라다닌 이상한 공포다. 게임을 할때도 그랬다. 나는 체력을 회복하는 아이템을 잔뜩 사놓고서도 최후의 최후까지 그걸 아끼다가 위험한 순간에 늘 후회를 했다. 목숨보다는 버튼 한 번 누르는 쪽이 훨씬 가벼웠을 텐데. 쓰지도 않을 것들은 왜 가진 돈을 전부 다 털어 꽉꽉 채워놓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그 왜, 어느 독실한 사람이 산속에 조난이 되었는데 구조대가 세 번이나 왔음에도 신께서 저를 구해주실 것이니 괜찮습니다라며 거절을 했더라는 이야기. 그는 결국 죽어서 신에게 자신을 왜 구하지 않았느냐고 따졌고, 신은 내가 너를 위해 구조대를 세 번이나 보내주지 않았느냐?’ 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께서는 겨울철에 추워하는 나를 위해 핫팩을 보내주셨는지도 모르지.

 

사람 앞에 마음을 다 내보이는 것이 늘 두려웠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이미 끝난 관계와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로 나누어 놓곤 했다. 그런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숙한 연착륙이었다. 헤어지더라도 최대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에 너무 많은 마음을 주지 않아야만 했다. 누군가가 너무 좋아질 것 같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므로 이하와 같은 원칙이 생겼다.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 먼저 약속을 잡지 않을 것, 가장 부정적인 전제를 둘 것, 냉랭해진 상대를 붙잡지 않을 것, 멀어진 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이 방식의 이상함을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삶이 가져다 주는 굉장한 우연과 상대방이 내보이는 굉장한 적극성이 아니라면 데면데면한 친구조차 만들기 쉽지 않으므로. 하지만 끝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소진되어버릴 수 있는 무언가를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메라는 완벽한 존재다. 엄청나게 오랜 수명을 가지고 든든하게 동작한다. 셔터박스 수명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고, 디지털 방식의 현실적 한계가 있지만 취미 이용자 입장에서 그 수명을 전부 채우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적어도 핫팩보다는 그렇다. (물론 나는 지금 상업적인 사진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가진 카메라를 몇 년은 더 쓸 수 있다.) 금전적으로도 완벽하다. 감가상각이 꽤 적은 품목이어서 사용하던 걸 중간에 판매해도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카메라를 자산처럼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더 높은 스펙의 카메라를 구매할 때 종잣돈으로 삼기도 한다. 실제로 지금 가진 자동차 한 대 값의 장비는 60만원짜리 카메라를 종잣돈 삼아 이것저것 사고팔며 야금야금 업그레이드를 이어온 결과 갖추게 된 물건이다. 어쩌면 내가 카메라에 순식간에 미쳐버리게 된 것은 이런 강박도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카메라는 필연적으로 행위를 위한 도구다.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 애석하게도 나와 피사체 중 그 어느것도 영원하지 않다. 나는 언젠가 늙을 것이고 나의 감각 역시 언젠가 구식이 될 것이므로. 인물을 주로 촬영하는 나의 장르 특성상 그 덧없음은 더했다. 그래서 2019년쯤에는, 사진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언제나와 같았다. 영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늙어버린 뒤 시간에 뒤쳐져 무엇을 찍어야 할지,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하는 나를 상상했다. 그건 끔찍하게 싫은 일이었다. 기꺼이 카메라를 드는 20대는 아름다웠으나 그 이후의 내가 그럴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은 컸다. 그러니까 나는, 완벽히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카메라마저 사랑하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인간사의 재앙 중 대다수는 불가능한 걸 쫓는 데서 온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수 김수영씨가 이번에 발매한 앨범에서 말했듯, 영원은 없다. 사진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찍으면서, 벚꽃과 함께한 인물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벚꽃을 아예 찍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친구와 놀다 벚꽃이 있는 걸 발견하고 몇 장 담은 게 전부라는 건 좀 웃긴 일이다. 벚꽃의 만개가 봄의 대표적인 이벤트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다들 매년 자신이 벚꽃과 함께하는 사진을 담고 싶어 혈안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반골도 이런 반골이 없다.

그냥, 벚꽃철에 맞춰서 며칠 날짜를 잡고 벚꽃이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며칠 가지 않아 금방 사라져버릴 것을 위해서 내 봄을 고스란히 바치고 싶지 않았다. 꽃을 찾아다니지도 않았고, 계절은 금방 사라질 무언가에 불과했고. 하지만 영원은 없고 순간은 이어진다. 영원을 찾던 순간들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택하지 않은 과거들 뿐이었다. 그냥, 벚꽃을 한 번도 찍어보지 않은 사람. 포기할 구실을 적극적으로 찾아 헤맨 사람.

 

올해는 벚꽃을 찍어보기로 했다. 토요일에 두 차례 담았고, 월요일에는 세 번 담을 예정이다. 이번 개화가 유독 빠르고 짧다고 해서 괜히 더 마음이 급해졌다. 찍으면서 느꼈다. 연분홍으로 꽉찬 시야는 참 예쁘다는 걸. 아주 찰나라고 할지라도.

 

당연한 이야기 하나. 19년도에 사진을 접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카메라를 잡고있는 걸 보면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한 번 한 번의 촬영이 너무 즐거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살짝 노선을 바꿔서, 사진이 영원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던 일을 관두고 사진을 직업으로 삼아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그러고 있다.) 얻은 것은 사진을 시작하기 전보다 몇 배는 덧없는 하루하루들의 연속이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덧없어지고 있다. 이렇게 변하다 보면 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지 모르겠다. 덧없고 덧없다.

며칠 전에 친구와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 워낙에 합이 잘 맞는 친구여서 즐겁게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나서 대화를 하다가 문득 내가 그런 말을 했다. 사진 너무 재밌다. 그러자 친구는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사진을 아직도 너무 재밌어해서 너무 좋아, 하고.

벚꽃이 지면 라일락이 핀다. 그 다음에는 수국이, 그 다음엔 여름의 초록잎이. 작고 덧없는 것들이 모여서 한 줄의 긴 시간을 이룬다. 그것들이 모여 영원에 가까워진다. 적어도, 영원하지 않다는 강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열흘 피고 흩날리는 벚꽃 쪽이 더 영원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은 열흘 피고 져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 순간은 충만하게 화려했으므로.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덧없어도 좋다.

 

소모라는 개념과 아직까지 완벽하게 친해지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무섭다. 아무것도 잊고싶지 않아 모든 기록을 끌어안고 있고, 돌아올 것이 두려워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사라져도 기억하지 못할 순간들을 붙잡기 위해 꽉 붙잡아 마땅한 순간적인 것들을 흘러가게 둔다. 아무 말도 잊히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마음도 돌려받지 않기 위해 아무 마음도 주지 않는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올해는 벚꽃을 찍었다. 그걸 찍기 위해서 한참을 걷고 녹초가 되었다. 그게 참 좋았다. 정말 더웠다. 그래서 이번 봄은 이렇게 지나가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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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쥥이

    0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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