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퍼 ABC

세일링 요트의 인테리어

집일까 차일까

2024.08.25 | 조회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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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창 밖으로 보이는 마을 앞바다 한 가운데에 웬 파워요트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속절 없이 흔들리는 요트에 넋을 잃고 자꾸 멍 때리게 되는군요. 이 작은 어촌에 웬 파워요트일까요? 소문을 듣자하니 한 펜션 사장님이 요트를 샀는데 배 댈 곳이 마땅치 않아 닻을 내리고 있다고 하네요.

배 안의 상황을 상상해 봅니다. 아마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살룬과 부엌, 그리고 조타실이 있을 것입니다. 취침 공간이 아래층에 있다는 점을 빼면, 캠핑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일 것입니다. 둘 다 이동하는 집이니까요. 교통수단 안의 좁은 공간 안에서 생활해야 하기에, 제한된 면적 안에 일상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효율적으로 담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저 요트에는 있고 캠핑카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지진이 나지 않는 한 캠핑카가 저렇게 출렁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멈춘 배 흔들릴 때가 제일 멀미 나는데... 지중해에서 크루즈하는 배였다면 크루들의 성화에 못 이겨 스키퍼는 닻을 옮겨야 했을 겁니다. 물결이 뱃머리 방향에서 오게 하면 흔들림이 덜합니다. 반면, 태평양 연안에서는 닻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배가 쉴 만한 만을 찾는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앵커 알람을 켜 놓고, 쉽사리 옆으로 구르지 않도록 엎드려서 잠을 청하던 지난 날들이 떠올라 맘이 짠해지는군요. 다행히 창밖의 파워 요트 안에는 아무도 없는듯 합니다. 

세일링 요트는 파워요트보다 더 장시간 장거리를 항해하는 게 보통입니다. 바다 위 세일링 요트 안에서의 생활은 어떨까요? 오늘은 세일링 요트의 인테리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요트 안에 들어가면 '집'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자고, 그리고... 그래서 월세가 비싼 동네에서는 집 대신 배에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배는 그 안에 사는 것보다는 항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그리고 인테리어에 아주 명확한 바운더리가 있습니다. 맘대로 창고를 짓거나 평상을 놓는 등의 꼼수로 공간을 확장할 수 없죠. 바운더리 밖은 바로 바다니까요. 모든 것은 배의 바가지 부분인 선체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체의 형태에 의해 뚜껑(데크)의 공간도, 실내 공간도 좌지우지 됩니다.

파워요트는 뱃머리가 넓고 선형이 직선에 가깝습니다. 고속으로 달리는 파워요트는 속도가 나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주행하기 때문에 선체 밑바닥도 평평한 편입니다. 반면, 속도가 느린 세일링 요트는 선체가 물에 잠긴 상태에서의 저항을 최소로 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일링 요트를 옆에서 보면 선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얕은 뱃머리에서 시작해 배의 중앙부로 갈수록 깊어지다가 배꼬리로 가면서 다시 올라가는 모양이죠.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좁은 뱃머리에서 시작하는 부드러운 곡선이 두드러집니다. 

파워요트와 세일링 요트
파워요트와 세일링 요트

바가지 안에 침대, 소파, 부엌 등 인테리어 구성 요소들을 넣어야 할텐데 벽이나 바닥이나 당최 평평한 곳이 없습니다. 게다가 너비가 좁아서 실내 공간도 더 작으니 이를 어쩌나요?

그래서 세일링 요트의 인테리어는 맞춤형 양복의 세계입니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느낄 수 있죠. 확장 불가능한 좁은 실내 공간을 단 한 뼘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장인의 집념이 구석구석 묻어 있습니다. 특히 곡면으로 인해 생기는 극한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려는 몸부림의 흔적들이 많습니다. 선체의 곡면을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수납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빈틈없이 공간을 채워나가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총동원됩니다.

배에서든 무엇이든 아껴 쓰게 됩니다. 식량, 물과 장비 뿐만이 아니라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출항을 하고 나면 싣고 온 물자가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의 전부요, 타고 있는 배가 내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가 됩니다.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테리어 구성 요소들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성을 가집니다. 살룬(거실)의 다이닝 테이블은 소파 높이로 낮춘 후 쿠션을 올리면 침대가 됩니다. 붙박이 소파와 침대는 쿠션을 들어 올리면 그 아래 수납공간이 숨겨져 있습니다. 심지어 계단 밑과 마룻바닥 아래까지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다기능성에 불과합니다. 세일링 요트 인테리어의 진정한 다목적성은 모든 구성 요소가 배를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겸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벽, 부엌, 화장실, 침대, 소파나 옷장 등은 선체 구조의 일부이거나 그 위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배의 인테리어가 왜 이렇게 생겼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답은 그 배의 선체 구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일링 요트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선체 구조에서 시작할까 합니다.

선체의 구조는 종방향 횡방향 할 것 없이 뻗어 있습니다. 이 구조는 배의 강도를 높이고, 하중을 분산시키며, 과도한 비틀림을 제어합니다. 세일링 요트의 인테리어 요소들은 이 구조 위에 적절히 통합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글쓴이 추정(?) 호라이즌스 호의 횡방향 구조입니다. 캐나다-멕시코 어리버리 항해를 한 1980년 건조 타야나 37피트죠. 힘을 많이 받는 횡방향 구조는 주로 벽의 형태를 하고 실내의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40피트 전후의 세일링 요트의 횡방향 구조는 대체로 유사합니다. 뱃머리와 배꼬리에 있는 격벽 사이를 실내 공간으로 이용하되, 마스트 부근에서는 좀 더 강화된 구조가 자리잡고 있고, 킬의 위치와 데크에서 하중이 집중되는 지점을 고려하여 선체의 길이를 따라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요트의 설계와 용도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중소형 세일링 요트는 이 횡방향 구조에 의해 뱃머리 선실, 살룬, 부엌, 그리고 배꼬리 선실 순서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종방향 구조는 보통 외부에서 보이지 않고, 요트의 설계와 건조 방식에 따라 다양할 수 있어 정확한 추정이 어렵지만 역시 글쓴이 추정(?) 종방향 구조를 더해 보았습니다:

이 구조 사이사이에 엔진과 탱크, 배선 등을 배치해야 하는 일도 남아 있습니다. 호라이즌스 호는 오프쇼어 요트답게 넉넉한 물탱크와 연료탱크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각각 100갤런(380리터)와 90갤런(340리터) 용량의 탱크들도 바가지 안 어딘가에 들어갈 자리를 찾아야 하죠.

연료탱크는 뱃머리 선실의 침대 밑에, 물탱크는 살룬 마룻바닥 밑에 숨어 있습니다.

아래는 2년간 항해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호라이즌스 호의 실내 공간입니다: 

호라이즌스 호(타야나 37 커터) 인테리어 레이아웃
호라이즌스 호(타야나 37 커터) 인테리어 레이아웃

이제 호라이즌스 호의 인테리어를 보면, 세일링 요트 인테리어에 우연의 여지는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집에서처럼 가구의 위치를 내 맘대로 정할 수도 없고 봄맞이 기분전환을 위해 배치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바가지 크기와 실내 공간의 관계

무거운 요트는 바가지가 좀 더 큽니다. 배를 뜨게 하려면 무게만큼 부력이 떠받쳐줘야 하기 때문에 바가지 부피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바가지가 크다는 것은 배의 실내 공간이 더 크다는 뜻이 됩니다. 같은 길이의 요트라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요트는 실내 공간이 더 큽니다. 날렵한 선체를 가진 경기용 요트에 비해 성능은 좀 떨어지지만 층고도 공간도 넉넉한 크루즈 요트들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죠. 

배의 흥미로운 점은 크기에 큰 제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자동차라도 도로의 폭 안에서 운전할 수 있는 너비, 커브를 돌 수 있을만한 길이로 제한됩니다. 반면, 배는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를 누비기 때문에 크기 제약에서 자유롭습니다. 세일링 요트의 길이는 30피트(약 9미터)일 수도 있고 30미터가 훌쩍 넘을 수도 있습니다. 

67미터 세일링 요트 Vertigo
67미터 세일링 요트 Vertigo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수퍼요트를 소유한 백만장자 선주라고 해서 신체 사이즈가 몇 배 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30피트 요트보다 침대가 세 배 길어지거나 변기가 세 배로 높아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재산의 크기와 관계없이 대동소이한 인체의 크기는 가구나 위생시설 뿐 아니라 요트의 내부 구조에도 제한을 줍니다.

예를 들어, 통로의 폭, 실내 층고나 계단 너비 등은 배 크기에 비례해 커질 수 없습니다. 갑자기 큰 파도가 치면 승선자들이 중심을 잃을 수 있어, 가까이에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람을 거슬러 항해할 때는 배가 상당히 기울어질 수 있는데, 배 안에서 이동할 때 손 닿는 곳에 손잡이가 있어야 하고 경사진 바닥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질 위험 없이 걸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고정된 건축물과 달리 요트의 인테리어는 인간의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바다에서의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세일링 요트의 인테리어가 집이나 차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좁은 공간, 끊임없는 움직임, 그리고 해양 환경이라는 독특한 조건에 맞게 진화한 세일링 요트의 내부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요?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특징적인 인테리어를 가진 몇몇 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칠리아 앞바다에 닻 내린 수퍼요트가 갑자기 침몰하며 영국 IT 거물 등 다수 사망자가 나와 난리인 듯 한데요, 여러 모로 궁금한 점이 많은 사건입니다. 침몰한 배는 2008년 진수한 전장 56미터 페리니 나비Perini Navi인데, 내항성을 우선하는 요트라고는 할수 없지만 비슷한 사이즈, 비슷한 유형의 배를 주로 만드는 잘 알려진 조선소가 건조했습니다. 배에는 프로페셔널 스키퍼와 다수의 크루들이 있었을텐데 바로 앞바다에서 인명 피해를 냈다니 그것도 무슨 사연인지 후속 뉴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뉴스레터 내용은 몇주 전 써 놓았는데, 발행할 때가 다가오니 위 사고 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앞에 닻 내리고 흔들리던 요트에도 사단이 났습니다. 배가 보이지 않아 태풍으로 피항한 줄 알았는데 해변 한 구석에 좌초해 있더군요. 육지에 올라온 배는 그 모습만으로 참 공포스럽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지만, 역시 배는 준비 없이 선뜻 사는 물건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그럼, 편안한 일요일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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