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라디오

In Between Days

내 것이지만, 내가 아닌 것

2023.12.11 | 조회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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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에 관한 짧은 이야기

아주 사적이고 디테일한 에세이

“그래, 가끔 오래된 상처를 곱씹으면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 같지.”

- 드라마 <클라리스> 중에서

 

***

 

노악(露惡)이라는 단어를, 나는 그녀 때문에 처음 알았다. 자신의 치부나 결점을 일부러 드러내는 것. 그녀는 자신이 노악 취미를 가지고 있다 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상처를 잡아 뜯을 때 그녀의 눈은, 아홉 갈래 매듭의 채찍으로 등짝에 빨간 줄을 긋거나, 니들로 젖꼭지를 관통하는 마조히스트 같은 히스테릭한 쾌감에 취해 살짝 흐려지는 것 같았다.

특히 그녀의 섹스 라이프 스토리는 유니크하고도 찬란했다. 무슨 세헤라자데에게 천일야화를 듣는 것 같았다. 약간 비정상적으로 대용량인데다 유통기한도 긴 내 기억력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워서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그녀의 취향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 날고기 같은 사람. 전날 누구를 만났다면서, 신선한 날고기인 줄 알고 덥석 먹었는데 익힌 고기라서 뱉었어요, 라고 불평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무례하리만치 자신의 영역을 저돌적으로 침범하는 남자들에게 끌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먹는 건 당신 아니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거 같아요, 늘 내가 먹는 쪽이었어요. 

그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찌감치 파탄이 난 전형적인 중산층 붕괴의 가정사라든가, 아버지를 닮은 첫 남자의 환영에 지금까지도 정신적으로 발목을 잡혀 있다든가 하는 것들. 그녀는 늘 도발적으로 나를 다그쳤다. 당신 인터뷰어잖아요, 다른 사람 파헤치는 거 일이잖아요, 내 밑둥을 잘라서 나이테를 들여다봐요, 나도 모르는 나를 펼쳐서 계속 책장을 넘겨요., 날 울게 만들어봐요. 그런 행동은 그저 순수한 유희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실용적이었으며, 자기파괴적 유혹 같기도 했다.


키스 자렛을 처음 들려주었을 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질렀다. 잘생겼네요! 어디가요, 한눈에 봐도 꼬장꼬장하고 괴팍하게 생긴 노인네잖아요. 봐요, 팔자주름이 멋지게 패였잖아요. 

와아, 이 사람 말이에요, 피아노랑 섹스를 하네요.

듣고 보니 그녀의 비유는 적절했다. 쾌감으로 오만상을 찌푸린 얼굴,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 헐떡거리는 숨소리, 전신의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듯한 몸부림, 의미를 알 수 없는 방언 같은 중얼거림, 절정의 신음. 

봐요, 딱 오르가슴에 도달한 사람 모습이잖아요. 

나는 불륨을 올렸다. 키스 자렛의 1975년 라이브 앨범 <The Köln Concert>의 첫 곡, 제목 대신 <Part I A>라고 불리는 26분짜리 즉흥연주가 흘렀다. 예민하고 서늘한 피아노 소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말없이 시선으로 나를 훑었고, 나도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빛을 받았다.

특유의 긴 탄식과 함께 긴 연주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가 침묵을 깼다. 차 없지 않나요. 끊겼죠. 어떡하게요. 첫 차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좁지만 않으면 우리 집 가도 괜찮을 텐데.
가요. 설마 두 사람 못 들어갈 만큼 좁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자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끈적끈적한 취기와 야릇한 생기가 뒤섞인, 뱀파이어처럼 사납고 관능적인 미소였다.

우리 집, 갈래요?

그 순간 발작 같은 경련이 가슴을 콱 조이면서, 이번에는 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우리는 또다시 한동안 마주보고, 서로의 웃음 아래 도사린 진의를 잡아채려 애썼다. 순간의 변덕과 필수불가결한 욕망이 싸우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쥔 그녀의 손가락이 부정하도록 요염하고 희었다.

문득 그녀가 머뭇거리며 시선을 거두었다. 미안, 안 되겠어요. 그녀는 무언가 부연설명이 필요했다고 느낀 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난 당신을 오랫동안 보고 싶으니까. 

 

***

 

잊지 못하는 사람은 의외로 과거의 기억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기억에 매달려서 불안해할 일이 없는 것이다. 노스탤지어나 추억 같은 왜곡된 환상에 무관심하다.

그런데 가끔은 부르지도 않은 기억이 무작위로 튀어나오곤 한다. 아니, 가끔이 아니다. 수시로 튀어나온다. 길을 걷다가도, 담배를 꺼내다가도,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다가도. 그것은 마치 물기 없는 퍽퍽한 흑백사진과 같다. 모든 게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들여다보게 되는 것. 생기라고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기억이 나의 어딘가와 녹아서 섞였던 분명하다. 그리고 섞여버린 그만큼의 내가, 말라비틀어지고 석화되어 떨어져 나간 걸 느낀다. 그 빈 자리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황량하고도 아름다운 감각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모르게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결코 없었던 일이 없지만, 이제는 일부가 아닌 순간들이 거기 있다. 26분의 연주, 끊어지기 직전의 같았던 공기, 아슬아슬한 긴장과 여운, 쾌감, 머뭇거림,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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