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은 인생에 더 이상의 정규직은 없다고 손을 놓은 지 몇 년 됐다. 업무와 하등의 상관이 없는 관계가 생기는 게 싫은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협업이라는 게 안 되는 성격인 탓이다. 누굴 설득하는 것도, 누구에게 설득되는 것도 못하니까. 내가 시스템 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독선으로 하고 망해도 혼자 망하는 것, 아니면 아예 부품처럼 기능하는 것.
— <아-하 : 테이크 온 미>는 노르웨이 출신 팝 밴드 아하의 다큐멘터리다. 이들의 결성부터 현재까지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밴드를 하고 있거나 해본 사람이라면 구구절절 공감할 구석이 곳곳에 숨어 있어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사십 년 동안 몇 번의 잠정적 휴식기와 해체, 재결성을 거치면서 멤버들이 머리 터지게 싸우는 얘기가 절반이라는 뜻이다.
— 세 멤버 중 마그네 프루홀멘은 원래는 기타를 연주했는데, 또 하나의 기타리스트 폴 왁타가 있어서 건반 연주를 맡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왁타 때문에 떠밀려서 건반을 맡았으며, 사실은 아하에서 건반을 치면서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왁타는 자신의 작곡 지분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프루홀멘이 못마땅하다. 비주얼 담당이었던 모튼 하켓은 밴드의 아이돌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우울증 걸릴 지경이었다고 하소연한다. 그 외에도 사사건건 충돌하는 세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여자친구와 아내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찬다. 자신들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건 죄라고. 심지어 가진 게 많으면서 저런다고.
— 그러다 결국 프루홀멘이 심장 이상으로 쓰러져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생긴, 다시 말해 홧병이란다. 다른 멤버들은 너무 미안해서 프루홀멘에게 말한다. “다 잘 될 거야. 우리 서로 행복해지는 방식으로 해보자고.” 그리고 아하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지만, 투어만 할 뿐 새 앨범 작업에 대해서는 다들 암묵적으로 입을 다문다. 그 이유를 처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무대에 서는 건 행복하지만, 스튜디오에서 복작거리며 새로운 걸 창조해내는 건 행복하지 않으니까. 행복은 커녕 몸서리쳐지게 괴로운 과정이 반복될 게 뻔하니까.
— 영화를 보다가 예전에 P라는 밴드 인터뷰에서 들은, “밴드의 결과물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밴드를 하면서 서로 자기 것이 최고라고 내세우느라 싸우는 상황은 의외로 적다고 했다. 그보다는 ‘내 것도 구린데 저 새끼 것은 존나 개구려서 차마 못해먹겠다’고 싸우는 상황이 훨씬 많다고. 좋은 밴드에 대한 정의를 묻자, 베이시스트는 “맨날 싸우는데 안 깨지는 밴드”라고 했다. 이 대답은 그대로 인터뷰의 제목이 되었다.
— 나중에 듣기로는, P 밴드의 멤버들은 치열하게 싸운 뒤 서로 얼굴도 안 볼 사이가 됐고, 사실상 해체에 가까운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극적으로 화해했다고 한다. 정작 만나자마자 그동안의 앙금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지만 원래의 이름으로 활동해야 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적인 갈등은 해결됐다 해도, 사랑과 상호이해로만 밴드가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 이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때’라는 걸 무시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든 때가 있다고. 우주 록스타가 되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기세가 등등한 시절에만, 무언가를 막연하고 순진하게 믿어버리는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게 있다. 몰라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고, 나중에 알게 된다 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 살다 보면 에고는 비대해지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점점 늘어나게 되니까. 또는 나는 괜찮아도 주위에서 괜찮지 않은 것도 많아지니까. 어쩌면 나도 일반적인 직장에서 차근차근 프로세스를 익혔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보다는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그나마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 작년에 언니네이발관 해체 후 처음으로 방송에 나온 이석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티스트의 작품이 반드시 열정과 즐거움의 산물이 아닐 수도 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리스너들이 그걸 이해해주시면 좋겠다”고. P 밴드의 보컬이 한 이야기도 생각난다. 그렇게 싸우면서 서로 조금씩 마음에 안 드는 결과물을 내놓았는데 신기하게 리스너들은 또 좋아하는, 그런 케이스가 셀 수 없다고. 그게 밴드의 매력이라고. 꼭 밴드가 아니더라도 협의와 약속과 논쟁과 양보를 거듭해야 하는 모든 집단에 공통 적용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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