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대부분이 그럴 테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피터 팬>이 초록색 옷을 입은 소년의 모험 활극으로 알고 있다면, 제임스 M. 배리의 원작을 보고 퍽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사실 웬디의 이야기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웬디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걸친 십대 초반이고, 그녀의 여정은 입문-시련-귀환으로 이어지는 신화적 성장담의 트릴로지 구도를 따른다. 즉, 이 동화는 웬디가 중심에 있는 성장 스토리다.
<피터 팬>은 수없이 영상화가 됐는데, 이중 원작의 본질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버전은 P.J. 호건의 2003년 영화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후크 선장은 악어 뱃속에서 들리는 시계 소리에 혼비백산하는 찌질하고 어리숙한 악당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세상을 아는 매력적인 중년―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퇴락한 록 스타’를 연상시키는―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중후하고 신사적인 후크와 대면한 웬디는 그에게서 어른의 매력을 느끼는데, 이 순간 그녀가 각성한 것은 분명하게도 섹슈얼한(!) 성질의 무언가다. 웬디의 이런 각성은 곧 피터에게로 향하는데, 이때 둘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은 아슬아슬하기까지 하다.(배리의 손자는 이 영화를 보고 “할아버지의 순수한 동화를 포르노로 만들었다“며 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터는 웬디의 키스를 두려워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이 지점에서 피터는 그녀가 선택하거나 버려야 하는 무언가가 된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투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웬디가 처음에 피터를 따라 네버랜드로 간 것은 “이제 다 컸으니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는 부모의 종용, 성장이라는 또다른 삶의 입문에 대한 도피였다. 그녀는 피터가 보여준 영원한 어린이의 판타지에 잠시 이끌리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피터가 들어왔던 창문을 ‘자신의 손으로’ 닫는다. 변화와 책임의 무게를 감내해야 하는 어른의 현실에 스스로의 의지로 뛰어든 것이다.
부모님에게 안긴 웬디를 창 밖에서 쓸쓸하게 지켜보는 피터의 뒷모습을 비추며 내레이션이 흐른다. “피터는 자기 자신의 기쁨은 많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기쁨은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터와 웬디는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 엔딩은 흔히 근사한 장밋빛 환상으로 치장되곤 하는 성장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정의처럼 보인다. 살아가는 한 인생은 네버랜드의 그것보다 몇 배는 지난한 모험이라고. 성장이란 삶이 단계적으로 나아지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등가교환처럼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일종의 단절이자 상실이라고. 나중에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 석연치 않음을 끌어안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