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안녕하세요. 여자들의 극장 허시어터 이번 호는 다양한 공연 리뷰와 현장의 흥미로운 기사들을 모은 리뷰&뉴스 편입니다.
먼저 리뷰로는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부산국제연극제에 초청된 이탈리아 연극 <채식주의자>, 이혜영 씨 주연의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 서울시극단 <유령>, 예술의전당 신작 오페라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 국립정동극장 연희극 <단심>, 유니버설발레단 <춘향>까지, 다양한 장르의 공연 리뷰 일곱 편을 준비했습니다.
기사로는 젠더 벤딩 캐스팅으로 주목받고 있는 연극 <디 이펙트> 소식,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장경진 공연칼럼니스트의 <라흐 헤스트> 속 향안과 동림 이야기, 11년 만에 내한공연을 갖는 뉴욕 필하모닉에서 한국인 최초로 관악기 정단원이 된 플루티스트 손유빈 씨 소식, 프랑스 럭셔리 그룹 케어링이 여성 영화인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한 ‘우먼 인 모션’이 올해 10주년을 맞아 펼친 다양한 활동 등을 모아 전해드립니다.
허시어터가 이번 호에서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지이며, 7월에도 더욱 재미있는 공연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에디터 한보은 드림
그들은 연인이고 동지였으며 치유자였다 -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 한국경제, 25.05.27
판타지 로맨스를 살아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다룬 데에는 중요한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인다. 역사물로 이야기의 심연을 세우기 위해서다. 특히 두 인물을 가장 첨예한 억압의 시대인 1940년과 1980년에 위치시켜 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관계로 심화시켰다. 당연하게도, 두 인물에게는 시대와 무관할 수 없는 결여가 있고, 이들의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그 결여는 점차 사라진다. 작품의 언어로 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폐허 속으로 걸어가는 것'의 의미를 찾고 사랑을 완성한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균형 잡힌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양희와 해준 사이에 설계된 균형 감각이 만드는 구조다. 양희가 만남을 열면, 해준이 만남을 닫는다. 이 과정에서 해준의 트라우마는 양희로 인해 치유되며, 양희의 미완성 소설은 해준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균형 감각은 이들의 만남이 필연적이었다는 심층적 의미를 담는다.
일제강점기에 사는 양희는 만주에 간 아버지 대신 아시타서림을 운영하는 여성이다. 그녀에게 서림은 모든 것이다. 밖으로는 서림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남몰래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있으며, 안으로는 로맨스 소설 작가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쉽지 않다. 독립운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고 작가 되기는 여성이 패관잡기나 쓴다는 인식을 뛰어넘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양희는 지금 소설의 결론을 내고 있지 못해 힘들다. 양희는 자신이 만든 로맨스 소설 속 인물이 왜 폐허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 고민한다.
절제된 폭력...무대 위에서 재해석된 伊 연극 ‘채식주의자’ 허세민 기자, 한국경제, 25.06.02
소설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한 이탈리아의 동명 연극(La vegetariana)이 22회 부산국제연극제 폐막작으로 초청됐다. 한국어 자막없이는 알아듣기 힘든 이탈리어로 진행됐지만, 국내 초연하는 이번 작품을 보기 위해 이틀간 1200여명이 공연장을 찾았다. 해외에선 작년 11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 초연한 뒤 로마, 프랑스 파리 등 유럽 각지에서 공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번 무대를 연출한 다리아 데플로리안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를 주변인물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소설과 가장 큰 차이는 폭력적이거나 성적 묘사가 담긴 장면을 최대한 덜어냈다는 점이다. 원작에선 영혜 입에 탕수육을 강제로 욱여넣는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연극에선 주변인물이 이 장면을 설명하며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다.
그렇다고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주제의식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혜 남편의 난폭함은 소설보다 무대 위에서 더 직관적으로 표현됐다. 달라진 영혜를 이해하기 위해 시선을 맞추는 대신, 그녀를 오로지 성욕 해소의 도구로 삼는 남편의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나면서다. 이로 인해 영혜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동물성'을 거부한다는 메시지가 뚜렷하게 전달됐다. (중략)
새로 추가된 장면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영혜가 배추를 먹는 장면과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작품의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출의 선택이었다. 음침한 분위기의 무대는 영혜네 집에서 인혜네 집, 형부의 작업실로 특별한 전환없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게 했다.
"헤다는 이혜영, 이혜영은 헤다였다" -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 이숙정 기자, 민중의소리, 25.06.05
특정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곧바로 특정 배우를 연상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헤다 가블러’라는 작품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연극 ‘헤다 가블러’를 본다면 다른 ‘헤다’를 상상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무대 위에 ‘헤다’는 배우 이혜영이었고, 배우 이혜영은 ‘헤다 가블러’였다. 연극을 본 사람이라면 그것에 이견을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개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던 연극 ‘헤다 가블러’는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헤다’ 역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은 이 작품으로 제5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 연기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받았다. 13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에서도 배우 이혜영은 다시 ‘헤다’로 무대에 올랐다. (중략)
헤다는 옛 연인 뢰브보르그가 학문적 성공을 거두고 새로운 책을 출판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게다가 다시 나타난 뢰브보르그에게 질투를 느끼며 혼란에 빠진다. 원작에 ‘판사’로 등장하는 브라크는 연극에서는 ‘검사’로 등장한다. 헤다의 새 집을 사는데 큰 역할을 한 브라크는 헤다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구를 주저 없이 드러낸다. 헤다의 남편 테스만은 헤다를 위해, 가정을 위해 적당히 거짓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뢰브보르그의 미발표작 원고를 우연히 얻게 되지만 돌려주지 않고 가져옴으로써 지식인의 이중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세련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죽음으로 향하는 ‘헤다’의 발걸음은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나로 살기 위해 파멸을 선택한 헤다의 죽음은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울림을 준다. 한 개인으로 생각을 보탠다면 헤다의 서사가 고전 속에 남아있기를. 현실은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도 온전한 인간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서울시극단의 ‘유령’, 지워지고 부재하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백로라 연극평론가, 25.06.09
이 작품은 한겨레신문의 기획 기사 ‘고스트 스토리(2018년, 한문영 기자)’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지워진, 무연고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주민등록증조차 없어서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 죽어서도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오랜 기간 시체 안치실에 방치되어 있어야 했던 사람들, 그래서 마치 유령처럼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사람들을 위로하며 애도하는 연극이다.
이 연극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유령’들을 바라보는 고선웅의 독특한 시선과 이들을 위로하는 방식에 있다.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면서 ‘세상은 무대고 인간은 배우’라고 하는데, 이 연극에서는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무연고자들을 바라본다. (중략)
막이 오르면 배우 이지하가 등장해 “저는 이번 생에서 배씨, 정씨, 그리고 다시 배씹니다.”라고 자신의 배역을 소개하고 곧이어 배명순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배씨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다.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정순임으로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다가 병에 걸려서 찜질방에서 숨을 거둔다.
그러나 무연고자로 처리돼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시체 안치소에 배치되고 그곳에서 유사한 처지에 있는 다른 유령들과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이러한 무연고자들의 사연이 극의 중심 서사에 해당하지만 분장사, 작가, 무대 감독, 관객 등과 같은 연극 밖의 인물들이 공연 도중에 개입하면서 연극이 중단되기 일쑤다.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 중단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결국에는 현실과 극적 세계가 뒤섞여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캐릭터(배역)가 아닌 배우의 실명을 부른다거나 객석에 관객처럼 앉아있던 배우가 무대로 걸어나가 또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한다든가 혹은 작가와 연출이 무대 감독을 통해 무대에 디렉션을 전달하는 상황 등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로써 현실과 극적인 세계뿐 아니라 무대와 객석, 극장의 안과 밖의 세계가 뒤섞이는 상황이 전개된다.
K-오페라라는 이름표를 떼도 될 것 같다 -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더프리뷰, 25.06.02
예술의전당이 3년여 준비해온 신작 오페라 이 드디어 세계초연되었다(5월 25·29·3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제작 초기단계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글로벌 음악출판사 쇼트뮤직과 협업했고, 영어 오페라를 호주 출신의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했다. K-오페라를 세계시장에 내놓기 위해 한국적 색채를 최대한 중화했다고 볼 수 있겠다. (중략)
물이 범람해 위기에 빠진 왕국, 그리고 물의 정령(물귀신)에 잠식되어 버린 공주를 구할 자는 누구인가. 왕국 바깥의 장인, 물시계를 만들고 물을 다루는 장인이 선택되어 왕국에 입성한다. 장인은 메조 소프라노 김정미, 장인의 제자는 테너 로빈 트리출러가 맡았다. 공주 역의 황수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작품 전개상 실질적 주인공은 김정미였다. 김정미는 극의 무게중심이 되어 침착하게 작품 전반을 이끌었다.
음악적으로는 각 주인공마다 테마가 있는 점도 좋았고 타악기와 전자악기 활용으로 더 생생한 물의 사운드를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물시계가 제작되는 장면에서 거문고 연주와 라틴어·한국어 설명이 등장하는 것도 신선한 시도로 보였다. 물의 흐름, 넘실거림, 휘몰아침, 솟구침, 반짝임 그리고 똑똑 떨어지는 느낌의 사운드를 다채롭게 구현한 것도 좋았다.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공기 중으로 날아갔다. (중략)
합창이 부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없음, 시간의 안팎에서 기다리는 이들, 과거의 지혜가 계승되는 과정이 작품 전체의 내레이션처럼 들렸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이 던졌던 질문이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심청의 두 마음을 들여다보다: 국립정동극장 <단심> 윤단우 공연칼럼니스트, 댄스포스트코리아, 25.06.20
제목의 ‘단심(單心)’은 마음을 다한다는 의미로, 고전소설 『심청전』을 각색한 공연은 주인공 심청의 마음에 주목했다. 아버지를 위해 인신공양도 불사하는 심청의 자기희생에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은 채 효(孝)라는 미덕을 상찬하는 데 집중했던 원전과 기존의 해석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를 위해 작품은 주인공 심청을 백과 흑 두 캐릭터로 나누었다. 흰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 심청이다. 반대로 자신이 왜 그런 희생을 해야 하는지 항변하는 검은 심청은 우리가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 만나는 심청이다.
인터미션 없이 3막으로 전개되는 공연은 심학규를 떠나 선인(船人)들을 따라간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1막, 바다 속에서 용궁여왕과 신녀들을 만나 다시금 지상으로 올라갈 기회를 얻는 2막, 왕을 만난 심청이 맹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심학규와 재회하고 눈을 뜬 아버지 앞에서 왕과 결혼식을 올리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각각의 막은 커튼을 열고 닫는 물리적 전환 없이 연꽃 위에 웅크리고 누운 심청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무대의 전환이라기보다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며, 이야기는 매번 심청의 탄생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심청의 자기희생이 심학규의 개안을 이끌어낸다는 스토리는 동일하게 전개되지만 공연은 이 결말이 심청의 죽음과 탄생이 거듭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중요하게 짚는다.
드라마 발레 속 폭력의 재현을 묻다: 유니버설발레단 <춘향> 윤단우 공연칼럼니스트, 댄스포스트코리아, 25.06.20
작품은 2014년 창단 30주년을 맞이해 전면 개정한 버전을 올린 뒤 이후에도 공연을 올릴 때마다 조금씩 수정을 가하며 만듦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도 영상 전반이 새롭게 다듬어지고 춘향과 몽룡이 처음 만나는 단옷날 장면의 안무가 달라지는 등 작품 곳곳에서 세밀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지난 공연에서 춘향과 몽룡의 설레는 첫 만남과 단옷날 군중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다소 헐거운 이음새로 엮여 있었으나 군무가 정돈되면서 한층 짜임새를 갖췄다. <지젤>이나 <돈키호테>, <오네긴> 등의 작품에 완성본으로 저장된 마을 청춘남녀의 활기 넘치고 소란스러운 군무의 이미지를 창작발레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것으로, 여러 다양한 작품을 경험하며 발레단과 무용수에게 남겨진 자산이 크리에이션의 중요한 원천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중략)
변학도가 관아의 재산인 기생들을 사적으로 편취하려 하는 것은 탐관오리라는 그의 캐릭터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설정이다. <적벽가>에서 전투가 끝난 뒤 군사점고를 하는 장면과 비교하면 기생점고 장면에 내재된 성적 뉘앙스가 더욱 분명해지고, 이 같은 성적 뉘앙스는 이후 춘향을 탐내어 수청을 요구하는 변학도의 행위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결고리가 된다. 변학도라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긴 하나 성적 존재로만 해석되곤 하는 기생상에 대해서도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공연이 거듭되는 동안 자주 해온 지적이긴 하나 2막에서 펼쳐지는 춘향의 수난기는 결말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장치로 이해해도 너무 과하고 세밀하다. 지난 공연의 리뷰에서 나는 춘향이 극 중에서 당하는 폭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백조의 호수>의 로트바르트는 버전에 따라 오데트에게 구애했다 거절당하고 정복욕을 표출하는 역할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로트바르트가 어떤 버전에서도 오데트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춘향>에서 변학도와 춘향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굳이 보여주지 않고 관객들의 상상에 맡겨도 된다. 그것이 폭력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크랑코나 맥밀런 같은 거장 안무가에 의해 드라마 발레의 문법이 생겨난 지도 반세기가 넘게 지났다. 20세기에 드라마 발레는 클래식 발레의 엄격한 교조성을 벗어난 감정과 상황의 사실적이면서도 풍부한 표현을 위해 본능적이고 폭력과 닮은 형태의 안무를 작품 내에 삽입했는데, 21세기가 된 지금은 그와 같은 폭력의 재현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해볼 일이다.
이주여성과 시장사람들의 이야기 - 두산아트센터 창작뮤지컬 '광장시장' 이미우 기자, 더프리뷰, 25.06.08
서울 종로 5가에 위치한 광장시장은 조선시대부터 군부대와 상인들의 쉼터이자 밥집이었고, 지금은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계층, 세대, 국적의 사람들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오늘날 '지역'의 의미를 가장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광장시장>은 이 시장을 배경으로, 이곳에 삶의 터전을 꾸려가는 미얀마 출신 여성노동자 아응과 다양한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시장은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현장이고, 누군가에게는 꿈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공간이다. 창작뮤지컬 <광장시장>은 밥을 매개로 연결되는 환대와 연대, 그리고 소속감의 의미를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극 중 아응은 민주화 항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 온 한국에서 생계를 이어가게 된다. 전국을 떠돌던 아응은 광장시장에 이르러 밥을 배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겉보기엔 평범한 시장이지만 비빔밥집, 칼국숫집, 포목점 등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은 상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아응은 점차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작가는 윤미현, 작곡·음악감독은 나실인이 맡았으며, 연출가로는 이소영이 참여했다. 이소영 연출은 “누군가 한 개인이 꿈을 심고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무던히 이어지는 일상, 곧 평화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강정임, 박현철, 송석근, 윤현길, 이지현, 정대진 배우가 출연하며, 주인공 아응 역에는 13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정대진 배우가 공개 오디션을 통해 발탁됐다. 정대진을 제외한 모든 배우는 1인 다역으로 총 28개 배역의 시장 인물을 오가면서 상인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성별을 바꾸니 더 잘 보인다…'디이펙트'가 전할 효과 김소연 기자, 한국경제, 25.06.19
'디 이펙트'는 항우울제 임상 테스트에 참여한 '코니'와 '트리스탄', 그리고 이 테스트를 감독하는 박사 '로나 제임스'와 '토비 실리'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사랑과 슬픔을 다룬 이야기다. 약물 시험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 감정의 본질을 탐구하는 동시에, 그 혼란스러운 감정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이번 공연은 세계 최초 '젠더 벤딩' 캐스팅으로 이뤄져 기획 단계부터 주목받았다. 젠더 벤딩의 사전적 의미는 '남녀 구분 없는 차림, 행동'으로, 배우가 자신과 다른 성별의 캐릭터를 연기하거나, 배우 성별에 맞춰 캐릭터의 성별을 바꾸는 경우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성별의 구분을 두지 않는 젠더 프리 캐스팅의 한 방식으로 알려졌다.
민 연출은 "소위 감정 인지가 취약한 코니 같은 캐릭터는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여성으로 성별을 부여했는데, 성 역할이 바뀐다고 해도 섬세하고 예민할 수 있다는 프로덕션 측의 아이디어가 저에겐 고무적으로 다가왔다"며 "또한 자유 의지가 강력한 인물도 남성 캐릭터에 부여했는데, 이걸 바꾸는 게 영국 프로덕션에서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받아들여주신 거 같다"고 전했다.
<라흐 헤스트> 김향안 장경진 공연칼럼니스트, 더뮤지컬, 25.06.20
예술가들의 연인은 대체로 오해 속에 산다. 그들은 예술가의 희로애락을 함께하지만, 예술가의 성취를 독점했다고 비난받거나 사생활이 시대를 초월해 가십거리로 소비되기 일쑤다. 많은 것이 예술가의 입장에서 기술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삶을 통해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예술과 사랑을, 예술과 삶을 온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이상과 변동림, 김환기와 김향안에게 예술은 사랑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완성이다. 상과 동림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모멸과 수치심을 읽어내며 가까워진다. 환기와 향안은 서로의 글과 그림에서 고독한 영혼과 따뜻한 위로를 느낀다. 취향과 관점을 공유한 이들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수많은 ‘뮤즈’들이 예술가의 불안을 잠재우는 존재로 그려지고, 동림과 향안 역시 예술가의 곁을 지키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하지만 <라흐 헤스트>는 현상 너머의 것을 읽어내는 동림과 향안의 심미안에 더욱 주목한다. (중략)
작품은 한 인물을 동림과 향안으로 나누고, 각자의 삶을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구성해 서로를 바라보도록 한다. 동림과 향안을 구분하는 요소 중 하나가 ‘후회’라는 감정이다. 물론 동림과 향안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림의 태도가 ‘후회하지 않는다’라면, 향안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에 가깝다. (중략)
무엇보다 동림과 향안이 서로를 지켜보고 수시로 만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향안은 새로운 사랑을 주저할 때 가방 하나 들고 이상과 함께한 동림의 용기를 떠올린다. 사랑으로 상처 입은 동림의 마음을 읽어주고 위로하는 이는 향안이다. 동림은 향안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 자기 신뢰의 힘을 키워간다. <라흐 헤스트>는 과거와 미래의 만남으로 내면에서 생겨난 혼란의 원인과 결과, 해결방안 모두가 오직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히 한다.
뉴욕필 손유빈 "어느새 중견 멤버로 11년 만에 내한…감회 새로워" 조기용 기자, 뉴시스, 25.06.24
"제 자리(관악기)는 이전 분이 35년 동안 계시다 은퇴하시면서 생긴 자리라, 35년 만에 나온 기회였어요. 제가 당시엔 뉴욕에 학생으로 있었는데, 그 시기에 자리가 난 것도 신기했고 몇백 명이 지원하는데 세 번의 오디션으로 들어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플루티스트 손유빈(40)이 지난 20일 공연기획사 마스트미디어를 통해 뉴욕 필하모닉 입단 당시 순간을 이같이 말했다.
뉴욕 필하모닉은 18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악단이다. 오는 26일과 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11년 만의 내한 공연을 갖는다. 이 공연에 손유빈이 함께 한다. 손유빈은 한국인 최초의 필하모닉 관악기 정단원이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의 작곡가 고(故) 손석우의 손녀인 손유빈은 줄리아드 예비학교, 커티스 음대, 예일 음대 대학원, 맨해튼 음대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거쳤다. (중략)
이번 공연에는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감독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이 함께한다. 짐머만은 지난 2003년 리사이틀 공연 이후 22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공연 첫날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과 교향곡 제3번 '영웅'을 연주한다. 이튿날에는 라벨, 드뷔시, 베를리오즈 등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한다.
손유빈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굉장히 따뜻한 분위기이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음악적인 요소가 많아 듣기에도 굉장히 편안하고 좋으실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살로넨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제3번에 대해선 "살로넨의 스타일은 약간 스포츠카를 운전하듯 굉장히 박력있고 유연하게 곡을 이끌어가는 느낌이라서 나 또한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관객들도 충분히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감을 높였다.
여성, 영화, 그리고 10년의 서사 권은경 기자, W Korea, 25.06.20
‘문화예술은 성평등과 포용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불균형의 지대인가?’
이런 화두로 2015년 칸 영화제에서 출범한 케어링 그룹의 ‘우먼 인 모션(Women In Motion)’이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여성을 지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더블유>는 케어링과 칸 영화제가 쌓아온 10년의 서사와 빛나는 힘을, 칸에서 확인했다. (중략)
올 초 조직위원회가 영화제와 관련해 가장 먼저 발표한 소식은 쥘리에트 비노슈가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는 뉴스였다. 작년 그레타 거윅에 이어 연달아 여성이 심사위원장을 맡는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쥘리에트 비노슈와 더불어 프랑스의 자부심을 채워주는 또 다른 배우이자 발렌시아가 앰배서더인 이자벨 위페르는 2009년 칸 영화제 때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지금까지 칸에서 영화제 최고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의 작품은 세 편이다. 2023년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2021년 줄리아 뒤쿠르노의 <티탄>, 1993년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영화계에서 영향력 있는 감독의 성비와 황금종려상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셋’은 아쉽지만 의미 있는 숫자다. 최근 영화제의 행보를 감안할 때도 여성을 둘러싼 희망적인 신호를 감지할 수 있다. (중략)
케어링이 ‘우먼 인 모션’ 10주년을 맞아 ‘2015년 이후 영화 산업 내 성평등의 변화’를 분석한 연구 결과는 살펴볼 만하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이자 다양성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스테이시 L. 스미스와 함께 진행한 연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 박스오피스 상위 100편 영화 중 여성 배우가 주연을 맡은 비율은 32%에서 54%로 증가했다. 여성 주연 영화가 남성 주연 영화와 동등한 흥행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한 진전이지만, 많은 여성 캐릭터가 성 고정관념에 따라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영화계의 여전한 과제로 남는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스크린에 등장한, 대사가 있는 배역 중 여성의 비율은 평균 32%에 불과하다. 이들 중 약 25%가 선정적인 의상을 착용했고, 또 다른 25%는 신체 일부가 드러난 모습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카메라 뒤편의 현실에 대해선 좀 더 생각이 많아진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 박스오피스 상위 100편 영화 중 여성 감독의 비율은 7.5%에서 13.6%로 증가한 수준. 주요 영화 시상식의 감독상 ‘후보’에서부터 여성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여성 감독의 영화가 후보로 지명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명할 여성 감독의 영화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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