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은 명상을 해보신 적 있나요? 아니면 관심은 있지만 선뜻 시도하지 못하고 계신가요? 저는 1년 반 정도 명상수업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해본면서 느낀 것은 '생각보다 문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초반 3개월 정도는 잡생각과 졸음, 다리 저림과 싸우느라 제대로된 명상을 못했거든요.
하면 할수록 '이렇게 해서 뭐가 달라질까? 달라지긴 할까?' 라는 의심만 들었습니다. 그때 저의 명상 선생님인 기율님이 해준 '이 말'이 아니었더라면 중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명상은 내면만 바꾸는 게 아니라 실제로 뇌 회로를 바꿉니다."
명상이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를 바꿀 수 있다니! 뇌회로가 바뀌면 어떤 경험을 하게될 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하드웨어가 바뀐다는 건 찰나의 느낌이나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레벨업'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덕분에 저는 포기하지 않았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하드웨어의 변화를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다.
혹시 저처럼 높은 명상의 문턱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기율님의 이 글을 꼭 읽어보세요. 저에게 그랬듯 구독자님에게도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어줄 지 모릅니다:)
구독자님 이번 뉴스레터에는 이런 내용을 담았어요
- '변성의식' 이란 무엇인가?
- 변성의식이 일어날 때의 2가지 변화
- 명상은 뇌의 하드웨어를 바꾼다
- 명상가의 뇌 vs 종교인의 뇌
- 변성의식의 스위치를 켜는 법
왜 사랑에 빠지면 시간이 다르게 흐를까?
구독자님도 혹시 이런 경험, 해보신 적 있으세요?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던 순간.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지하철 안에서 연인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내릴 역을 한참 지나쳐버렸던 일.
마라톤을 뛰다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 할 때, 갑자기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이상하리만치 기분 좋은 쾌감이 온몸을 감싸던 경험. 일상이지만 일상 같지 않았던 그 느낌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닙니다.
그 순간 우리의 뇌는 실제로 전혀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화학물질의 균형이 달라지고, 평소와는 다른 신경회로가 깨어나는 생리학적 사건이 일어나는 거죠.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변성의식(Altered State of Consciousness)'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를 FMRI로 찍어보면, 마약을 경험했을 때와 비슷한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특히 쾌락과 보상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되는데, 이는 코카인 같은 강력한 각성제가 자극하는 회로와 유사합니다.
도파민(Dopamine)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면서 상대를 더 생각나게 만들고, 옥시토신(Oxytocin)이 쏟아지면서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합니다. 뇌의 보상 회로가 더욱 활성화되고 강렬해지는 거죠.
마라톤을 뛸 때 경험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도 마찬가지입니다. 극한의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 뇌는 통증을 잊게 하는 엔도르핀(Endorphin)과 쾌감을 주는 엔도카나비노이드(Endocannabinoids)를 분비합니다.
그 화학적 변화는 우리를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의 몸과 마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고통을 잊고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거죠. 우리가 뭔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낄 때, 뇌는 실제로 다른 상태에 있는 겁니다.
이런 변성의식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신비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다만 그것이 변성의식이라는 걸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일상에서 '변성의식'을 켜는 버튼, 명상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조건부라는 점입니다. 달리기를 멈추면 희열도 사라지고, 연애가 끝나면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이던 마법도 풀립니다. 열정에 불타오르던 뇌가 다시 현실의 팍팍한 회로로 복귀하는 것이죠.
그 짜릿한 해방감을 맛보려면 우리는 다시 운동화를 신고 뛰어나가거나,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야만 합니다. 행복이 특정한 행위나 대상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 순간 느꼈던 그 평온함과 즐거움을 굳이 10km를 달리지 않아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지 않아도 느낄 수는 없을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도 그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상'입니다. 명상은 특정 상황에서만 켜지는 변성의식의 버튼을 일상에서도 언제든 켤 수 있도록 뇌의 기본값을 바꾸는 연습입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조건 없이도 내 안에서 스스로 그 충만함을 유지하게 하는 기술인 셈이죠.
명상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변성의식을 일상의 감각으로 만들 때, 우리는 고요하면서 즐거운, 나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요.”
맞는 말입니다. 명상은 분명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상을 오래 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방 안에 있는 건지, 아니면 방 밖에 있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꿈같은 경험을 했어요. 그러다 마치 내가 공간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텅 빈 느낌을 받았어요.”
“신기하게도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시끄러운 생각들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걱정도 불안도 없는 완전한 정적만이 남았죠.”
변성의식이 일어날 때의 '두가지 변화'
처음에는 두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명상이 나를 통제 불가능한 부정적인 상태로 밀어 넣는 게 아니라, 명상을 통해 의식의 모드가 전환되고 있는 분명한 생리학적 신호입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 신비로운 해방감은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합주입니다.
첫 번째는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변화입니다.
우리의 뇌, 정수리 뒤쪽에는 후상두정소엽(Posterior Superior Parietal Lobule)을 포함한 두정엽이라는 부위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고성능 GPS와 같습니다. 내 팔과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내 몸이 공간 속에서 어디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매 순간 계산해서 ‘나와 세상’의 물리적 경계를 긋는 역할을 합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이 부위로 흘러 들어가는 감각 정보가 줄어들고 활동이 현저히 잠잠해집니다. 경계를 긋는 기능이 일시적으로 쉬게 되는 것이죠. 이때 우리는 손이 사라졌다거나 몸이 공간과 하나가 된 것 같다는 신비로운 일체감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나’라는 주관적 서사가 멈추는 변화입니다.
물리적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과 맞물려, 심리적 경계인 '에고(Ego)'의 목소리도 잦아드는 거죠. 평소 우리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 특히 미간 안쪽의 내측 전두엽은 쉴 새 없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끊임없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찍어내죠. 우리가 괴로운 건 ‘나의 이야기’가 너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명상은 과열된 이 회로의 볼륨을 조절해 줍니다. 어느 순간, “내가 잘하고 있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질문들이 더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 검열과 평가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깊은 편안함이 스며듭니다.
몸의 경계가 사라지고, 나를 괴롭히던 생각의 소음마저 잦아든 상태.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 두 가지 변화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결과입니다. 이 깊은 지점에 도달해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것 같은 완전한 자유를 맛보았다고요.
소프트웨어를 넘어 '하드웨어'를 바꾸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단 몇 번의 명상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 식듯, 달리기를 멈추면 러너스 하이가 끝나듯 명상 역시 처음에는 눈을 뜨면 다시 시끄러운 현실이 밀려오고, 걱정과 후회,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과정을 거처야 합니다. 하지만 명상을 꾸준히, 지속한 사람들에게는 뇌 안에서 조금 다른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뇌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회로를 강화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를 신경가소성이라고 합니다. 마치 근육이 훈련될수록 단단해지듯, 뇌도 우리가 자주 쓰는 마음의 상태를 점점 '기본값(Default)'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명상을 통해 내면의 소음이 잦아드는 경험을 반복하면, 뇌는 서서히 그 고요한 상태를 새로운 기준점으로 재설정합니다.
실제로 숙련된 명상가들의 뇌를 찍어보면, 명상하지 않는 평상시에도 일반인과 다른 구조를 보입니다. '나'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추하는 회로의 연결성은 헐거워지지만, 현재의 감각과 주의력을 담당하는 뇌 피질의 두께는 두꺼워져 있습니다.
명상이 단순히 기분이나 생각을 바꾸는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를 넘어 신경회로라는 하드웨어 자체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명상가의 뇌'라고 부릅니다.
명상가의 뇌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변성의식과 닮아있으면서도 다릅니다. 사랑에 빠진 뇌와 격렬한 운동에 취한 뇌가 도파민을 태우며 '나'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것과 달리, 명상가의 뇌는 '나'라는 감각 자체가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뜨겁게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서늘하게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서,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시선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명상가의 뇌에서 일어나는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사실 공간감의 소멸이나 불안 같은 감정의 흐릿함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자의식의 변화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삶의 이야기가 나를 둘러싼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의 뇌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작동합니다. 운전하다 사고가 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화가 나고, 지인이 큰돈을 벌거나 성취를 이루면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지, 비판적인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이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지고 고통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됩니다.

명상가의 뇌와 종교인의 뇌가 비슷한 이유
그런데 명상이 깊어진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다르게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성공한 지인을 보며 마치 내가 잘된 것 같은 기쁨을 느끼고, 나를 짜증 나게 한 동료의 얼굴에서는 그 사람이 견디고 있을 무게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의 고통이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짊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무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서사의 볼륨이 낮아지면서,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타인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뇌의 회로가 구조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나만의 불행이었던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 되는 순간, 그 무게는 혼자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뇌가 도달할 수 있는 이 궁극의 상태가 비단 명상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깊은 신앙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집착이 옅고, 타인의 고통에 쉽게 마음이 움직이며,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맑고 환한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일상 그 자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종교인이 경험해 온 '신비 체험' 혹은 '황홀경'도 뇌과학의 시선으로 보면 놀라울 만큼 명상가의 뇌와 닮았습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감미로웠다. 내 영혼이 몸에서 떠나 신과 하나가 되는 듯했다.”
16세기 가톨릭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가 남긴 황홀경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녀는 기도의 절정에서 육체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거대한 사랑의 빛 속에 머무는 체험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을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만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은 이 현상을 조금 다른 언어로 설명합니다.

신과 합일되는 순간 쏟아져 나오는 '감마파'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의 마리오 보리가드(Mario Beauregard) 박사팀이 가톨릭 수녀들이 깊은 기도에 빠졌을 때의 뇌를 연구한 결과,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되었습니다. 기도가 깊어지면서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뇌에서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감마파(Gamma waves)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감마파는 30~100Hz의 매우 빠른 진동수를 가진 뇌파입니다. 주로 고도의 집중 상태, 혹은 복잡한 정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통찰이 일어날 때 나타납니다. 뇌의 서로 다른 영역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완벽하게 박자를 맞춰 움직일 때 나오는 초(超)연결의 신호인 셈입니다.
이 뇌파 패턴은 오랫동안 명상 수행한 티베트 고승이나 숙련된 명상가들이 깊은 삼매(三昧)에 들었을 때의 뇌파와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리처드 데이비드슨 박사가 달라이 라마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명상이 깊어지는 순간 전전두엽을 중심으로 강력한 높은 감마파 동조(High-amplitude Gamma Synchrony)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일반인의 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거대한 통합의 물결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도하는 수녀님과 명상하는 승려가 바라보는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한쪽은 신(神)을 향해 있고, 다른 한쪽은 '공(空)'이나 '변화하는 대상 그 자체'를 향해 있습니다.
언어와 교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한 뇌의 생물학적 좌표는 동일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평소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물리적인 경계가 사라지고, '나'라는 에고의 서사가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통합하고 조망하는 통합 회로가 움직이는 순간. 뇌는 더 이상 나와 남, 내 몸과 공간을 분리해서 인식하지 않습니다. 경계가 사라진 뇌는 혼란스러워하는 대신 그 경계 없음을 무한한 확장으로 받아들입니다.
수녀님은 이 무한함을 신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명상가는 무상함으로 해석합니다. 해석은 다르지만 느낌은 같습니다. 나라는 작은 물방울이 터져서 거대한 바다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압도적인 해방감을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성은 내면에 내장된 '가장 진화된 의식모드'
우리가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이미 내장된 가장 진화된 형태의 의식 모드일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평소에 생존을 위해 나라는 기계를 돌리느라 그 스위치를 켜는 법을 잊고 살았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 스위치를 켜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거창한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출가를 하거나, 히말라야로 떠날 필요도 없습니다. 일상에서 반복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습관을 만들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마감하며 15분~20분 정도 자신의 호흡소리에 집중해 보세요. 편한 곳에 앉아 잠시 주위의 소란에서 벗어나 보는 겁니다. 호흡이 거칠면 거친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호흡이 드나드는 코끝에 의식을 집중하며, 있는 그대로 호흡의 과정을 수용하며 관찰하면 됩니다.
잘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며 내가 나를 차분히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는 순간, 의식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 균열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방석 위에서 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뇌의 회로가 바뀌고 마침내 나라는 감옥의 벽이 허물어지는 변성의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명상이 우리를 데려가는 또 다른 세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 이 순간에 있습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면을 쓴 얼굴이 아닌 그 이전부터 언제나 거기 있었던 진짜 내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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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명상의 시간이 존재했었던가? 생각해봅니다. 그동안의 명상은 항상 공간에 밀착해 있었던 것 같아서요. 돌이켜 생강해보니, 저는 명상 중에는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다만 공간의 빛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공간의 빛도 잠잠해지고,에너지체가 몸 안에서 오고가는 것에 집중이 옮겨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HOLYN
이제 정말 프로 명상러의 경지에 오르신 것 같아요!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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