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친구들 #2] 할머니

두 번째 인사드려요. 저는 야르고요.
뭐 했다고 십일월일까요… 제 시계는 요즘 정말 빠릅니다.

첫 번째 편지는 잘 받으셨을까요? 떨리는 마음으로 보냈는데요, 보내주신 구독과 댓글이 소소하지만 큰 기쁨입니다. 응원에 힘입어 두 번째 편지를 부칠 수 있습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차차가 할머니에 관한 음악 이야기를 써보자 제안해 주었습니다. 처음엔 솔직히 엥? 내가 쓸 수 있을까? 했지만 용기에 힘입어 할머니와의 기억과 그 안에 담긴 정직한 마음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붙이란 멀지만 가깝고, 가깝고도 먼 것 같아요.

꼭꼭 숨기고 싶고 민망하기도 한 가족이란 형태에 담긴 여러분들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날이 쌀쌀해졌으니 따뜻한 것 주기적으로 드시고요. 감기 조심하셔야 해요.

두 번째 음악 편지도 찬찬히 읽어봐 주셔요.

오늘의 안부

야르의 이야기

가을이 성큼 찾아왔습니다.

날씨가 부쩍 쌀쌀해진 탓에 두꺼운 이불과 베개를 꺼냈습니다. 이제 외출할 때면 두툼한 외투를 챙기고 있고요. 쌀쌀해진 날씨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의 온기가 전해질 때 더욱 선명해진다는 겁니다.

온기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와 둘이서 간 병원

오늘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동네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마음이 이상합니다.

"이현경, 늘 어깨를 펴고 다녀라."라고 말하던 굳센 할머니가 이제 끙끙대시며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고 제 품을 의지하면 걷고 있다는 게요.

시월엔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살면서 할머니는 제게 전화를 해본 적이 없기에 얼떨떨하게 받았습니다.

"현경아, 네 집이가?"
"네, 근처에 있어요. 할머니 무슨 일 있어요?"
”할머니 라면이 먹고 싶은데 사 와 줄 수 있나?"

할머니와의 첫 통화

하던 일을 멈추고 근처 마트에 부리나케 가서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안성탕면을 사서 끓여드리고 스크램블을 해드렸습니다. 식사를 마치시고는 자주 보는 방송을 트시더니 스르륵 소파에 잠에 드셨습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할머니 치마폭에 자꾸만 스르르 두 눈이 감겨만 간다." (김동률, Lullaby)

이 노랫말을 들으니, 할머니와 동고동락했던 시간이 흐릿하게 떠오릅니다.

소싯적 부모님은 맞벌이하는 탓에 저를 자주 할머니 댁에 맡기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소고기국밥을 해주시고 전 옥상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지쳐 돌아와 거실에 있는 소파에 누워 잠든 날도 많았고요.

할머니와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순간을 떠올려보니 시간이 야속히도 흐릅니다.

여러분에게 십일월은 어떤 계절인가요.
저는 가늘어진 할머니의 목소리, 표정이 없는 얼굴, 노쇠해진 머리카락을 보면서 시간의 유한함을 느껴가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낯부끄러워 표현하지 못했다면, 늘 망설이고 망설이다 안부를 전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방식으로 안부를 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저녁이 되니 날이 더욱 쌀쌀합니다.
두툼해지고 있는 옷차림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온기를 지나치게 아끼지 않고 내 곁에 있는 존재들에게 피부로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때 시간을 맞춰 표현을 못 하기에는 인생이 많이 짧은 것 같아요.

야르가 보내는 오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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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 제목이 뭐였어요?

차차의 이야기

할머니. 지난 달 야르와 '11월은 어떤 주제로 편지를 보낼까.' 고민하다 떠오른 단어입니다. 추석을 쇠고 돌아와서 였을까요? 실은 제안과 동시에 후회했답니다. 과연 이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 무슨 글이든 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마 제가 자라며 할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를 경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저희 조부모님은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하며 손주를 얼싸안아주는 분들이 아니었거든요. (너무 단순하죠?)

아, 제가 오늘 말씀드릴 할머니는 우리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입니다. 제 친할머니는 아빠의 어린 시절에 일찍 돌아가셔서 뵌 적이 없기에 전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구분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먼저 하늘로 가신 친할머니께 죄송하지만, 저에게 할머니란 서채분 여사 한 분 뿐입니다.

위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에겐 할머니와 살을 비비던 친밀한 기억은 없다시피 합니다. 다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어요.

통영의 새파란 바다, 가지런히 오르내리는 통통배들, 그 곁에 동동 떠다니는 갈매기.
엄마가 나고 자란 섬 곤리, 엄마의 작은 방, 바다를 향해 난 창문, 낡았지만 깨끗한 집.
차가운 보리차와 종종 그리운 통영식 나물밥.
때마다 저 멀리 선착장에서 들려오는 출항 신호.
평생 어부였던 할아버지가 통발에 채워오신 뽈라구, 툭툭 쳐서 내주시던 회.

할머니 댁에서 보이는 선착장 풍경

통영엔 나물밥이라는 음식이 있어요

할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날이면 동트기도 전부터 아이스박스에 음식을 눌러 담으셨습니다. 작별 인사를 할 때는 용돈을 쥐여주며 쿨하게 "가라."하고 배웅해주셨고요. 저희가 내려가고 나면 선착장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 배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시고, 저희도 점점 작아지는 할머니를 향해 팔을 크게 휘저었어요. 멈추지 않고 나부끼는 할머니의 손... 여운을 곱씹을 새도 없이 뱃머리를 돌려 질주하는 배, 그 시끄러운 엔진소리. 아직도 선명합니다.

구구절절 쓰다 보니 정박한 통통배가 된 것처럼 울렁울렁합니다. '할머니 댁'이나, '명절'처럼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리는 게 글을 쓸 때 도움이 될까 했을 뿐인데, 흐렸던 마음이 쨍 선명해지고요. 한편, 이 주제를 꺼렸던 이유를 한 가지 더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를 향한 마땅한 크기의 마음이 없다는 사실. 그게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리저리 흩어진 생각과 감정들이 정리되었어요. 살갑고 애교 많은 손녀는 아니지만서도, 저도 할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미숙한 모양으로요. 제 사랑은 늘 마음보다 아는 것이 느리게 따라오네요.

선착장에서 할머니 댁을 바라봤을 때

할머니께서 요양원 입소 전 반년 정도 우리 집에 머무신 기간이 있습니다. 함께 일상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라 서로 어색하기도 했지만 할머니를 환영하던 첫날과 사위가 제일 많이 울던 첫 가정예배, 몇 개월 후 더듬더듬 주기도문을 외셨던 날들은 결코 잊지 못하겠지요. 그때만 할 수 있던 일과, 불편했던 일까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할머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눌걸, 사진을 더 많이 남겨둘걸 아쉬움도 많습니다. 왜 우리는 늘 소중한 사람에게 소홀하고 결국 후회할까요. 뻔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 집에 오신 첫날, 할머니를 환영하는 케이크

어느 날은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셨어요. 동생과 함께 거실에 앉아 나직하고 수줍은 노래를 들었죠. 그날의 모습이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머뭅니다. 오늘 서채분 여사께 전화를 드려야겠어요. 흐르는 대로 인생을 보내다 영영 어떤 노래였는지 알지 못하기 전에요.

"할머니, 그날 그 노래. 제목이 뭐였어요?"

차차가 보내는 오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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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르 : 저는 요즘 신인 감독 김연경을 보는 재미에 살고 있습니다. 배구 재밌는 스포츠네요…. 시즌 2를 오매불망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불안하지 않은 게 불안입니다….

🌲 차차 : 음악은 그저 곁들임... 제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네요. 이대로 괜찮은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고새 가을이 훅 지났어요. 감기 걸리는 게 죽어도 싫어서 벌써 패딩으로 꽁꽁 싸매고 다닙니다. 다들 건강하시길 바라고요, 할머니가 불러주셨던 노래는 다음 편지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후후

여러분의 댓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야르와 차차가 즐겁게 읽고 뿌듯해하고 있어요. 답장 기다릴게요!

그럼, 12월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