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친구들 #3] 12월의 구질구질함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차차입니다.

어느덧 2025년의 마지막 편지를 부칩니다. 아직 햇병아리 뉴스레터이지만 함께 연말을 보내는 것 같아 왠지 기분이 묘하군요. 이곳을 빌려 여러분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2025년 동안 잇는음감회의 이런저런 작당을 기쁘게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서 댓글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신 분들도 계셨어요. 우정이 깊어지는 뜨끈한 겨울이 되었으면 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편지 마지막에는 내년 1월의 음감회의 자세한 소식을 담아두었습니다. 매년 12월 저희만의 송구영신 모임을 하다가, 이번엔 신년하례를 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시작에 깃든 여러분의 이야기와 음악이 궁금해요. 많이들 찾아와 주셔요.

이번 12월 편지의 주제는 "12월의 구질구질함"입니다. 야르와 저 사이에 '떳떳하기 쉽지 않은 12월'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크리스마스나 첫눈의 설렘이 아니라, '구질구질함'이라는 말로 수식해 버린 이달에는 어떤 이야기와 음악이 준비될지 저 자신도 궁금했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밟혀 녹은 눈은 구정물이 되고

차차의 이야기

본격 겨울이 휘몰아칩니다. 학교 소재의 일터에 있다 보니, 12월 초의 입학시험 날에는 험난한 시작을 경고하듯 꼭 폭설이 내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그다음 날 내렸지만 말이죠!) 언젠가 이놈의 눈 때문에 하늘에 대고 “멱살 잡고 싶다.”라고 거칠게 표현했던 날이 떠오르네요. 그도 그럴 게, 평소면 15분이면 도착할 출근길을 장장 2시간이 걸려 도착했기 때문이에요. 첫눈, 온통 하얘진 세상, 목도리, 호빵, 난로… '낭만이라고? 다 집어치우라 그래.' 소싯적 진눈깨비라도 흩날리면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던 저(부산 출신), 이제 눈이라면 질릴 대로 질려버렸습니다. 이렇게나 손쉽게요!

첫눈을 반기는 자세

눈을 좋아하시나요? 전 여전히 하나의 색깔로 덮인 세상을 보며 천연하게 경탄하지만, 이리저리 밟힌 눈이 구정물로 고여있는 모습은 썩 좋아하지 않아요. 그 물이 또 찬 기운에 얼어서 깔린 블랙아이스는… 슬쩍 딛기만 해도 머리가 삐쭉 설만큼 미끄럽고 아찔하죠. 제설차가 관리하지 않는 도로를 보면 화가 나다가도 보편적 근무시간을 막론하고 일해야 하는 노동자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전 눈을 좋아하는 걸까요, 싫어하는 걸까요? 하고픈 말도 장황해요. 참으로 지리멸렬한 달입니다.

그리 목표지향적이지도 않은데도 칼바람 같은 12월의 연말 결산을 맞으면 매양 주눅이 드는 이유, 아마 자기 증명의 부담감이겠지요. 환절기에 부쩍 많이 전해지는 부고나 연말에 쳐내기 바쁜 업무 영향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젠 함박눈이 펑펑 내려도, 눈사람을 만드는 이들의 들뜬 모습을 보아도 도통 신나지 않습니다. 고작 2-3주 전에 양껏 누렸던 가을의 넉넉함, 기쁨은 이미 구전설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퇴근 시간에 하늘이 깜깜해요. 밤이 너무 길어졌어요. 이것만큼 절 무력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12월에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여유가 없고 감정 구두쇠가 된 것처럼 구질구질합니다.

롱패딩으로 바닷바람만 막으면 문제없던 따뜻한 남쪽 나라 이야기가 못내 부럽고, 몸을 데울 수 있는 뜨끈한 음식이 땡기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순대국밥, 버섯전골, 감바스, 수프 카레, 핫초코, 체크무늬 코스터 위에 얹은 스패니쉬 라떼… 그 음식을 같이 먹던 사람들, 웃음소리, 포근한 스웨터, 갈색빛이 가득했던 온화한 다락방,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긋듯이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대놓고, 끈적하게 밴 음악을 찾아서 듣게 됩니다. 다 집어치우라 한 것치고 좀 웃기죠. 구시렁대면서도 추운 몸을 녹일 수 있는 가상의 집을 그리워하게 돼요. 생존 본능이랄까요, 부쩍 추워지기 시작하는 12월엔 더 그런 것 같네요. 집 같은 공간, 사람, 음식, 음악… (tmi. 오늘은 뚝배기에 뜨끈하게 감바스를 해 먹었답니다. 갓 구운 바게트도 곁들였어요.)

언젠가 야르에게서 "집은 관계성을 기반하여 이어지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건네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이어지는 이 편지도 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은 하나의 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설렘 씨앗이 툭 떨어져 심기는 기분입니다. 또 어떤 음악가를 통해 세상에 나온 책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여름보다 겨울이 더 따뜻하지 않은가요? 추위을 핑계 삼아 서로의 안부를 자연스럽게 묻고, 따스한 초대를 건넬 수 있으니까요. 잠시 여담, 어느날부터 한 계절이 가진 새 면모 찾는 일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직관적으로 감각하는 것 너머를 직접 경험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조각을 건네받으며 간접적으로 맛보기도 해요. 즐거운 일이랍니다. 어떤 겨울에는, 겨울이 춥기만 한 계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어요.

자, 여러분. 여전한 12월의 초조함과 구질구질함을 간직한 채 제안합니다. 이 추운 날 무엇이든, 우리만의 따뜻한 집을 지어보자고요. (사유: 혼자 못 버팀) 밟혀 녹은 눈이 구정물이 되어 얼룩진 세상. 그 위로 다시 눈이 희게 덮이면 그 거리를 자박자박 걸어올 여러분을 기다릴게요. 보내드리는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일 수도, 언젠가 얼굴을 맞댈 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진짜 집일지도 몰라요.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부디 눈길 조심하세요! 녹은 것처럼 보이는 곳은 특히 더 조심하셔요. 눈이 오지 않는 부산은, 바람을 막기 위한 롱패딩이 안성맞춤입니다. 2025년 한 해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 많으셨어요. 모두 건강하게 행복만이 가득한 연말 되시길 기도해요.


차차 드림.

차차가 보내는 오늘의 음악🎧

수치심에 대하여

야르의 이야기

12월입니다. 1년이라는 긴 호흡을 정리하는 '마지막 달'이라는 핑계로, 슬금슬금 지난 11개월의 나태와 성실을 뒤적여봅니다. 사실 통장잔고를 확인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인데, 오늘은 불현듯 작년 이맘때 겪었던 어떤 수치심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꼭 일기를 꺼내 읽는 기분입니다. 이번 기회로 제 수치스러운 역사를 똑바로 쳐다봐야겠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바쁘다', '내겐 중요한 일이 있음'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제 몸을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헬스는 늘 작심삼일이었지만 달리기는 웬일인지 꽤 꾸준히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달리기가 헬스장 거울 속 나를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이라서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가던 중, 새로운 동네에서 사귄 친구와, 동네 삼촌과 10km 마라톤 대회를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대회를 코앞에 두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본가에서 꼼짝 않고 쉬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이번 대회는 내가 지른 야심 찬 실수였구나'. 하고 포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동네 삼촌에게서.

"현경아, 내일 대회 있는 거 알제? 삼촌 차 타고 같이 가자."

몸이 안 좋고, 대회장도 멀리 떨어진 터라 마음이 이미 떠나 있었는데, 그 한마디가 저를 움직였습니다. 약속은 지켜야지, 나름의 '국룰'이 발동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저는 정말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차를 끌고 달렸습니다. 눈은 침침하고 몸은 뻐근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3시간 넘게 운전했습니다.

황간역 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6시 즈음. 너무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이제 출발해야지' 하고 시동을 켰는데, 세상에. 차가 묵묵부답입니다. 계기판에는 처음 보는 경고음과 함께 '타이어 공기압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까지.

순간 삼촌에게 연락할까 싶었지만, '이 시간에 폐를 끼칠 순 없지'라는 강박이 있었고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 동네에서 겨우겨우 기사님을 설득해 잡았습니다.

그렇게 삼촌을 만났고, 삼촌은 늘 아재 개그를 던지던 장난기 넘치는 얼굴이었습니다.

"아이고, 현경이 왔네! 차는 어쩌고?"
"아... 제 차가 배터리가 방전돼서요. 택시 타고 왔어요."

삼촌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었습니다.

"왜 내한테 연락을 안 했어?"
"네?"
"나는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이가."

이어지는 말은 제 머릿속에 오랫동안 박혀있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라는 굳건한 국룰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중요한 사람한테는 폐를 끼칠 줄 알아야 된다. 그래야 나도 니한테 부탁도 하고."

이때 몰려온 감정은, 제가 황간역 주차장에서 배터리 방전 사실을 혼자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수치심이었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기분이었습니다. '혼자 해결을 잘 못하는 내 모습이 싫다'라고 생각했으니깐요. 그리고 틈이 있더라도 결코 그 틈을 들켜선 안 되는 이 분위기에서 더더욱 말이죠.

그런데 그 단호했던 삼촌의 말이 제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너의 '중요한 사람'이라면, 너의 틈을 보여줘도 괜찮다고. 그 수치스러운 틈이 메워지고, 그 틈이 어쩌면 서로가 진실되게 이어주게 만드는걸요. 수치스러웠지만, 배터리가 방전된 차보다 더 방전되어 있던 제 마음의 약점을 마주했습니다.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때로 폐를 끼치는 걸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자. 어쩌면 약점을 꺼내놓을 때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늘 밀어내고 싶은 손님인 수치스러움이 찾아올 때마다 김도향 선생님의 멜로디에 얹어진 그윽한 고백을 떠올리고 적당히 웃어넘기려고 합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일 년이 지났습니다. 오랜만에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꺼내보니 대회가 끝나고 난 뒤 우르르 동네 삼촌들이 몰려와 마치 인공 호흡하듯 제 차를 만져주며 고쳐줬던 손길들이 떠오릅니다. 다들 잘 지내시죠?

야르가 보내는 오늘의 음악🎧

🐢 야르 : 매주 화요일마다 싱어게인 55호님의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뉴스레터가 발행되는 날에 55호님이 탑텐이 되셨을지… 안되도 괜찮은데 뭐, 조금 더 사랑 받으셨으면 좋겠네요.

🌲 차차 : 커피 내려먹는 재미에 삽니다. 작은 변수에도 향과 맛이 크게 바뀌는 커피의 세계가 심오하면서도 참 흥미로워요. 수련을 거듭할수록 어쩐지 더 헤매다가, 마음에 합한 커피를 내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답니다. 요즘은 책보다 애니메이션을 훨씬 많이 보는데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가 곧 애니로도 완결되면 독서 권태기를 깨고 다시 돌아올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히로아카가 끝나면... 어쩌죠? 제 세상의 하나가 끝나는 듯한 상실감을 어떡하면 좋나요!!!(오열)

웃게 하고, 그로 인해 웃는 히어로의 본질... (주접)
완결을 앞두고 재정주행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