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의 이야기로 여는 글
“그날, 저는 제 머리를 의심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중간고사 날이었습니다.
시험지를 받아 들고 문제를 읽었는데,
문장 전체가 의미 없이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제 밤까지 정리했던 개념도
읽고 3초가 지나면 사라졌고,
한 문장을 여러 번 읽어도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은 안개 낀 듯 흐릿했고
생각은 멈춰버린 채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저는 그저 시험지를 바라보고만 있었죠.
시험을 망치고 나온 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혼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나 진짜 바보가 된 걸까?”
“왜 이렇게 멍청해졌지?”
“이게 진짜 내 머리야?”
그날의 충격은
점수보다 더 깊은 곳을 흔들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처음 무너지던 순간이었으니까요.
[2] 이해하기 – 조울증이 뇌의 ‘생각 회로’에 미치는 영향
조울증을 떠올리면 흔히 ‘기분의 변화’를 먼저 생각하지만,
사실 이 질환은 감정만 움직이는 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고, 기억, 판단을 담당하는 뇌의 인지 회로 전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면,
“왜 나는 분명 노력하는데 공부가 안 될까?”
“왜 일상적인 일조차 예전처럼 처리되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 더 선명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 인지 기능이란 무엇일까?
‘인지 기능’은 우리의 뇌가 정보를 받아서 이해하고, 저장하고, 활용하는 능력 전체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뇌 안에 있는 생각의 컴퓨터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여러 부품이 맞물려 돌아갑니다.
- 주의력(집중): 잡음을 걸러내고 필요한 것에 시선을 고정하는 능력
- 기억력: 정보를 넣고 꺼내는 저장 장치
- 실행 기능: 계획을 세우고 순서를 정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운영 체제
- 사고 속도: 정보를 처리하는 CPU의 속도
- 언어 기능: 말과 단어를 떠올리고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
조울증은 이 회로의 여러 부품을 흔들어 사람이 본래 가진 지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평소의 나’와 전혀 다른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사실, 최근 연구들은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 환자들에게서 주의, 기억, 실행 기능, 처리 속도 등 다양한 인지기능 저하가 만성적으로, 에피소드가 없을 때(조증/우울 상태가 아닐 때)에도 나타난다고 보고했습니다.
또한, 인지기능 저하는 단순히 증상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기에도 남아 기능적 삶의 질에 영향을 준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 조증기 – 생각이 과열되고 연결이 지나치게 많아질 때
조증기에 뇌는 마치 과열된 엔진처럼 움직입니다.
생각이 폭주하고, 속도가 빨라지고, 필요 없는 연결까지 동시에 들어옵니다.
- 말이 너무 빨리 나와 스스로도 문장을 따라가기 어려움
- 생각이 한 가지 주제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튀어 올라감
- 논리적 연결이 무너져 갑자기 결론을 내리거나 엉뚱한 판단을 하기도 함
- “이것도 할 수 있어!”, “저것도 가능해!”와 같은 과대 확신이 생김
즉, 뇌의 회로가 과잉 연결(over-connection) 상태에 들어가면서 사고가 정돈되지 않는 일들이 잦아집니다.
이런 현상은 인지신경과학 측면에서 보면, 처리 속도와 실행 기능의 비정상적 증가 혹은 과부하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이후 인지적 피로감이나 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 우울기 –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정보 처리가 멈추는 듯한 경험
반대로 우울기에는 뇌의 CPU가 거의 저속 모드로 떨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 문장을 읽어도 의미가 들어오지 않음
-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문이 막힘
- 해야 할 일을 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림
- 멀티태스킹은 사실상 불가능
- 기억을 저장하거나 꺼내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
이 상태는 의지가 약해서도, 게을러서도 아니라 뇌의 정보 처리 속도 자체가 저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연구에서 양극성 장애 환자의 정보 처리 속도(processing speed)와 주의(attention) 기능이 건강군보다 유의하게 떨어져 있다는 메타분석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 실제로 자주 나타나는 인지 저하 증상들
아래는 많은 조울증 당사자들이 공통적으로 보고하는 어려움입니다.
- 5분만 지나도 집중이 끊어지고 잡생각이 밀려옴
- 말하려던 단어가 입 안에서 사라지는 느낌
- 앞 문장을 읽었는데 뒷 문장과 연결이 안 됨
- 단순한 업무도 단계가 헷갈려 순서를 자꾸 틀림
- 계획을 세웠는데, 다음 날이 되면 기억이 잘 나지 않음
-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 속도가 느려짐
-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사고가 멈춘 느낌
-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능력이 거의 사라짐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 실제 뇌의 네트워크 속도와 연결 방식이 변하는 현상입니다.
인지기능 저하가 단지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회복기 혹은 증상이 없을 때에도 잔존하는 특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 이 어려움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인지 기능의 저하는 삶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 학생 시절에는 이해 속도가 느려지고 기억력이 떨어져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 직장에서는 실수, 누락, 착오가 잦아지고 회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들며 능력 부족으로 오해받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 일상에서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지?" "예전엔 이런 내가 아니었는데..." 라는 자책이 쌓이면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대인 관계에서도 위축되는 일이 잦아집니다.
사실 많은 당사자들은 이 변화가 ‘자신 때문’이라고 여기지만,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울증이 뇌의 회로를 변화시키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인지 기능의 저하가 기분 변화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인식의 전환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책은 줄어들고
조금 더 자신을 이해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3] 마음약국 노트 – “예전의 나처럼 생각이 안 돼요”
요즘 마음약국으로 들어오는 메시지 중 가장 많은 말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내가 머리 하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그런데 요즘은 단어 하나 떠올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책 한 페이지 읽는 데도 집중이 안 돼요.”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랑 이야기할 때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도 까먹어요.”
그리고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미치겠는 건 이게 ‘내가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회의에 참여하는 것도 무서워요.”
이 고백은 조울증 당사자들이 가장 자주 겪는 마음의 균열 중 하나입니다.
기억력, 집중력, 말하기 같은 ‘생각의 기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점수보다 성과보다 먼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약국 노트는 이런 경험을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어려움은 당신의 탓도, 나약함도 아닙니다.
뇌가 잠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4] 회복 가이드 – 흐릿한 생각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법
생각이 흐릿하고 집중이 잘 안 되는 날,
많은 분들이 “나는 이제 끝난 것 같아요”라는 감정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인지 저하는 뇌가 보내는 과부하 신호일 뿐,
여전히 회복 가능하고, 다시 서서히 정상적인 속도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마음약국 구독자분들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주신
‘작지만 확실한 회복 방법들’을 정리한 가이드입니다.
✅ 오늘부터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1) 두뇌를 혹사하지 않기 – ‘억지로 버티기’ 대신 ‘쉬어가기’ 선택하기
- 집중이 안 되는 순간에 억지로 붙잡고 있으면뇌는 더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 그럴 땐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기, 물 마시기, 5분 동안 눈 감기처럼 짧은 휴식을 의도적으로 끼워 넣어주세요.
- 깊이 있는 공부나 독서가 힘들다면 5~10분 단위로 짧게 두뇌를 쓰는 ‘마이크로 루틴’을 만들어 보세요.뇌는 짧고 가벼운 자극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2) 인지 저하를 기록으로 남기기 – 뇌의 컨디션 주기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
- “오늘 단어가 잘 안 떠올랐던 순간”, “집중이 깨진 시간과 이유”를 간단히 메모해보세요.
- 이런 기록은 단순한 감정 일기가 아니라 뇌의 리듬을 파악하는 데이터가 됩니다.
- 어떤 날은 아침에 집중력이 좋고, 어떤 날은 오후에 흐려질 수 있습니다. 이 패턴을 알면 불안이 줄고, 일정을 조절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3) 단순한 정보처리 훈련 – 뇌를 다시 ‘워밍업’ 시키는 루틴 만들기
뇌는 근육과 비슷해서,
작고 쉬운 반복 훈련이 인지 회복에 실제로 도움을 줍니다.
- 하루에 한 문단씩 소리 내어 읽기
- 매우 쉬운 짧은 계산이나 암산하기
- 3~5줄 간단한 메모 남기기
- 짧은 기사 한 개 읽고 핵심 문장 하나 적어보기
이렇게 작은 단위를 반복하면
정보를 받아들이는 회로가 천천히 다시 살아납니다.
❗ 피해야 할 오해들
생각이 흐려지는 시기를 겪을 때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내 머리가 망가진 거야.”
-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못 살아.”
- “사회생활은 이제 끝났어.”
하지만…
☝️ 사실이 아닙니다.
조울증에서 나타나는 인지 저하는
충분히 회복 가능한 증상이며,
기분 상태·수면·약물 안정성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많은 연구에서 기분이 안정되면
주의력, 기억력, 실행 기능이 다시 천천히 회복된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의 어려움이 ‘영원히 계속되는 나’가 아닙니다.
🛠️ 회복을 도와주는 도구들
많은 분들이 직접 추천한 “정말 효과 있었다”는 도구들도 함께 나눕니다.
- 루틴 속 기억 도우미
- 집중력이 가장 좋은 시간대에 중요한 일을 몰아두기
- 명상·복식호흡으로 주의력 회로 강화하기
- 일정 관리 앱으로 하루에 필요한 일을 ‘세 줄’만 기록하기
- 작업 환경 단순화
작은 도구 하나가 생각의 흐름을 되찾는 데 큰 힘이 됩니다.
[5] 조우의 편지 – 당신의 ‘생각’은 다시 빛을 찾습니다
여러분, 생각이 흐려지고 말이 느려지는 날들이 반복되면
문득 이런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혹시 내가 바보가 된 걸까?”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지?”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여러분이 부족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뇌가 우리에게 보내는 조용한 휴식 신호일 뿐입니다.
조울증은 감정뿐 아니라
뇌의 에너지와 사고 회로까지 크게 흔드는 병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생각들도
안개 속에 잠시 가려진 것처럼 흐려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의 지능도, 가능성도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깐 숨을 고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시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씩의 반복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지금은 안 돼도 괜찮다”는 다정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머리는 다시 또렷해지고,
생각의 흐름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 함께 천천히 걸어가요.
여러분의 동료지원 크리에이터
조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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