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거울, 하나의 집

내 안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 날들

2025.10.25 | 조회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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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ing Heart

관상적 기도, 경청, 그리고 삶 (contemplative prayer, listening, and life)을 위한 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에르미타주 박물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에르미타주 박물관

요즘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을 천천히 읽고 있다. 하룻밤에 끝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한 장 한 장이 나를 멈추게 하고, 내 안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내 안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서 발견했던 그 세 사람—작은 아들,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 그들은 지금, 여기, 내 호흡과 반응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영적 여정을 안내해 왔고, 나 자신도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더욱 더 깊이 볼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세 개의 거울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첫 번째 거울: 작은 아들—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어제 아침, 한 모임의 묵상에 참여하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아내의 책상에서—나는 일찍 일어나 아내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내의 공간을 쓰다가, 그 다음 내 책상으로 옮긴다. 그런데 이날 아침, 명상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냥 나갈 수도 없었다—나도 그룹의 일원으로서 안내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내가 두세 번 언제 끝나냐고 확인했다. 수업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그 반응을 내뱉고 나서, 나는 멈춰 섰다.

마치 거울을 본 것 같았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의 필요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아니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것이 우선이었다.

그것은 단지 오늘 아침의 짜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평생을 관통해 온 하나의 축이었다.

한국기독청년학생회에서 간사로 일할 때를 떠올린다. 나는 청년 사역에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열정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청년들을 돕고 싶다"는 것만이었을까?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조직의 틀에 갇히고, 문화 속에서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경험—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주인이 되고 싶었다. 특별하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한국의 한 교회, 영암교회에서 지도력이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했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꽃처럼 피어났다. 창조성이 샘솟았고, 사역은 열매를 맺었다. 나는 그 자유의 맛을 알았다.

그러나 미국의 어떤 기관들에서 일할 때는 달랐다. 제약이 많았고, 요구가 많았고, 틀이 많았고, 기대가 많았다. 내가 그 안에 갇혔을 때, 나는 물러났다. 떠났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어떤 모임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나의 관계와 일은 점점 가난해졌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먼 나라로의 여행이기도 했다.

나우웬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부터 멀리 도망칠수록, 나를 '사랑받는 자'라고 부르는 그 음성을 듣기가 더 어려워진다."

내 작은 아들은 먼 나라를 찾아 헤맸다. 그 먼 나라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침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을 찾는 여정이었다.


두 번째 거울: 큰 아들—판단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지난주, 관상적 경청 모임을 안내하고 있었다. 다양한 배경의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였다—진보와 보수, 젊은이와 나이 드신 이, 한국 교회 문화에서는 좀처럼 함께 앉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한 발표자가 다른 종교 전통에서 배운 것을 자연스럽게 나눴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움찔했다.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놀라지 않을까? 판단하지 않을까?" "나를 어떻게 볼까?"

조용한 불안이 밀려왔다.

나우웬은 자신의 친구가 던진 한마디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네가 작은 아들보다 큰 아들에 더 가까운 것 같아." 나우웬은 그 말을 듣고 저항했다. 그는 자신이 자유를 갈망하는 작은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알아차렸다. 자신 안에는 큰 아들도 살고 있다는 것을.

나도 그랬다. 나는 내가 작은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안에는 큰 아들도 있었다. 어쩌면 큰 아들이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비유 속 큰 아들을 떠올린다. 그는 밭에서 성실히 일했다. 그러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정죄였다. "저 아들은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불평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는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화였다. 그는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큰 아들은 올바르게 보이고 싶어 했다.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욕구 밑에는 깊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도 충분하지 않다." "아버지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나의 불안도 그랬다. 사람들이 나를 판단할까 두려워하면서, 나는 오히려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다. "저들은 너무 보수적이야." "저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저들은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을 거부할 거야." 그 판단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밭에 가두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믿음이 깔려 있었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


세 번째 거울: 아버지—양손으로 품어 주시는 분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다. 한 손은 강하고 남성적이며, 다른 한 손은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정의와 긍휼이 한 몸에 담겨 있다.

나우웬은 이 두 손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았다. "아버지의 손... 그것은 나의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곳에 닿았다. 그것은 오직 축복만 하는 손이다. 모든 것을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는 조용히 내 안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판단하지 않았다. 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보았다.

"아, 이것도 나구나."

그 순간, 아주 작은 자유가 생겼다.


저항이 나에게 있다는 것

나는 오랫동안 저항이 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나를 방해한다고.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나를 판단한다고. 기관들이 나를 제약한다고.

그러나 진짜 저항은 내 안에 있었다.

아내에게 짜증이 났을 때—그것은 아내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안의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작은 아들이 일어선 것이었다.

목회자들의 시선이 두려웠을 때—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안의 큰 아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

제4의 길(Fourth Way)에서는 이것을 중심 특질(Chief Feature)이라 부른다. 한 사람의 모든 반응과 행동이 돌아가는 중심 축.

니콜은 말한다: "당신이 자신을 바꾸려는 목표를 세울 때, 중심 특질이 저항의 힘으로 일어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저항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그것이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보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1분 귀향: 실제로 어떻게 적용했나

그날 아침, 모임이 끝나고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나는 아내의 나눔을 들었다. 그날 아침 내가 보인 반응에 대한 아내의 불편함. 듣는 동안, 나는 다섯 단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 보기 (10초) "아, 나의 집착이 보인다. 나는 그 명상을 방해받지 않고 계속하고 싶었다. 끊기고 싶지 않았다."
  2. 느끼기 (10초) 가슴이 답답했다. 불편한 감각이 있었다. 걸으면서 그냥 그 느낌과 함께 머물렀다.
  3. 이름 붙이기 (10초) "이것은 내 작은 아들이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마음. 아내의 필요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마음."
  4. 분리하기 (10초) "나는 이 집착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불편함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아니었다."
  5. 집으로 (20초) 아버지의 두 손을 떠올렸다. 하나는 강하게 내 어깨를 붙들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졌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너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

산책을 마칠 즈음, 무언가가 녹기 시작했다.


또 다른 순간: 그룹 모임

그 다음 날, 그룹영성지도 모임에서 나는 내 불안을 나누었다. 목회자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것을 나누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동료들이 그것을 그저 들어주었다. 판단하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주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보시는지를 느꼈다. 내 불안도, 내 두려움도, 내 갈망도—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나는 성령님께서 어떻게 이 그룹을 형성하시고, 내가 인도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다—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셨다. 그 깨달음 속에서 더 깊은 자유가 왔다.

웃음이 나왔다. 가슴속에서 흥분이 일어났다. 자유가 왔다.

니콜은 말한다: "자기관찰을 하루에 두세 번이라도 실천하면, 그것은 즉시 치유하지는 않지만, 시간의 확장을 통해 당신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느린 치유(The Slow Cure)다.


움직임 속에서 나를 보기

물론 행동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회의에서 말하면서 내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일을 하면서 "완벽해야 한다"는 긴장을 알아차리는 것.

그러나 때로는 그 후에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에게는 두 개의 뚜렷한 알아차림의 순간이 있었다.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그날 아침의 긴장을 성찰하는 순간—그것이 하나였다. 그룹영성지도 모임에서, 내 통제를 넘어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는 순간—그것이 또 다른 하나였다. 이렇게 알아차림(awareness)은 성찰을 통해, 서로 다른 순간에, 서로 다른 경험을 통해 일어난다.

니콜은 묻는다: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볼 때, 당신 안에 무엇이 형성되기 시작하는가?"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이 형성된다.

하나의 나는 여전히 행동한다. 다른 하나의 나는 그것을 본다. 하나의 나는 자동적이다. 다른 하나의 나는 깨어 있다. 하나의 나는 잠든 아들이다. 다른 하나의 나는 깨어난 아버지다.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확실하게—두 번째 나가 강해진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 기억이 바뀐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가 아니라 "그 순간 나는 무시당했다고 느꼈고, 작은 아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로 기록된다.

피해자의 기억이 아니라 관찰자의 기억. 그곳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기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진실이 있다.

나를 보는 그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오랫동안 나는 자기관찰을 "나의 노력"으로만 이해했다. 내가 나를 보는 것. 그러나 기도어린 길 모임에서 기도하면서, 나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나를 보는 그 시선은, 사실 하나님의 시선이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당신은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 혼란과 혼돈을 뚫고 내 가장 깊은 내면의 깊이로부터 빛나십니다. 당신은 내 약점과 상처받은 곳들을 아십니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손바닥에 붙드십니다."

내가 내 작은 아들을 볼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 저기 내 사랑하는 아들이 있구나. 사랑을 갈구하는구나. 그는 자기가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구나. 사랑스러운 아이."

내가 내 큰 아들을 볼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 저기 내 성실한 아들이 있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구나. 그는 자기가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구나. 수고하는 아이."

아가서는 노래한다: "너는 온전히 아름답다, 내 사랑아; 너에게는 흠이 없다."

내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모두 아름답다.

작은 아들의 갈망은 사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었다. 그저 방향이 잘못되었을 뿐. 큰 아들의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싶은 갈망이었다. 그저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

갈망 자체는 거룩했다.


Oneness: 하나님과 나의 하나됨

내가 나를 볼 때, 그것은 단지 나의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보시는 것이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 때에 맞추어 아름답게 만드셨고, 또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eternity in the human heart)"—이것이 바로 내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그 깊은 갈망이다.

기도어린 길 모임에서, 나는 하나님의 현존이 모든 곳에 계심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도, 아내 안에도, 보수적인 목회자들 안에도, 제약이 많은 기관들 속에도, 이 사회와 자연과 우주에까지. 그 의식이 확장되자, 모든 것들이 확장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였다. 이것이 Oneness다. 그때 비로소, 나는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과 자연을 훨씬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판단이 멈추고, 긍휼이 일어났다.


여전히 길 위에서

나우웬은 그의 책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가는 중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중임을 아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집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나도 여전히 가는 중이다.

내 안의 작은 아들은 오늘도 "내 마음대로"를 속삭인다. 내 안의 큰 아들은 오늘도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을 조금 더 본다. 하루에 두세 번. 단 1분이라도.

그 작은 순간들이 쌓이면 기억이 바뀌고, 기억이 바뀌면 길이 바뀐다.

그 길의 문턱에서, 두 손이 내 어깨에 얹힌다.

한 손은 강하게 붙들고, 한 손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자, 그것이 진짜 나다.

그리고 그 나는,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과 하나다.


당신을 위한 질문

나는 때때로 이런 질문들과 함께 앉는다.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저 질문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지도록 허락한다.

작은 아들에게: 지금 내가 "먼 나라"로 삼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에서 내가 진짜로 찾는 것은 무엇일까?

큰 아들에게: 내가 판단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아버지에게: 나는 내 안의 두 아들을 판단 없이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현존이 모든 것 안에 계심을 의식할 때, 무엇이 달라질까? 오늘, 언제 1분 귀향을 해볼 수 있을까?


당신도 이 질문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 보면 어떨까.

당신도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리고 가는 중임을 아는 것, 그것이 이미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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