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꿈이 먼저 알려주었다
40일 몰입의 첫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워 쉬는 야외였다. 그런데 나만 이불도 베개도 없었다. 준비되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준비물을 찾으러 일어났지만, 자전거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음 장면에서는 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가족을 태우고 갔지만, 정거장을 지나쳤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듣지 않았다. 차는 밀려갔다.
또 다른 장면. 축구를 하는데 용수철을 골대에 넣으려 애썼다. 놀이가 아니라 성취가 되어버렸다.
깨어나서 나는 웃었다. 목이 뻣뻣하고 머리가 무거웠지만, 이상하게 안도감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야의 모습이었다.
준비되지 않음. 방향을 모름. 통제가 안 됨. 잘하고 싶음.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나는 목이 뻣뻣해진 채로도 다시 숨을 찾는 법을 배운다.

1. 광야는 실패의 장소가 아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 계셨다.
모세도, 엘리야도 그랬다.
광야는 준비가 완성되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준비가 무너지는 장소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단순하다.
- 계획이 작동하지 않는다
-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
- '잘하고 싶음'이 힘을 잃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돌아옴이 시작된다.
내 첫날 꿈이 정확히 그것을 보여주었다. 브레이크가 듣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2. 40일 몰입을 망치는 단 하나
둘째 날, 하나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이 여정을 가장 빠르게 망칠 수 있을까?"
답은 명확했다.
'잘하고 싶음'이었다.
- 좋은 책을 써야 한다는 압박
- 의미 있는 결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
이것들이 중심에 오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고할 숫자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말이 떠올랐다.
"You are enslaved by the verb 'to have.'"
"당신은 '가지다'라는 동사에 노예가 되어 있다."
'잘하고 싶음'은 결국 **'무언가를 가지려는 것'**이다. 성취를 가지려는 것. 결과를 가지려는 것.
하지만 몰입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다.
3. 손을 흔들면 날 수 있다는 것
둘째 날 밤, 나는 또 꿈을 꾸었다.
이번 꿈은 달랐다.
어떤 부분에서 나는 잘 깨어 있었고(aware), 흔들리지 않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상태만은 선명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교의식이 찾아왔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와 신학교 전임교수—내가 떠나온 길,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성공'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유명해지는데, 나는? 열등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이 놀라웠다.
나는 손을 흔들어 날 수 있었다.
산 위로, 나무 위로, 마음대로 날아서 앉을 수 있었다. 무겁지 않았다. 자유로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매려고 했다. 나는 말했다.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거면, 그대로 가도 돼."
비교의식은 여전히 온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살지 않는다.
꿈에서 나는 실제로 날았다. 그리고 그 '날아오름'은 깨어 있을 때도 가능한 어떤 자유—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몸으로 가르쳤다.
제도의 인정, 사람들의 평가, 외적 성공의 잣대—이 모든 중력이 여전히 작용하지만,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4. Mr. Smith를 관찰하기
모리스 니콜(Maurice Nicoll)이 자주 드는 예시는 이렇다.
"'나는 화났다'라고 말하지 말라. '분노가 Mr. Smith에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하라."
우리가 보통 '나'라고 생각하는 것—기분, 의견, 반응, 습관—은 사실 **기계(machine)**이다. 평생 쌓인 습관과 모방으로 만들어진 구조.
매일 아침, "동전을 넣으면(penny in the slot)" 같은 음악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둘째 날 아침, 나는 이것을 정확히 경험했다.
8시 17분에 눈을 떴다. 평소보다 늦었다. 몸이 아팠다.
그 순간, 동전이 떨어졌다.
- "늦게 일어났네" (비교)
- "40일 몰입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불안)
이것이 Mr. Smith다.
그런데 꿈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이것을 보는 '나'는 이것이 아니다.
- (x) "나는 피곤하다" — 동일시
- (o) "Mr. Smith에게 피곤함이 나타났다" — 관찰
이 작은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관찰은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니콜은 이렇게 말한다. "기계를 고치려 하지 말라. 단지 보라. 보는 순간, 당신은 이미 기계가 아니다."
5. 관상의 비밀: 현실과 하나 되기
언더힐은 신비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Mysticism is the art of union with Reality."
"신비주의는 현실과 하나 되는 기술이다."
여기서 '현실(Reality)'은 신비한 다른 세계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실제로 나를 만나고 계신 자리다.
그래서 관상(contemplation)은 세상 회피도, 수도원 도피도, 비현실적 황홀도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지금 여기'로 들어오는 길이다.
오늘 나는 글을 쓰다가 '잘 보이고 싶은 나'가 올라올 때마다, 손을 가슴에 얹고 숨을 한 번 쉬었다. 그것이 관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숨을 쉬고 있는가, 아니면 보이고 싶은 나를 연출하고 있는가?
몰입의 본질은 이것이다.
이미지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
6. 아무도 아닌 자로 서는 용기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자(nothing)로 서야 한다."
사막 교부들은 이것을 자기 이미지의 죽음이라 불렀다.
이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자기 이미지로부터의 해방이다.
- (x) "나는 목사다"
- (x) "나는 작가다"
- (x) "나는 영적 지도자다"
내면의 자기 정의 없이, 그냥 역할을 수행하는 것.
꿈에서 내가 말했다.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거면, 넥타이 안 매도 돼."
넥타이는 무엇인가?
형식이다. 역할이다. "제대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다.
사막 교부들은 넥타이 없이 살았다. 브라더 로렌스는 부엌에서 접시를 닦으며 하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어부들과 세리들과 함께 그냥 밥을 먹었다.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책을 쓰는 것도, 수련을 안내하는 것도—그냥 밥 먹으러 가듯이.
자연스럽게. 형식 없이. 증명할 것 없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때 모든 것이 흘러나온다.
7. 40일의 새로운 정의
나는 이제 40일을 다르게 정의한다.
- (x) 40일 = 책 완성의 기간
- (x) 40일 = 생산성의 시험대
- (o) 40일 = 돌아옴의 연습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머리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것. 미래의 결과에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잘하고 싶은 나'에서 '숨 쉬고 있는 나'로 돌아오는 것.
매일의 질문은 이것이다.
- (x) "오늘 얼마나 썼나?"
- (o) "오늘 몇 번 돌아왔나?"
40일이 끝났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완성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살았느냐다.
8.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
언더힐은 영적 성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A new suppleness has taken the place of that rigidity which you have been accustomed to mistake for strength of character."
"당신이 성품의 강함이라고 착각했던 경직됨의 자리에, 새로운 유연함이 들어선다."
하나로 모아질수록, 덜 방어적이고, 덜 경직되고, 덜 자기중심적이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지키느라 분열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소유하려는 욕심, 결과를 붙잡으려는 조급함—이것들이 자연스럽게 식어간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자유의 징표다.
9. 관계 속에서의 현존
이 원리는 관계에도 적용된다.
과거의 상처, 현재의 갈등이 올라올 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 생각과 감정에 동의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보고, 손을 흔들 것인가?
사랑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 것, 분석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다.
날아다닌다는 것은 상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땅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땅의 법칙에만 묶여 있지 않다.
상처는 기억된다. 사실은 남는다. 하지만 독침은 빠진다.
10. 하루의 리듬
아침 (20분)
손을 가슴에 올린다. 세 번 숨을 쉰다.
"몸이 편안하다... 마음이 고요하다... 영혼이 주님 안에 쉰다."
오늘의 중심 문장:
"나는 결과를 위해 오늘을 살지 않는다. 이 상태 안에서 오늘을 산다."
낮 (흐름 속에서)
기억날 때마다, 1초만: 숨 + 몸 + "나는 여기 있다"
'잘하고 싶음'이 올라오면: 이름을 붙이고, 몸으로 돌아온다.
저녁 (15분)
완성도를 평가하지 않는다.
"오늘 몇 번 돌아왔는가?"
"하나님, 오늘의 깨어 있음과 잠듦을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에필로그: 은혜가 나머지를 한다
나는 더 이상 잘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나는 이미 살아지고 있다.
기도가 일이고, 일이 기도다.
40일 둘째 날, 하나님은 꿈으로 가르쳐주셨다.
"너는 이미 날 수 있다."
준비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컨디션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냥 손을 흔들면 된다.
비교의식이 와도 괜찮다. 열등감이 올라와도 괜찮다. 몸이 아파도 괜찮다.
이것들은 Mr. Smith의 프로그램이다. 나는 그것을 보는 자다.
그리고 손을 흔든다.
산 위로, 나무 위로, 자유롭게.
넥타이 없이, 형식 없이, 증명할 것 없이.
은혜로 주어진 자유를, 나는 자주 잊는다. 40일은 그것을 다시 기억하는 연습이다.
손을 흔들어라. 그러면 날 것이다.
은혜가 나머지를 한다.
함께 머무는 질문들
이 질문들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질문과 함께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연습이다.
- 오늘 나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잘하고 싶음'은 무엇인가? 그것이 중심에 있을 때, 나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 만약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 지금 이 순간, 나는 숨을 쉬고 있는가—아니면 보이고 싶은 나를 연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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