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무엇을 쓸지 오래 고민하는 이유는 할 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을 쓰고 다시 고민한다.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 하는 말을 언젠가 후회하진 않을까?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날 것 같다는 미약한 확신은 실제의 미래로 나에게 도착할 텐데
쓸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방법과 계속 언급함으로써 나의 기억을 수명 다 한 인형으로 여기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에게 알맞은 애도 방식인 줄을 모르겠다.
아니다 그냥 얘기하지 말자.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고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인데
나는 누군가 내가 쓴 글 때문에 화가 난다면 슬프겠지만
슬픈 일은 동시에 재미있기도 하다
책상 위에 동전을 두자. 그 위에 다시 종이를 엎고 힘을 빼 연필로 긁으면 애쓰지 않아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원이 그려진다. 오늘의 목표는 애쓰지 말기.
내가 삼 일을 내리 잘 때 아빠가 나를 보러 병원에 왔다. 동생은 엄마와 아빠와 원내식당에서 간단한 밥을 먹으면서 언니가 여기 있으면 좋아할 텐데, 우리는 이제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이 아니면 모일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가족여행을 갔던 곳은 귤 농장이었고 거기에는 한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새카만 강아지가 살고 있었는데, 이미 살면서 그 작은 몸으로 귤을 두 박스는 먹어버린 얼굴이라 땅에 떨어진 귤즙에도 심드렁해 보였다. 우리 가족은 귤을 각자 한 통씩은 먹고 오자고 가성비 다짐을 하며 농장에 들어갔는데 과일 하나에도 배가 불러서 손에 몇 개씩만을 쥐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그들이 헤어졌으면 했고 한때는 한 번만 다시 모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그 아이의 등짝을 차주고 싶었고 한때는 뒤돌아 자는 모습이 가여워 걔 등을 평생 나 혼자 볼 수 있는 행운이 오길 진정으로 바랐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하나의 나라 같은 거라서 하나의 상태로 늘 내 안에 숨어있다가,
누군가가 새로 그리워질 때까지 이전의 그리운 이가
왕의 자리에 계속 앉아 후계자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생겨먹었다.
걔가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는 그가 흰둥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믿는다
어린 시절 대문으로 들어온 흰 강아지에게 계단 걷는 법을 손수 가르쳤더니
계단을 내려가 도망쳤다는 이야기
나와 아이가 같이 살던 집 앞에는 커다란 저수지를 품은 공원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포켓몬고를 하면서 손을 잡고 걸었다
그 공원은 가족이 다 같이 걷던 길과 닮아서 나는 조금 힘들어했다
네가 다시 아버님이 그리워지면
우리 여기 와서 또 의자에 앉아있을까?
아이가 물었고 나는 그러자, 하고 말을 했지만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걔를 같이 그리워할 거라는 거
또 내가 걔를 그리움의 자리에 놓아둔다고 해서 아빠가 덜 그리워지진 않을 거라는 것도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다를 거라는 것도
나는 뭐든 말할 사람이 그 아이밖에 없었는데 아이에 대해 말할 사람도 걔 밖에 없어서
너도 울어?
매일같이 내가 생각나?
지금 네가 사는 집 앞의 해변에 나가 내 이름 세 글자를 적어보긴 하냐고도 묻고 싶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 생각을 하긴 해?
알고 있어
근데 그냥 묻는 거야
내가 화나는 건
말을 걸 때 나를 만지는 타인의 행동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는 내 심성
헤드폰 충전이 안 되어 있었을 때
궁금하지 않으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랑
수치도 분노도 없는 사람들도
너 때문에 엄마 앞에서 우는 거랑
기억이라는 단어랑 또
내 동생이 너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라고 말을 못 전하는 거
너는 내가 부르면 온다고 했으면서 네 기분에 따라 정말 올 때도 있고 나를 무시했던 때도 있어 그래서 지금 네가 한 약속을 나는 조금 믿을 수 없고 혹은 믿고 싶고 혹은 믿고 싶지 않고
너는 약속을 함부로 해
사소한 것도 거짓말을 해
내가 사준 옷 입고 목걸이 하고 애플워치 차고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를 해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너는 다른 사람이랑 잤어
근데 그렇게 만든 게 나야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매일 우는데 너도 나한테 미안해했으면 좋겠어
나에 대해 멋대로 말하는 네 친구들
나를 싫어하는 네 가족들
근데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절대로 내가
그들을 싫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일 화난다
화나는 일은 동시에 슬프기도 하다
이제 내게 의자라는 것은 딱히 쓸모가 없고 그래서 사물의 이데아로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나 어디에도 앉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주연의 2022년 결산>
1월
나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인정한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인정해버리면 네가 슬프잖아? 나를 미워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도 나는 챙겨준다.
내가 술 먹을 때 얼굴 빨개지는 건 취해서가 아니라 화나서다. /일기
2월
회복이라는 것은 점이 아니라 하나의 기간이나 구간 /<자해를 하는 마음>
3월
살아있는 공룡을 만져본 적 없다
4월
자살하는 사람들은 신의 낚시?
5월
사실
생각만이 내 것이다. 나의 그리움 나의 분노 나의 서정적인…
그런가 하면 언제나 몸은 타인 같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생각하자.
생각되고 그리운 것만이 진짜고
내가 있는 곳은 허상, 내가 가진 것은 가지고 싶지 않은 것
정민이 써준 시를 보고 울었다
시의 방향성은 그렇게 흐른다
순방향?
잘 지내니? 다들
마음이 네가 보고 싶대
축하할 일이 있다면 그건 생일만큼은 아닌 것 같다 생일은 배꼽 같은 거고
그냥 생겨서 있는 거고
내가 먼저냐 생일이 먼저냐는 질문 같은 거
나는 정민 덕에 많이 웃고 살찌고 기쁘고 재밌나 보다 /일기
6월
아무도 정말? 정말로? 세 번 이상 묻질 않아서 나는
응. 응. 세 번부터가 진짜 대화 아니야?
사랑한다는 말도 세 번부터가 진짜 아니야?
나는 늘… 당황해서 사랑한다, 분위기에 따라 사랑한다, 해놓고
세 번째는 아낀다. 그게 진짜인 걸 아니까. 진짜들은 무서우니까
내가 가진 진짜는 이 기분뿐이다
유월이고 유월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실은 팔월의 일이었다
커다랗고 굵은 원기둥이 “진실”이라면
그 표면을 살짝 읊어 가져오는 게 의견 대립이고
사실 모두가 정답을 알고 있는데
아는 정답이 끝인 줄 아니까 다들 싸우는 것 같다
스무 살과 연관된 사람들을 떠올리면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사람이 가슴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외롭진 않고 딱 그 말을 발음하기 위한 사람이 곁에 있는 느낌 /일기
7월
“주연아 점심은 먹었어?
너를 찾다가 일어나 보니 이 시간이네”
“지금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너무 나는데 웃긴 건
콧물이 눈물보다 3배 정도
더 많이 나와 아마 이건 코가 커서
그런 거겠지?
코가 큰 내가 차라리 호스하고 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역설적이게
코 작은 년이 큰 호스를
코에 달고 있으니까
사람 마음이 막막 그렇잖아
언니도 가끔 아주 가끔은 내 빈자리를 느끼지?”
8월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게 되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걸으면서 하느님과 하느님 비슷한 것들을 생각했다. /<자기 앞의 생>
친해진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간호사 때리고 강제입원했는데 나한테 술 마시는 사람은 만나지 말라네
농약을 마시다 아들이 병을 발로 차서 살았단다
살아서 다행이에요 그런 말은 나오지 않고 아들이 발로 차서 아팠겠어요 그런 생각만 들었다
나는 정민을 동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서 많이 울었는데
이제는 그만 울어야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네가 아냐
만약 그렇다면 그럴 수 있으면 너는 세상에서 제일 당당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난 오늘도 네가 안쓰러워서 서너 번 울었고 뒷모습은 이미 가족이 되어본 자의 것 같으니 아직 모른다고 결론지었거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네가 전혀 알질 못한다고
만약에 네가 어땠다면 이만큼은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놀이를 손잡고 하는데
너는 네가 더 하얗게 되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정말 그렇게 되면 너는 더욱이 영혼 같아질 거라고 했다
너무 사랑한다고 안쓰러워 죽겠다고
너 때문에 세상이 싫고 네가 좋아하면 나도 좋고
네가 자꾸 나를 연장시키고 그럼 나는 늙어서 죽어야지 /일기
9월
나는 일자리가 있다면 네 옆에서 뭐든 다 받아먹고 상한 걸 먹어도 좋고 곁에서 병들고 싶었다고 그럼 내 몸이 여기에 아직 있음을 말해주는 네가 있으니까 아파도 아프지 않고 좋았는데
그런 밤이 내게도 있었는데
마음은 전부지만 몸마저 무겁다 전부라는 건 없는 것 같다
나는 악몽과 길몽 그 사이에서 사건을 받아들이고
조금 슬퍼하다 조금 더더 슬퍼하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슬퍼하다가 슬퍼하다가
슬퍼하다가 웃다가 웃다가 결국은 웃는 날이 많아지겠지
전부라는 이름에 기포가 생긴다 /일기
그런 것들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진정성의 차원에서 보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적 역시 없다. /<첫사랑과 0>
10월
차라리 우리가 전화만 할 수 있는 사이였으면 어땠을까
그렇게나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너와 나의 시간이 이 년정도 흘러버려서
우리는 사건을 해결하지도 죽은 이를 되살려내지도 않고 다만 전화만, 네가 쓰는 말과 내가 쓰는 말이 달라서
응, 응, 하는 소리만 도처에 남았다면
그것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낸다면
따지자면 그건 내 문제인데
너 있어서 그걸 네 탓으로 돌렸어
근데 너는 나라서 그냥 좋다고 해줬어
과연 무엇이 건강에 좋을까 그런 게 세상에 있긴 해?
있으면
왜 그건 네가 아니야?
그럴 수가 있어?
11월
“없어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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