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8월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네요. 아이들은 개학을 했고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글을 씁니다. 처음에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공간에 대한 글로 바뀌었어요.
도서관에 가면 왜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욕심내게 되는 걸까요. 구독자님도 그러실까요? 항상 집까지 들고 가기 버거울 정도로 빌려서 반납 날짜를 세어가며 허덕이네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 당장 저 책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이는 게 미스터리입니다. 오늘이 반납하는 날인데 5권 중에 두 권 읽어서 또 연체.....😂
26. 마흔 일기 / 도서관
어느 정도의 초록과 도서관
두 아이의 방학이 끝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각자의 가방을 메고 셋이 나란히 손잡고 문 앞을 나서는 건 오랜만이었다. 첫째는 알림장과 리코더, 둘째는 새로 빤 하얀 실내화와 물통, 나는 노트북과 다이어리가 든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서로가 배울 것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홀가분함이란!
즐거운 하루 보내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과 마음 모두 다치지 않길. 가능한 한 열심히 필요한 것들을 채워 집으로 돌아와 서로에게 기대어 느긋하게 쉴 수 있길. 오늘도 평소와 같길 기원하며 시작하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방학 때는 도서관에 작업할 자리가 없더니 개학과 동시에 어른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동안 엄두가 안 났던 창가 자리 노트북 석은 다시 빈자리가 생겼고,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에서도 항상 땀을 흘리던 초등학교 아이들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조용하고 조금은 쓸쓸해진 도서관의 모습.
요즘은 도서관 세 곳을 사이좋게 돌아가며 다니고 있다.
매주 목요일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간다. 봉사자가 없어 일주일에 3일만 여는데 그중 하루를 내가 맡게 되었다. 한동안 관장님의 부탁으로 하던 것을 이제 바빠져서 못 하겠다 이야기하려던 차에 기존에 있던 봉사자 둘이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지 내 도서관은 대체로 조용하다. 어느 날은 한 명의 방문자도 없이 혼자 앉아 있다가 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바로 맞은편은 헬스장의 유리문이 수시로 열리는 것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시간을 보낸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동도 좋아하던데. 이왕이면 여기도 오지.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과연 저 사람이 도서관에 들어올지 헬스장에 갈지 기대하다 실망하길 반복한다. 워낙 사람이 없는 곳이다 보니 가끔 아이들이 와서 책은 안 읽고 숙제만 하고 가는 것도 황송하다. 여기가 내 책방도 아닌데 이럴 일인가 싶지만. 여기서 뭘 하든 도서관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덜 외로워진다.
이번 방학 기간에는 아이들이 올 수 있게 작은 이벤트를 했는데, 도서관에서 30분 동안 책을 읽으면 동네 마트에서 쓸 수 있는 500원 쿠폰을 줬다. 덕분에 방학 때는 아이들 얼굴을 자주 봤다. 엄마가 책을 만드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책은 지루해!’라고 거리낌 없이 외치는 우리 집 7살 딸도 이것 때문에 두 번이나 왔을 정도. 아직 한글을 다 떼지 못해서 그림만 읽다 가긴 했지만, 집이 아닌 곳에서 30분을 앉아 책으로 놀 수 있는 건 순전히 도서관의 힘이었다. 첫째도 학원과 학원 사이 꾸준하게 출석 도장을 찍었다. 둘이 모은 쿠폰으로 뽀로로 짜장 떡볶이와 바나나 우유, 잘하면 킨더조이까지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모였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인 이벤트였다.
방학이 끝나고 도서관은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그 적막함을 깨고 싶어서 가사가 없는 음악을 몇 번 틀어 놓았다. 컴퓨터 스피커는 애초에 연결이 안 되어있어서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누군가 오면 끄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음. 없어도 너무 없음.
이제 혼자서 이곳을 즐기는 방법도 터득했다. 마치 책방 사장님이 된 것처럼 작은 도서관을 한 바퀴 돌며 새로운 책들을 관찰하다 보면 시간이 꽤 잘 간다. 지원이 끊긴 지 오래라 신간은 없지만 시대별로 유행했던 책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책의 역사를 엿보는 기분이다. 여기서 책 구경을 하다 보면 읽고 싶은 책 목록이 점점 늘어난다. 아무도 빌려 가지 않으니 느긋하게 한 권씩 읽어나갈 예정이다.
자주 가는 또 다른 도서관은 바로 옆 단지 아파트 도서관이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았던 아파트라 지금 봉사를 하는 도서관보다 더 익숙하다. 예전에는 도서관 한쪽에 신발을 벗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우리 지정석이었다. 기저귀를 찬 둘째는 내 근처에서 기어다니게 두고 큰 아이 책을 읽어주러 자주 갔었다. 아무래도 동네 도서관이다 보니 큰 도서관보다는 소음에 관대해서 마음이 편했다.
이 도서관은 관리동 1층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땀 흘리는 이마를 쓸어내리며 시원한 물 마시러 오는 옹달샘이었다가, 학원 차 기다리며 잠시 쉬었다 가는 휴게소였다가,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는 만남의 장이었다가, 아이와 어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문턱이 얕은 도서관이다. 심지어 최근에 관장님께서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게 하려고 철문이었던 현관을 유리문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1층과 2층의 차이가 이렇게 큰 걸까. 관리동이 아파트 구석에 있어서 그런 걸까. 너무나 조용한 우리 단지 내 도서관이 가여워진다. 우리도 유리문인데 말이야.
요즘 나는 이곳에서 매일 한 시간씩 머문다. 둘째 아이 공부방에 보내놓고 바로 여기 오면 집까지 다녀오기 애매한 시간을 50분 가득 채워 나를 위해 쓸 수 있다. 여기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발 믿고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어 좋다. 우리 동네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듣고 보며 이웃과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시는 소리, 봉사자분들이 커피와 과자를 꺼내 권하는 소리, 어린아이가 아기상어 노래를 부르며 그림책에서 상어를 찾는 소리. 책을 읽으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적당한 소음에 편안해진다.
내가 앉아 있는 책상 맞은편에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둘이 문제집을 풀고 있다. 작은 목소리로 새로 산 예쁜 펜을 자랑하기도 하고, 오늘 해야 할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얘기하며 고단한 초딩의 삶을 토로하기도 한다. 맞은편 아이들이 귀여워서 책에 집중하려는 데도 자꾸 시선을 빼앗긴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고 아줌마 아들도 여기 학교 다닌다고 너희 참 예쁘다 말 걸으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나이가 들수록 오지랖이 넓어져서 큰일이다.
바라건대 아이들이 도서관을 조금 더 자유롭게 즐겼으면 좋겠다. 숙제를 하거나 수다를 떨거나, 색종이를 접거나, 밥을 먹는 것도 도서관이었으면 좋겠다. 도서관에 맛집도 있고, 놀이터도 있고, 농구 코트도 있고, 이왕이면 수영장도 있다면 더 좋겠다. 그래서 온 가족이 특별한 계획 없는 주말, 학원에 가지 않는 평일 책이 있는 공간으로 모여들었으면.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있어 좋다고 생각했으면. 조금 느슨한 도서관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필히 책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살면서 도서관이 익숙해진 아이들은 꼭 책을 읽지 않아도 책과 가까운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혼자가 된 노인도 이곳을 휴식처로 생각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책이 있는 모든 공간을 사랑하지만 유독 도서관을 애정하는 이유는 공공성에 있다. 대가 없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관대한 곳이 마침 책을 품고 있어서 다행이다. 도서관과 가까이 사는 것, 어떤 규모로 얼마나 있냐는 것이 곧 삶의 질을 바꾸는 거라 믿는다.
공공기관이 소음에 더 너그러운 사회이길 바라지만 규모가 커지거나, 그럴듯한 곳일수록 여지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떠안는다. 조용히 하라는 것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갓난아기를 키우는 엄마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어린이는, 음성 틱 장애를 갖고 있는 어른은, 정숙해야 하는 곳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 가장 큰 도서관도 무척 조용하다. 호수 공원을 끼고 있는 풍광 좋은 이 도서관은 어린이 열람실 안, 영유아를 위한 방에서도 소음에 민감하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면 직원분들이 다가와 주의를 준다. 책장과 벽을 비롯한 도서관 곳곳에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나는 이미 조용할 줄 아는 어린이로 자란 아이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숨 막히는 분위기가 과도하게 느껴져 가끔 불편하다. 이 지나친 고요가 언제부터 당연하게 됐을까.
그럼에도 대형 도서관의 쾌적함과 편리함은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미워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동네로 이사 오게 된 것도 공원 바로 옆 도서관 때문이었다. 갑자기 카페도, 책방도, 공원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었던 날. 그곳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으려 부단히 애썼지만 내 삶에서 공원과 도서관 그 두 개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2년 만에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무작정 네이버 지도를 켜서 그 당시 내가 있는 곳에서 조금씩 반경을 넓히며 도서관을 찾았다. 이른바 맨땅에서 도서관 찾기. 내 목표는 어느 정도의 초록과 도서관뿐이었다. 누군가에는 학교가, 누군가에게는 마트나 백화점이 필요하듯 나에게는 도서관이 나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니까.
지금 내 삶은 그토록 원하던 도서관을 중심으로 흐른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서 내 글쓰기 수업 포스터가 붙어 있던 날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엘리베이터와 복도, 게시판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한장 한장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있다.
매일 세 곳의 도서관을 돌아가며 읽고 쓰고 쉰다. 도서관으로 출근해서 일하고, 도서관 카페에서 책을 읽다 휴게실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 학원을 가지 않는 여유 있는 평일은 첫째와 함께 도서관 데이트를 즐긴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다가도 도서관이 보이면 잠시 들어와 로비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다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화장실도 들른다. 두 아이 중 한 녀석은 도서관에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있을 수 있고, 한 녀석은 30분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지만, 두 아이의 삶에 공평하게 도서관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다행이다.
언젠가는 도서관 계단 오르기와 로비 소파에서 뒹굴기가 더 즐거운 둘째도 편의점 가듯 도서관에 와서, 아이스크림 고르듯 책을 즐기면 좋겠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한글을 떼지 않아서 라고 아직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비도 여름도 좋아하는 저는 벌써 선선해지는 바람이 조금 아쉽습니다. 사랑하는 바다에 가보지 못하고 끝나는 것도 그렇고요. 구독자님은 후회없는 여름 보내셨을까요?
다가오는 가을을 잘 준비하고 싶습니다. 또 편지할게요.
23. 8. 25.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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