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16. 마흔 일기 / 돈

적당한 가난

2023.03.28 | 조회 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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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오늘은 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메일리에서 알람이 울려 들어가 보면 두 번 중에 한 번은 구독자 분들의 계좌에 잔액이 없어 결제가 실패되었다는 알림이예요. 그럴 때 드는 생각중 하나는 이 분들이 다시 유로 구독자가 되어 주실까 하는 걱정과 또 하나는 나만 계좌가 0원이 될 때가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것 이랍니다.

무료 구독자로 전환된 분들은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오늘도 편지를 보냅니다.

 


 

15. 마흔 일기 / 돈

적당한 가난

 

 

사이렌 오더를 하려고 스타벅스 앱을 켰는데 내가 최근에 주문했던 메뉴가 맨 앞에 보였다. ‘얼그레이 바닐라 티 라테’ 커피 말고 다른 게 먹고 싶었던 어느 날 신메뉴에 얼그레이가 있길래 골랐던 기억이 났다. 오늘도 얼그레이 바닐라 티 라테를 먹어볼까. 저번에 맛있었잖아. 가격을 보니 6,100원. 작은 사이즈를 시키면 가격이 내려가니까 조금 덜 먹지 뭐. 주문을 눌렀더니 애초에 톨 사이즈부터 시작이다. 

가계부를 쓰지 않을 때는 의식하지 않고 시켰던 커피였다. 커피 한 잔에 얼마나 한다고, 나는 카페를 좋아하니까. 나는 여기서 놀고먹는 게 아니라 일을 하잖아 등등 핑계는 많았다. 충전해 놓은 스타벅스 카드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서 그다지 돈을 쓰고 있다는 개념도 없었다. 매일 가계부를 쓰고 나서야 내가 먹고 마시고 하는 것들이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 자꾸 되돌아보게 됐다. 생각보다 나 부르주아처럼 살았구나. 너 저번에 6,100원짜리 커피를 시켰던 거니? 겁도 없네. 

점심시간이 되니 스타벅스의 출입문이 쉴 새 없이 열고 닫힌다.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하러 온 사람들과,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나가는 저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일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부?  

 

언제부턴가 내가 중산층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산층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준에 따라 애초에 중산층에 진입해 본 적도 없을 수 있지만. 어린 시절 따라 불렀던 노랫말처럼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던’ 정도는 아니니 나름 이 정도면 중산층이겠거니 여기고 살았다.

해외여행을 자주 가지는 못해도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가까운 꿈 정도로 생각하니까. 주말에는 바다에도 가고, 산에도 가고 꽃구경도 가고 단풍 구경도 가니까. 이렇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가난을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적정선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의 숫자가 매번 예상을 깨고 치솟는다. 몇 번 구입한 적 있는 쇼핑몰에서 봄에 입을 티 하나를 살까 들어가 봤다.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면서 구경하는데 내가 지갑을 열 수 있는 가격의 딱 세 배가 넘는 숫자들이 붙어있었다. 흔한 중저가의 동대문표 보세 쇼핑몰일 뿐인데, 백화점이나 아울렛도 아닌 여기서도 옷이 비싸게 느껴진다면 이제 뭐가 남았을까. 당근마켓?

 

티브이에서 새우와 아보카도가 올라간 피자가 맛있어 보여서 아이들에게 오늘은 피자 먹을까 호기롭게 얘기하고 배달 앱을 켰더니 세상에 피자 한 판에 3만 원이다. 하는 수 없이 평소에 자주 시키던 두 판에 2만 원 하는 동네 피자집에 포장 주문을 넣고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치킨을 먹으려는데 프라이드는 18,000원 양념은 두 가지 맛 반반에 22,000원이다. 양념을 먹겠다는 아들을 설득해볼까 고민하다 그냥 시켰다. 아니, 무슨, 내가, 아무리, 못 벌어도, 치킨도 고민할 정도라고 정말? 다들 물가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가끔 먹는 피자 치킨도 망설일 정도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양대창은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먹는 것 정도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모둠 구이 1인분에 27,000원은 큰돈이니까. 다들 소고기는 손을 벌벌 떨어가며 사는 거겠지. 그런데 이제는 삼겹살을 먹는 것이, 떡볶이와 튀김을 시키는 것이 소고기처럼 만만치 않아졌다. 

 

오늘 다이소에서 옷을 사면서 확실히 내 소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했다. (다이소에서 실내복도 판다는 걸 아시는지!) 예전에 다이소가 싼 맛에 이것저것 사면서 돈 쓰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에 불과했다면 마침내 나는 다이소에서 파는 가격이 적정하게 느껴지는 수준이 된 것이다. 

실내복 겸 잠옷으로 입을 아들 바지를 사야 했는데 160 사이즈는 대부분 2, 3만 원 하는 파자마였다. 운 좋으면 5천 원에도 샀던 공룡이나 자동차가 그려진 내복은 졸업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조금 비싸긴 했지만 제법 세련된 회색 체크무늬 파자마를 보며 잠시 도련님 같아 보이겠네 생각도 했지만, 여러 번 장바구니에 담아놓고도 끝내 결제하지 못했다. 잠옷인데... 집에서 입는 옷인데... 외출복도 8천 원짜리를 사는데... 라면서 자꾸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다 다이소에서 3천 원짜리 바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거다! 내가 살 수 있는 잠옷은 다이소에 있었다.

 

예전에는 저렴한 프랜차이즈에 가는 것이 여러 선택지 중 하나였다면 이제는 당연해졌다. 내 지갑은 품질보다 가성비를 따질 때만 겨우 열렸다. 그보다 비싼 것은 마음에는 들지만 살 엄두는 안 나는, 선택지 밖 예외로 두어야 했다. 이 정도를 감히 가난이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가난의 내리막길로 서서히 접어드는 중이 아닐까 사실 두렵다.   

 

아이들 재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말부부로 떨어져 지내는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어. 오늘 너무 피곤한데 빨래 돌리고 자야 해"

"피곤하면 그냥 자고 내일 해."

"안돼. 윗옷 하나라서 내일 입을 옷이 없어."

자기가 미니멀 리스트도 아니고 왜 그러고 사냐 내가 티를 좀 살까 했더니 어디 만 원에 세 장짜리 옷은 없냐고 묻는다. 그런 건 런닝이나 있겠지. 아니 런닝도 만 원에 세 장은 없을 것 같은데.  

우리 가족이 여행에 돈을 쓰는 만큼 어딘가에서는 줄여야 할 텐데 그건 아마도 옷일 것이다. 아이 둘은 누군가 물려준다면 취향과 상관없이 (애들은 뭘 입혀도 예쁘다) 냉큼 받아서 고맙게 입혔다. 쑥쑥 자라는 아이들이니 두 사이즈 업은 기본, 어릴 때는 쫄바지 위에 긴팔 치마처럼 입히던 윗옷이 끝내 제 자리를 찾아 티셔츠가 되도록 4년을 입힌 적도 있다. (어릴 땐 다 귀여움)

패션에 쓸 관심도 돈도 없는 우리 부부는 이제 1+1 옷을 사기 시작했다. 사이즈만 달리해서 주문해 입는 커플룩이 벌써 여러 벌이다. 아무리 원수 같은 사이여도 가계 경제에 도움만 된다면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는 게 허락되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이가 부부였다. 

 

가계부를 꾸준히 써보니 주말부부인 남편의 생활비를 제외하고 우리 셋 생활비는 200만 원에서 조금 줄거나 조금 늘었다. 내가 발버둥 쳐가며 아끼면 조금 줄었고, 문구점에서 하나가 갖고 싶다는 야광 스티커도 사주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주면 조금 늘었다. 

아이 헌 옷을 식빵과 교환하고 오래된 자전거를 5천 원에 팔아 다달이 비상금 통장에 넣는 것이 나의 소박한 보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모으고 아껴서 가계부를 써도 한 달 고정비에 한 참 못 미치는 생활비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푼 돈 얼마 아낀다고 해서 우리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집 고정비 대부분은 대출 이자와 보험료였다. 대체 우리가 노후에 얼마나 편하게 살려고 지금 이 고생을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리한 재테크를 위해 받은 대출과 그 많은 보험도 가볍게 살고 싶은 내 바람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내 의지는 힘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우리 가정 경제에서 미비한 도움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돈의 자리에서 밀려나길 선택했다. 사는 데 돈은 너무나 중요하고 나는 그걸 얼마 벌지 못하고 있으니까.

시어머니가 사인하라는 보험들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덜컥덜컥 가입했다. 이게 뭔지, 꼭 필요한지 캐물으면 버릇없어 보일까 조심스러웠다. 어련히 좋으니까 해주시겠지 설마 우리에게 해 될 일을 하실까 믿었다. 그렇게 남편과 나와 아이들의 보험비가 매달 2백만 원이 가까이 나왔다. 더는 안 된다고 몇 개를 해지하고도 현재까지 140만 원이다. 아빠가 알려주신 땅도 겁 없이 샀다. 하나를 사면 또 더 좋은 게 나타났다. 이게 너네들 자식까지 먹여 살릴 거라고 이거면 너 원하는 대로 서울에 와서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얻은 대출 이자는 보험비보다 훨씬 크다. 내 자식들 먹여 살릴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오래 기다릴 필요 없는 땅이니 1년 안에 서울에 갈 수 있을 거라던 말에 흔들려서 한 투자였다. 그토록 바라던 내 인생 첫 작업실 ‘9월의 집’과 맞바꾼 땅을 산 거다. 일생일대의 희생이자 모험이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내가 스스로 우리 집 가정 경제의 한 축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우리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 보험은 필요하지 않아요. 저희 월급으로 지금 내는 것도 빠듯해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땅은 이자 감당이 안 돼요. 우리 형편으로는 못 사요.’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우리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친정과 시가에서 애써주신 것을 잘 안다. 보험을 하는 시어머니와 부동산을 하는 아빠는 각자의 방식으로 가장 평안한 삶을 그리며 권하셨겠지. 나에게 경제권과 선택권이 있었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내일을 계획할 수는 있을 거다.

아이들이 커서 지금보다 큰 자동차가 필요해지면 얼마의 대출을 받아서 몇 달 동안 갚으면 되겠다는 식의 간단하고 무리 없는 계획. 언젠가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수익을 위해 대체 언제까지 15년 된 아파트 23평 전셋집에서 앞 범퍼가 깨진 차를 수리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을 은행에 갖다 바쳐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지금의 생활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그래서 끝이 나긴 하는 건지, 정말 부자가 되는 건지도.

 

어젯밤에는 이자를 내기 위해 빌렸던 2천만 원을 갚아야 한다는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밤새 잠을 못 잤고 나는 오늘 엄마에게 전화하려다 말고 여전히 망설이는 중이다. 뭐라고 얘기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집과 친청이 얽혀있어 발 빼지도 못하는 땅을 이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으니 다 그만두자고 해야 하나. 더 이상 대출받을 곳도 없다고 하소연해야 하나. 아니면 이번에도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요 해야 하나.

누구는 그래도 재테크를 하는 우리가 부럽다고도 했다. 자기나 남편은 주식이나 땅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냥 월급 받아 사는 게 고작이라고. 나는 잘 모르겠다. 마흔이 되어도 여전히 모르겠는 것투성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불안하지 않게, 그저 분수에 맞게 매일을 살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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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인사 편지를 보내놓고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벚꽃이 터지고 있네요. 걷기 좋은 계절이에요.

돈은 돈이고 일단은 다시 오지 않을 이 계절을 즐기자고요! 

23. 3. 28.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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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가을 학기로 일 년에 두 번 모집하고 3개월 동안 진행하고 있어요.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과 처음 책을 써보는 사람들을 위한 상세하고 다정한 수업이랍니다. 봄 학기 수업은 4월에 시작하고 3월 말까지 모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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