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이번 달에는 왜 편지가 안 오나 혹시 기다리신 분 계실까요?그랬다면 무척 죄송하고 또 감사할 것 같아요.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긴장이 조금 풀렸다는 핑계에 아이들이 방학이라는 핑계를 더하고 연말 연초라 정신이 없었다는 핑계까지 더하면 완벽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제가 더 자주 노트북 앞에 앉지 못해서겠지요.
글을 쓸 때 70%까지는 막힘이 없는데 98%쯤 되면 머물러 있게 되더라고요. 그래 이 정도가 딱 나야. 더 잘하려는 것도 욕심이다 생각해야 되는 데 그걸 가르치면서도 제 상황에서 막상 실천하기 어려워요.
이렇게 긴 변명으로 시작하는 이번 편지는 작년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정산입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11. 마흔 일기 / 연말정산
시시콜콜한 즐거움

연말이 되면 가장 먼저 다음 한 해에 나와 가장 가까이 있을 다이어리를 한 권 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를 되돌아보며 틈틈이 다이어리를 펼치고 무언가 적으려고 시도했다. 우선은 작년 이맘때 썼던 다이어리를 꺼내서 첫 페이지에 썼던 새해 목표를 본다. 몇 개는 두 줄을 그어 지원하게 지울 수 있었다. 몇 개는 어디 이야기하기도 창피한 목표다. 이월할 것도 없이 삭제한다. 겨우 네 번의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이렇게 달라졌구나. 한때 한 해의 목표였던 것이 지금은 무가치해졌다.
새 다이어리를 펼쳐서 올해는 2022년 내가 이룬 것들에 대해 썼다. 2023년의 목표를 생각하기 전에 한 해 동안 애쓴 나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사소한 것부터 꽤 그럴싸해 보이는 것까지, 적어보니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룬 것 같았다. 그래, 글은 평범한 시간을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지.
👍2022년 내가 해낸 것들
✔ 문화다방
- <글쓰는 월요일> 수업 펑크 없이 봄, 가을 학기 성실히 종강
- <키친테이블 에세이> 수업 4회 무사히 종강
- <시니어 글쓰기 클래스> 재능 기부 첫 도전
- '아기가 잠들면 조용히 글을 썼다' 육아일기 22편 씀
- '딸에게 물려주는 엄마의 독서리스트' 6편 씀
- 뉴스레터 '아주 사적인 마흔' 시작. 한 달에 두 편씩 총 10편 보냄
- 6년째 이어가고 있는 기부. 생명의 숲에 80만 원
- 북토크 두 번 - 코이노니아, 서호책방
- 북페어 세 번 - 언리미티드에디션, 대한민국독서대전, 책보부상
- 독립출판 두 편 - [말보다 글이 편해서], [(별로 안 유명한) 작가는 북토크에서 무슨 말을 할까?]
- 우따따 매거진 인터뷰
✔ 희정
- 우주와 단둘이 하던 것을 독서모임으로 확장. 2주에 한 번씩 15회째
- 런데이로 달리기를 시작함
- 레터링 타투(네 번째)와 컬러 타투(다섯 번째)를 함
- 비로소 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됨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버텨냄)
- 힘들었던 인간관계를 정리함
- 태안, 부산, 제주, 대부도, 동해, 경주 여섯 번의 바다를 봄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일 년 동안 여섯 곳의 바다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작년 한 해가 꽤 멋지게 느껴졌다. 내친김에 연말정산도 해보았다. 항상 다가오는 새해를 서둘러 맞이하기 급급했던 1월이었으니까. 구정이 되기 전 속도를 조금 늦춰서 다시 지난해를 떠올린다.
📺 올해의 드라마 - 우리들의 블루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평소의 나라면 올해의 드라마를 연말정산 리스트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우연히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생겨도 끝까지 챙겨보지 않고 지나가 버려서 크게 의미를 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행한다는 것은 무슨 오기가 생겨서인지 더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다 끝까지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생겨도 봤더라도 다른 사람과 '그거 진짜 재미있지.' 감상을 나눈 적도 없다. 아마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가한 사람들의 오락거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런데 작년에는 끝까지 다 챙겨 본 드라마가 두 편이나 있었고,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리며 눈물 콧물을 뺐던 걸 생각하면 올해는 확실히 이 두 드라마에 푹 빠져있었던 게 확실하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인 노희경 작가님의 신작 소식에 <우리들의 블루스>는 첫 회를 시작하는 날을 기다리며 꼼꼼히 챙겨 봤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동생의 추천으로 뒤늦게 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글쓰기 수업에 장애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쓰신 분을 만나고,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책들을 찾아보게 되기까지 올 한 해 내내 '장애'에 대한 이슈를 계속 생각하게 했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며 웃고 웃는 저녁시간도 좋았다. 즐거움을 쫒는 게 무슨 죄라도 되나, 앞으로는 시시콜콜한 것들을 더 누려보리라 결심했다. 올해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를 조금 좋아해 보기로. 유튜브를 보며 낄낄거리는 나를 한심해하지 않고 좀 놓아주려고 한다.
👩올해의 인물 - 심채경 천문학자
알쓸인잡을 보면서 심채경 박사님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프로에서 처음 언니와 다른 중학교를 가게 된 이야기를 하신 게 기억에 남았다. 물려받은 옷이 아닌 새 교복을 입고 새로운 환경에 둘러싸이게 된 경험이 자신만의 세계가 열린 것 같아 무척 만족스러웠다는 거였다. 보통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두려워하기 마련인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심채경 박사님이 쓰신 에세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에는 엄마가 된 후 연구를 이어가며 겪은 이야기들도 담겨있었다. 같은 입장인 보통의 엄마들과, 남초사회에서 자리 잡은 여성 과학자의 일화가 차별 없이 펼쳐졌다. 특히 호기심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여성 과학자에 대해 물으니 애가 아프다고 학교 안 오실 때도 있다는 대답이 돌아올 때 느낀 구태의연한 시선에 대한 부분에서는 놀라움과 분노가 전해졌다.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그 사람이 양육자라는 것을 자주 드러내는 편일 때, 나는 좋아하는 것을 넘어 팬이 되어버린다. 아마 동질감 비슷한 거겠지만 단순히 ‘일하는 엄마’ 여서가 아니라 ‘일하는 나와 주 양육자로서의 나’를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두 역할이 버거워 부대낄지언정 둘 중 어느 하나도 걸림돌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반대로 많은 기혼자이자 아빠인 남성들의 에세이나 인터뷰에서 가정이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쏙 빠져있는 것을 보면 빈정이 상한다. 아이와 무관한 삶을 살았으니 일에 집중하기 참 쉬웠겠다.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성공도 어렵지 않았겠지, 아니꼽다. 심채경 박사님의 책에 쓰여있는 대로 일에도 프로페셔널하길 바라는 사회가 가정에서는 왜 프로페셔널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평소 왕래가 잦지 않던 동료가 어느 날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조심스레 불러 세운다면, 기혼자 혹은 부모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물으려는 참이다. 이 또한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신성한 논의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中
🍺올해의 술 – 타바론 애프터 블랙
티를 즐겨 마시는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맥주다. 티 브랜드 타바론과 편의점 CU가 콜라보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두 종류가 있는데 '크림슨 선셋'은 과일향의 밀맥주고 '애프터 블랙'은 블랙티가 들어간 라거다. 둘 다 향이 강해서 맥주만 마셔도 좋은 편인데 무거운 안주보다 가볍게 과자나 땅콩 같은 것들 하나 까서 홀짝홀짝 마시기 그만이다. 나는 특히 애프터 블랙에 빠져서 10캔씩 쟁여놓고 마셨다. 하지만 요즘 힙한 맥주들이 많아서 이 맥주의 인기는 그닥인지 모든 cu 매장에서 팔지는 않았다.
문득 맥주 광고를 친근한 가수 장윤정이 하면 어떨까 상상해 봤다. 퇴근과 육퇴 후 맥주 한 잔의 가치를 아는 건 역시 엄마들인데 말이지. 나도 인스타로 친환경 주방세제랑 어린이 그림책(자신 있게 홍보할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던) 협찬 말고 맥주 협찬이나 받았으면. 매일 그 맥주 공장을 향해서 큰절하고 1일 1스토리 올릴 자신 있는데.
📖올해의 책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제목 때문인지 쉽게 펼치기 어려웠던 책이었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책의 내용이 불량 청소년 부모의 변명이나 하소연일 까봐였는데 결과적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데 그 어떤 육아서보다 더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서 총기난사를 한 후 자살한 아이의 부모는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계속 아이의 과거를 떠올린다. 자신이 놓진 점, 아이가 그런 짓을 벌인 이유, 아이를 막을 수 있는 타이밍이나 방법 등등을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의 전부를 알 수 없으며,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를 책 전반에 걸쳐하고 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아이가 아닌 엄마에게서 문제점을 찾는다. 저자가 그런 것처럼 그 사회 전체가 끔찍한 테러를 저지른 아이의 부모를 악마를 키운 사람들로 본다. 마치 그녀가 더 좋은 엄마였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처럼.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이런 일을 어떻게 저지를 수 있었던 건지, 이미 세상을 뜬 딜런의 이야기가 듣고 싶지만 그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놀라웠던 점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따뜻한 보살핌과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도 소아우울증에 걸릴 수 있고, 대부분 자살하기 한 달 전 소아과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적 아픔이 신체적 아픔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 원인 모를 복통을 자주 호소하던 큰 아이의 괴로움을 꾀병 취급하거나 익숙해지지 말아야겠다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딜런을 키우는 일은 끝이 났다. 이 아이를 만들어내는 데 들였던 모든 사랑과 노력이 끝이 났다.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中
🍲올해의 음식 - 어복쟁반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좋아한다. 가끔 친구가 만나서 뭐 먹을래? 하면 청주에 없는 거! 한 번도 안 먹어 본 거!라고 얘기하곤 한다. 아는 맛이 무섭다지만 모르는 맛은 황홀하다. 아마도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나 보다. 낯선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먹고 보고 느끼고 싶어서.
올해 처음 먹어본 음식은 어복쟁반이었다. 어복쟁반이라는 이름도 생소해서 오향장육이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친구에게 바로 연락이 왔었다. “희정아, 우리가 오늘 먹은 건 어복쟁반이야!” 얇게 썬 고기 편육과 채소를 놋그릇에 가지런히 놓고 따뜻한 육수를 부어 따뜻하게 먹는 요리였는데 그야말로 겨울 낭만이 가득한 요리였다.
함께 시킨 녹두전과 만두를 먹으며 어복쟁반이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해치웠다. 그날따라 무한대로 들어가던 술의 취기와 놋그릇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연기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일이라면 더 사람이 많았을 것 같은 청담에서 주말 낮 피양옥 테이블에 앉아 한가롭게 낮술을 하던 그날을 아마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누가 나에게 어복쟁반이 어떤 맛이든 물어본다면 앞으로 누가 나에게 빚질 일이 있다면 괜찮으니 어복쟁반이나 한 번 사달라고 할 만한 맛이라고 하겠다. 다 퉁 칠 수 있을 것 같은 맛.
올해의 새로운 음식은 운 좋게도 1월에 벌써 맛을 보았다. 천상의 맛이라는 카이막. 백종원 덕분이 유명해졌다는 데 친구가 배달하는 곳을 찾아내 고맙게도 맛보라고 보내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달 한 번씩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 그건 또 얼마나 설레는 일일까.

🧓올해의 실패 - 시니어 글쓰기 클래스
평소에 수업을 할 때, 아무도 시켜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글쓰기 홍보대사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한다. '이렇게 좋은 걸 재능이 무슨 상관이람.' 하는 마음이 크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 꽤 연차가 찼으니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노인들을 위한 수업이었다. 기록하지 못한 세월이 더 소중할 수밖에 없는 나이일 테니까. 시간은 많지만 마음은 조급하고 몸은 따라주지 않으니 하루라도 더 빨리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다. 호기롭게 수업을 시작했고 신청자도(모두 딸들이 대신 신청했다) 꽤 되었지만 , 아쉽게도 수업을 끝까지 따라오신 분이 아무도 없었다. 무료로 진행했던 게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무료 수업이라고 한사코 거절해도 따님이 수업료를 내셨던(이 금액은 산불 기금으로 기부했다) 분도 수업을 따라오지 않으셨으니까.
수업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산은 이분들의 책임감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다. 매주 숙제가 있었는데 글을 못 써 보내는 날은 너무 죄송해하셨다. 숙제를 매번 해오는 것보다 수업을 잘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렸음에도 공짜로 수업을 들으면서 숙제도 하지 않는다는 미안함을 구구절절 써 보내셔서 오히려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었다. 하지만 시니어 수업에서 받았던 좋은 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내 나이 또래나 젊은 친구들이 쓰는 글과는 다른 감동이 있었다. 가끔은 <봉순이 언니>를 읽는 기분으로 푹 빠져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었다. 가능하다면 시니어에 맞는 커리큘럼을 다시 짜서 올해 또 도전해 보고 싶다.
💌올해의 도전 – 뉴스레터
다른 사람들은 연말정산을 어떻게 할까 찾아보다 ‘도전’이나 ‘발견’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새롭게 무언가 도전해 본 적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뉴스레터나 시니어 수업을 시작하는 것도 처음에는 설레는 도전이었다. 사실 프리랜서는 매 순간이 도전이다. 글쓰기 수업을 개강할 때, 내 글을 세상에 내보일 때, 그럼에도 내 도전은 '도전'이라는 말의 의미가 갖는 날것의 기분은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올해의 도전 정도 되려면 번지점프를 하거나 산티아고 순례길 정도는 걸어야 할 것 같다. 올해는 무언가 새로운, 낯설도 두려운 것에 꼭 도전해 봐야지. 나이가 들면서 자꾸 익숙한 것만 찾게 되어 일부러라도 해야지 싶다.
이건 우리 집 10살에게 배워야겠다. 해가 바뀐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고 싶은 것, 새로 시작한 것들이 엄청나다. 한자 7급 시험을 보고 싶고, 역사책을 만들어 보고 싶고, 주식을 해보고 싶다는 녀석 때문에 처음으로 주식 계좌를 만들었다. 키즈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나서 처음 카카오 이모티콘을 써보더니 요즘은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보겠다며 32컷의 그림 그리기에 열심이다.
🌸올해의 장소 - 청안 벚꽃길
전국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여기가 이렇게 좋았나 왜 자주 오지 않았을까 감탄하게 된다. 태안의 평온한 바다와 경주의 동글동글한 풍경, 한국화 풍경처럼 겹겹이 펼쳐져있는 정선의 산세들이 그렇다. 재주 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힙한 장소들은 또 어떤지. 어쩜 이렇게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질투 나는 재능에 탄복하게 된다. 그럼에도 내가 올해의 장소로 손을 들어주고 싶은 곳은 동네에서 멀지 않은 동네 벚꽃길이다.
우리가 청안에 갔던 건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조금 지나고 막 꽃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하필이면 만개일 때 코로나로 온 가족이 집에 격리되어 있어서 직접 봄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게다가 일기예보를 보니 다음 날은 비 소식이 있었다.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나면 언제 피었나 모르게 앙상한 가지들만 남을 것이다. 이미 잘 준비를 마치고 잠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에게 얇은 점퍼를 하나씩 걸치고 바로 나왔다. 차로 청안 벚꽃길을 검색하면서도 만약 다 떨어졌으면 어쩌지. 시간이 늦어져 가로등이 다 꺼져있으면 어쩌지 불안했다. 하지만 창밖 풍경을 보고 우리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이들은 잠깐 주차하는 사이를 못 기다리고 빨리 달려가겠다고 난리였다. 길 양쪽에 심어진 벚꽃나무는 얼마나 키가 큰지 가지들이 서로 만나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동화 같은 풍경에 몇 번이고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아름다운 봄밤이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벚꽃 개화시기에 맞춰 몰려들 정도의 장소는 아니지만 벚꽃으로 유명한 관광지에서 실망감만 안고 돌아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름다운 풍경은 우연히 만나야 감동적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타이밍이 중요한 건 사랑뿐만이 아니었다.

🍓올해의 발견 - 수조행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내 삶에서 사랑하는 작고 사소한 것들을 글로 써보기 시작했다.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하나뿐인 딸기를 먹거나, 맨날로 슬리퍼를 신고 발가락 사이 바람을 느끼는 것처럼, 사소하게 기쁜 순간들이 모여서 결국은 하루하루를 채우며 살아야 덜 힘들 것 같았다. 수시로 조금 행복해진다는 뜻으로 #수조행 이라는 태그도 달아줬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내가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걸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이벤트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날의 즐거움을 위해 한참 전부터 설레는 건 확실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결혼기념일 같은 것뿐만 아니라 아이가 단축수업을 해서 집에 일찍 오는 날이라던가, 남편이 평일에 하루 쉴 수 있게 되었을 때처럼 무언가 평소와 다른 날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날은 뭘 할까, 조금 특별한 걸 하고 싶다 생각하며 궁리하는 걸 좋아했다. 의외로 그런 작은 이벤트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요즘 내 수조행은 지워지는 볼펜이다. 빠르게 무언가 써야 할 때는 부드러운 연필을 사용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것들은 볼펜으로 쓰는 걸 좋아한다. 무언가 떠오를 때는 손이 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서 한 글자라도 놓칠까 봐 미끄러지는 연필을 쓰는데 누가 내 종이를 빼앗아가서 지우개로 지우는 것도 아니면서 완성된 기록까지 연필로 쓰는 건 불안하다. 반대로 볼펜으로 쓸 때는 만약 틀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대체 어쩌라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사용하는 지워지는 볼펜은 고맙게도 그런 내 불안을 잠재워줬다. 마치 초등학교 때 온도에 따라 변하는 반지를 문방구에서 처음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고 재미있다.
👜올해의 브랜드 – 볼삭 / 소사
마요네즈 매거진 인터뷰를 통해서 알게 된 브랜드였다.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인터뷰 콘텐츠를 좋아하는데 볼삭은 처음 들었던 브랜드라 신선했고, 무엇보다 대표의 무드가 좋았다. 가방을 만드는 브랜드야 많지만 원단을 모두 직접 만들며, 외국에서 제작해 온다는 게 언뜻 생각하기에 쉬운 과정이 아닌 것 같았는데 '대단한 건 아니었다'라는 식의 가벼운 태도로 자신의 브랜드를 소개했다.
적당한 가난뱅이답게 여행이 아니고서는 고가의 소비는 하지 않는데 무엇보다 가격도 합리적이라는 게 관심을 구매까지 이어가게 했다. 복주머니 모양에 자수 원단에 우드볼 손잡이가 달린 대표 상품은 엄마에게 사드리고, 비즈 목걸이는 (같은 대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브랜드 소사 제품이다) 동생의 여자친구가 생각나서 선물했다.
호기심이 가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지만 좋은 걸 내 몫으로 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정작 내 것은 없었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나도 하나 갖게 되었다. 동생이 갖고 싶은 게 있냐길래 처음에는 여자친구나 사주라며 거절지만 계속 이야기하길래 얘가 로또라도 됐나 싶어 냉큼 링크를 보냈다. 몇 등인지는 모르지만 진짜 로또라면 누나가 십만 원짜리 가방 하나는 받아도 될 것 같았다. 디자인은 같고 컬러는 다른 가방을 보여주며 두 개 중에 알아서 결정해 달라고 했다. 하나는 차분한 겨자색, 다른 하나는 레오파드 무늬였다. 며칠 후 택배가 도착했고, 조심스럽게 연 박스 안에는 레오파드 백이 들어있었다.
책이 안 들어가는 사이즈 가방은 너무 오랜만이라 이 가방을 메고 나갈 때면 책을 따로 들어서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가방은 뭘 넣으라는 거냐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소리씩 했지만 입꼬리는 자꾸 올라갔다. 화장실 거울이나, 커다란 가게 유리창 앞을 지나갈 때마다 예쁜 가방을 멘 나를 자꾸 찍게 됐다. 업어 키운 동생이 사준 가방이라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놀라워하는 중이다.

여러분의 한 해는 어떠셨을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올해의 OO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그럼 명절 연휴 잘 보내고 저는 며칠 후에 다시 편지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많으세요.
23.1.21.
희정
💌문화다방 소식

생명의 숲에서 후원 증서를 보내주셨어요.
감사하게도 후원 물품을 보내주셔서 1월 3일 안부 인사 편지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택배로 보내드렸답니다. 이번 편지에도 댓글을 가장 먼저 남겨 주신 두 분 께 선물을 보내드릴게요. 😉
'아주 사적인 마흔' 구독자분들의 소중한 구독료는 나무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거예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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